* 김경집의 세상 속으로 경향잡지 1809 p94-97
행운과 불운은 누구의 몫인가?
글_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생각을 걷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등
-전략- 그러다 어느 날 익숙해진 그 습관을 버리고 오로지 음식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음식과 대면하면서 나의 모든 감각을 깨우고 느끼며 확인하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식감에 집중했고 나중에는 다양한 미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 앞에 놓인 식사의 재료는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누가 길렀는지 그리고 그것을 누가 어떻게 요리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어느 하나 가벼운 게 없었다. 농부의 노동과 조바심 그리고 기대와 환희가 거기에 깃들였고 제대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 회한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기도 했으며, 산지에서 싣고 밤새 달려온 트럭 기사가 벌였을 잠과의 사투가 떠오르기도 했다. 뜨거운 여름날 식탁에서도 무더위를 느끼는데 화기 가득한 주방에서 고군분투했을 주방장의 땀도 예사로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한 끼 식사에 그렇게 많은 땀과 고생이 담겼으니 그 식사의 최종 소비자인 나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세상 일 어느 하나 혼자만의 몫은 없다.
*혼자만의 성공은 없다 : 로버트 H. 프랭크는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그 누구도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성공한 사람들, 특히 부자들은 재능이 뛰어나고 엄청나게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통념에 대해 그는 그 성공의 큰 몫은 ‘운’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른바 ‘운칠기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 의원이 선거 유세에서 했던 발언을 소개한다. “이 나라에서 혼자 힘으로 부를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 밖에 공장 하나를 지었다고 칩시다. … 그러면 여기 우리가 낸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를 통해 시장으로 상품을 운반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가르친 직원들을 고용하겠지요. 여러분의 공장은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금으로 유지하는 경찰과 소방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자급자족의 경우가 아니면 혼자 살아갈 수 없다(그 자급자족의 경우도 원시적 의미로 완전한 건 아니다. 누군가가 만든 도구와 기본적으로 축적된 정보 등의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동시에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간다. 물론 그 도움에는 일정한 비용이 지급된다. 그러나 그 비용의 지급이 늘 공평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그 득을 크게 보고 또 누군가는 그와는 반대로 득을 볼 일이 훨씬 작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그런 현상은 도드라진다. 행운이라는 게 별것이 아니다. 그런도움을 얼마나 시의 적절하게 받느냐 하는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축적한 부와 권력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재능 덕분이라고 여기는 이가 많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이룬 바에 못 미쳐서 사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지하며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깎아내리기를 거리끼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을 멸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축재 수단으로만 여긴다. 공교롭게도 겹치게 돌출되어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린 두 항공사 일족의 행태를 보면 그게 여실하게 드러난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만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그런 성과를 누렸을까? 온갖 세제의 이득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 상황이 그들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서 그만큼 성장하는 밑돌이었음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들만의 몫인 것처럼 하나의 왕국을 만들어 제왕처럼 군림하고 다른 이를 무시하는 일을 무람없이 저질렀다. 남들은 취업조차도 힘든데 오로지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곧바로 임원의 자리에 오르거나 심지어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이 가정주부로 살아온 딸에게 상무자리를 안기면서 남들에게는 ‘예쁘게 봐 줄’ 것을 당부한다. 그것도 다른 장소가 아닌 자신의 허물을 사죄하는 자리에서 그럴 정도이니 그들의 인식 저변에 깔린 사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랭크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은 성공에서 행운의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행운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불운에 대해서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차분하게 새겨야 할 때다. 천박한 사고를 하면서 상대적으로 우월적 입장에 있게 된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할 때 자신의 성공에 수많은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무시한다. 혼자만의 성공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공동체 정신의 회복 :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에 누구나 시원한 냉방 장치를 원한다. 자연의 시원한 그늘을 일상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도회의 삶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다행히 내가 부자라면 전기 요금에 대한 부담 없이 종일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고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에어컨을 켜서 시원한 만큼 실외기가 뱉어 내는 열기는 그만큼의 더위를 고스란히 밖으로 생산해 내고 그 더위를 누군가는 그대로 떠안고 살아야 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은 알면서 행운 총량 불변의 법칙을 모르는 건 청맹과니의 삶이다. 나 혼자 시원하려고 다른 사람더운 걸 외면하는 것은 야비한 삶이다. 물론 내가 정당하게 비용을 내는 것이니 법적으로는 문젯거리가 될 게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는 타인에게 그 결과의 몫을 떠안게 하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얻는 행복은 결코 참행복이 아니다. 그게 정의의 근본적 인식이다.
누군가에게는 행운으로만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운으로만 작동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그런 사회는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내가 먹는 밥 한 그릇에 농부의 땀만 담기지는 않는다. 흉년이건 풍년이건 그때마다 마음 졸이고 정당한 제값을 얻지 못하는 참담함에 괴로워하는 농부의 조바심과 불안도 담긴다. 대파 한 단에 고작 980원일 때 소비자는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누리는 작은 행복에는 밭에서 그걸 단돈 150원에 넘겨야 하는 농부의 피눈물이 깔렸다는 애잔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경쟁 사회라 해도 누군가를 핍박하고 착취하며 나 혼자 성공해도 된다는 건 허용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축재한 자들을 존경하고 동경하는 사회는 이미 병든 사회다. 그런 공동체는 썩은 공동체다. 복음은 건강하고 상생하는 공동체를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권고한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이 여름 한 시간만이라도 에어컨을 끄자. 내가 조금만 견디면 누군가는 덜 힘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