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데서 도리어 행복얻어”
“문명의 利器는 수행자에게 독
구하려는 마음 포기하세요”
◇출가이후 40년간 산사에서 주경야선 해오며 수행자의 본분사를 묵묵한 실천행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도윤 스님.
◇지난 가을 법당앞 텃밭에서 무를 수확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도윤 스님.
◇도윤 스님이 직접 영시암을 찾은 등산객들에게 무를 깎아주고 있다.
흙 묻고 낡은 승복
晝耕夜禪 40년
‘설악산 농부스님’
“세상을 위해 내가
회향할 바가
무엇인지 항상 고민”
검게 그을린 얼굴, 주름투성이의 거친 손, 작업복처럼 군데군데 흙이 묻어있는 승복….
내설악을 찾는 불자들에게 영시암 회주 도윤(71) 스님은 ‘설악산 농부 스님’으로 불린다. 도윤 스님이 모처럼 서울에 왔다.
스님은 겨울철이면 도심 나들이를 한다. 주로 가는 곳은 상좌들이 있는 서울 충정사와 의정부 쌍용사다. 지난달 서울에 온 스님은 현재 서울 중구 한옥마을 바로 옆에 위치한 충정사에 머물고 있다. 스님은 찾아오는 신도들을 반겨 맞으며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세상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충정사에는 해마다 머무는 스님을 위한 방사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그 방은 정갈하지만, 검소하기 그지없는 스님의 성품 그대로 아무 장식품이 없다. 승복을 걸어두는 옷걸이와 이불만 놓여 있을 뿐이다. 출가 이후 40여 년 간 주경야선(晝耕夜禪)만 해온 스님에겐 외형적인 장식품은 모두 군더더기일 뿐이다.
“문명의 이기는 출가 수행자에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욕망을 자극할 뿐이지요.” 낮에는 채소 키우고 밤에는 좌선에 매진할 뿐인 스님이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이 서울엔 거의 없다. 서울이 사람들에게 아무리 편하고 행복을 주는 곳이라 한들 자연을 벗 삼아 정진하는 산 생활과 견줄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을 뒤로한 채 산에서 사는 스님을 안타까워 하지만 정작 스님은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한다.
“현대인들은 한없이 구하고 구하는데만 열중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사람이 먼저인지 물질이 먼저인지 분간을 못하고 살아요. 예로부터 선사들은 ‘마음이 도적’이라 경계 했습니다. 행복은 결코 밖에서 얻을 수 없다는 얘기지요. 도리어 버리는 데서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집착하고 구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세요. 그것이 바로 자기완성의 길이자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도윤 스님은 인제 백담사에서 대청봉 쪽으로 약 1시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영시암에서 생활하신다. 지난 68년 발을 들여놓은 후 지금까지 설악산을 주 거처로 삼고 있다. 30년 넘게 내설악의 여러 암자와 사찰을 거쳤지만 영시암을 마지막 수행처로 정한 이유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법당을 중심으로 텃밭 5천여평, 지금은 임야로 돼 있지만 밭 3만여평이 있어 자급자족을 원하는 스님에겐 더 없이 좋은 도량이다. 88년 영시암을 복원한 스님은 무, 배추 등의 채소 농사를 지어 먹을 거리를 마련해 오고 있다. 당귀, 작약, 만삼, 더덕 등 약초도 재배한다. 스님이 야생 약초의 씨앗을 받아 재배한 약초들은 스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도들을 위한 것이다.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을 비롯해 영시암 참배객들은 따뜻하고 건강에 좋은 약차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스님은 재배한 약초로 차를 끓여 법당 마루에 늘 놓아두기 때문이다.
“설악산을 찾는 불자들이 봉정암만 절이라고 생각하는지 다른 사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더군요. 하루에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영시암 마당을 밟고 가는 데도 영시암 부처님께 인사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차 공양이었어요. ‘차나 한잔 들게나’가 불교의 인사법 아닙니까.” 스님은 영시암 부처님께 인사를 안해도 그저 그들이 차를 맛있게 들고 가는 것을 보면 기쁘기 그지없다.
4년 전부터 영시암에서 사찰 일을 돕고 있는 무애림 보살은 “봉정암에 기도하러 가던 중에 노스님이 혼자서 법당 청소하는 것을 보고 영시암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촛불아래 참선하는 도윤 스님에게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만선화 보살(58ㆍ경기도 안양시)은 “매번 영시암을 찾을 때마다 스님이 직접 개간한 경작지가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며 “검소하고 수행자 본분에 철저한 스님의 일거수 일투족이야말로 산 법문”이라며 흐뭇해했다. 이렇게 스님의 산 법문에 매료돼 영시암을 찾는 불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제나 강원도내 불자도 아니다. 대부분 서울이나 경기도의 불자들이다.
