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우리 민요 중에 즐겨 부르는 「진도아리랑」 에서 그 첫 대목은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 눈물이 난다’로 시작된다.
진도아리랑의 고향은 진도일 터인데 그 첫소리는 왜 ‘문경새재’로 시작하는지? 진도와 문경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를 두고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이의 이야기로는 진도에 처음 들어간 사람들이 주로 문경 사람들이었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지만,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없다. 문경새재에서 바다 건너 진도에 들어갈 지리적 역사적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삼별초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진도 군내면에 사적 126호 용장산성이 있는데, 이곳은 고려 때 정부가 몽고 왕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이에 불복하여 삼별초군이 강화도에서 남하하여 대몽(対蒙) 항쟁의 결의를 다짐하고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장군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군은 이곳에서 2년 동안 버텼으나, 끝내 몽고군과 고려 관군의 연합군에 패하자 삼별초군은 진도 남단 임회면 남동리의 남도석성(南桃石城 사적 127호)으로 퇴각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그 당시에 난을 피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 문경새재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또한 지리적 논리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근거가 없다.
이런 주장도 있다. 지금의 아리랑은 그 본향이 강원도 정선인데, 이 아리랑이 조선조 말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전국에 퍼져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됐다는 주장이다. 경복궁 중수를 위해 문경의 박달나무가 베어져 사용됐고, 당시 공사를 위해 전국에서 인부가 동원됐음을 상기하면 진도아리랑에 왜 문경새재가 나오는지 의문이 쉽게 풀린다는 것이다. 인부들이 귀향해서 각지에서 여러 형태의 아리랑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의 노랫말에서 경복궁 중수의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사설의 기원이 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진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의 사랑 이야기로 보고 있다. 진도 총각이 경상도 대갓집에서 머슴살이하다가 주인집 딸과 몰래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쫓기는 몸이 되어 진도로 도망쳐 정답게 살다가 총각은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도 진도와 경상도라는 지명은 나타나 있지만, 문경새재를 진도아리랑에 갖다 붙일만한 근거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문경새재’라는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주장이 나왔다.
‘문경세재는 웬 고갠고∼’가 왜곡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진도군 및 문화예술단체, 국립국악원, 군민 등이 사실조사에 착수해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첫소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한다. 진도아리랑은 순수한 서민들의 삶으로 희로애락의 노래인데 하필이면 수백여 가사 중 특정 지역의 이름이 게재된 ‘문경새재(경상북도)는∼’이라는 가사를 진도아리랑을 대표하는 첫마디로 교과서에 게재해 특정 목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했다는 것이다. ‘문경새재’는 ‘문전(門前) 세 재(인생살이의 세 고개)는 웬 고갠고’라는 본래의 가사를 왜곡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진도아리랑을 연구하면서 실제로 진도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그 근거가 타당할 듯하다. ‘인생살이의 세 고개’를 한스러워하는 첫 대목이라는 데 이해가 된다. 그런데,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에서 ‘구부’(구비)를 인생살이의 구비라고 해석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문경새재의 산 구비처럼 험한 산길이 더 어울리는 대목이다. 다른 연구자들의 말을 빌리면 진도에서도 대부분 ‘문전 세 재’가 아닌 ‘문경새재’라고 노래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서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문전세재’로 바꿔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이미 1930년에 지역 공동체에서 공인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진도아리랑은 1930년대 전후에 진도 출신 음악인들이 남도의 산아지 타령과 1910년대에 유행했던 구조(旧調) 아리랑의 첫 절을 재구성하여 형성된 아리랑이므로 ‘문경새재’라는 시어(詩語)를 ‘문전세재’로 바꾸어 부르자는 것은 1930년대 진도 출신 음악인들의 생각을 왜곡시키는 것이므로 재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 세기 동안 전국적으로는 문경새재로 기록되어 있고, 진도아리랑 비(碑)에도 그 첫수가 ‘문경새재’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이를 고쳐 불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왜 진도아리랑 첫 대목에 문경새재가 나왔는지,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고 못 하고 있다.
끝으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진도아리랑은 대체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태어났다는데, 다음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전에 있었을 것 같은 이야기이다.
산간 해안 섬들을 찾아다니며 제법 큰 벌이를 하던 방물장수들이 있었다. 이들은 팔 물건을 보퉁이에 싸서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는데, 본업 외에 여염집 여성에게 세상 소식을 알려 주거나 특수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구실도 겸하였다. 특히, 내외가 엄격하던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집 여성의 바깥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세상 물정을 알려면 그런 방물장수의 입을 통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잡화(雑貨)라고 통칭하는 물건들이 과거에는 목기(木器)·황아·방물 등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목기는 밥상·제기(祭器)·소쿠리 등 나무로 만든 물건들이고, 방물은 참빗·얼레빗·색경(色鏡)·금박띠·댕기·바늘·실·골무·화장품·패물 등 여자의 소용품들이며, 황아란 이러한 물품들을 제외한 대님, 허리띠 따위, 담배쌈지 같은 잡살뱅이 일상생활용품들이었다.
한편, 방물장수는 대갓집 안채에까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므로 단골을 맺은 마나님들의 말동무도 되어 주고, 나중에는 집안 큰일에 의논 상대로까지 끼어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혼사(婚事)에 관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하면, 방물장수는 대소가의 내력과 형편은 물론, 혼기에 이른 처녀나 총각이 어디에 있는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통혼 길을 트는 매파로서 그 능력을 크게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절하는 딸자식을 가진 집에서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방물장수의 출입을 매우 꺼렸다. 홀어미가 방물장수의 눈에 띄면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게 되고, 그 결과 혼사가 거론되어 번잡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 가문의 사정을 염탐하는 정보 수집꾼으로 방물장수를 이용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방물장수는 생계가 어려운 섬 처녀를 육지의 곳곳에 시집보내는 중매쟁이 구실을 했다. 진도에 살던 한 가난한 집 처녀가 팔려가다시피 방물장수를 따라 문경 깊은 산중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되었던지 아들딸을 여럿씩이나 낳도록 고향에 가보기는커녕 고향을 생각할 틈도, 바깥세상을 구경할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살았다.
‘열두 폭 다홍치마 눈물 젖어 다 썩었겄제!’
나이 들어 시집살이 면하고 나니, 어느 사이 머리는 백발. 지나온 세월이 너무너무 한스러워 부엌 뒤쪽 거적문을 들치고 병풍처럼 보이는 새재를 올려다보니 한탄이 절로 난다.
‘구비는 아흔아홉 ~ 고향은 멀고도 멀구마잉!’
그 많고 많은 구비를 어찌 다 헤어나볼꼬!
‘그저 눈물뿐이로다!’
진도와 문경새재 사이의 거리로 봐서 이 이야기도 그다지 신빙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위에서 주장한 여러 다른 이야기들보다는 훨씬 더 〈굽이굽이〉 마음에 와닿네!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