“농사일을 직접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는 물음에 스님은 “수행자라면 내 먹을 것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스님이 일부러 <백장청규>를 의식하신 것은 아니다. <백장청규>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땀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런 생활을 계속 해온 것이다.
도윤스님은 출가하기 전 농촌계몽운동을 한 적이 있다.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농촌의 문맹퇴치와 농로개발 등을 위해 2년 정도 직접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체험하고, 살기 어려운 탓으로 접어둔 학문의 갈증을 풀기 위해 찾아간 곳이 공주 마곡사 복천암이었다. 당시 불교학승으로이름났던 속가 당숙인 김동화 박사가 복천암의 관응(현 직지사 조실) 스님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관응 스님을 만난 도윤 스님은 스님에게 감화받아 곧바로 머리를 깎고 복천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행자시절 모든 대중이 나보다 나이가 적었으나 다 스승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어긋남 없는 생활을 보고 있노라면 순수의 상태로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행복했던 것은 농사짓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했던 노무자생활과 출가 전에 농사를 지은 경험으로 늘 남보다 서너 배 되는 나뭇짐을 져 나르고, 모 심고 벼 베는 일에도 언제나 일등이었지. 다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일하고 공부하는 데에서 환희심을 느꼈고 이것이 복 짓는 일이구나 생각했어요.”
스님에게 일과 수행이 둘이 아님을 일깨워준 사람은 복천암 주지 봉인 스님이었다. “어느 날 봉인 스님은 나를 불러 ‘돼지를 보았는가. 그들은 구정물을 먹고 살지만 많은 것을 세상에 회향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공 것이란 결코 없는 법이지요. 얻어먹은 만큼 아니 그보다 몇 배로 갚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어요. 이 때부터 스님의 말씀을 평생 귀감으로 삼아 내가 세상에 회향할 바가 무엇인지를 늘 염두에 두고 살게 되었어요.”
이런 다짐은 출가이후 몸을 담았던 사찰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정선 향적사와 적조암, 설악산 오세암과 봉정암, 화성 신흥사…. 지금은 번듯한 사찰들이지만 60년대만 해도 이 사찰들은 서로들 가지 않으려 하거나 사람들이 살지 않고 비어있는 사찰이 었다. 적조암의 경우 말이 암자지 토굴이었고, 오세암은 기와 조각만 흩어져 있는 폐사지였다. 이런 곳에서 스님은 자급자족을 하면서 정진했다. 최소한 남의 것을 얻어먹지 말자는 각오가 투철했다. 그래서 텃밭에 채소를 심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음식을 얻었고, 농사지을 땅이 없으면 약초를 캐고 잣 등의 열매를 따서 약초꾼과 양식을 교환하기도 했다. 산중 생활을 하면서 스님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서 담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나름의 진리를 깨달았다.
“도시에서 묵언을 하려고 해봐요.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힘들지요. 산중선정시무난(山中禪定是無難)이요, 대경부동시위난(對境不動是爲難)이라. 즉 산중에서 참선하여 정에 들기는 쉬우나, 세속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불가에 있어요.”
스님은 이렇게 정진하면서 영시암 봉정암 등 사찰불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칙을 하나 세웠다. 일궈 놓으면 떠나야 한다는 것. “한 곳에 오래 살면 물욕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주가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되면 그동안 지은 좋은 인연들이 한꺼번에 다 없어집니다.”
스님은 한 때 백담사와 의정부 쌍용사 주지를 역임했지만 그 이후엔 주지 소임 권유에 응하지 않고 있다. 수행자가 소임을 맡으면 여러 일에 끄달리고, 대소사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마음 닦는데 소홀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탐욕을 끊어버리고 평생 길에서 산 것처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는 스님은 40여년을 계속해온 자연속에서의 생활을 죽는 순간까지 버리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몸의 편안과 물질에서 안락을 구하면 물질의 노예가 될 수 있기에 수행자는 편안함과 물질에의 집착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가진 것이 없으면 더 가지려는 마음 또한 없게 된다. 그러므로 부족함 또한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님의 수행생활에 만족할 만한 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회도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다고 토로하신다. 그 중 은사인 관응 스님이 봉정암을 찾았을 때 하신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하신다.
“빈대가 들끓었던 방에서 스님을 모시고 자며 여쭈었습니다. ‘스님 무문관에 들어가시지 말고 여기 계시면 어떨까요.’ 가만히 내 말을 들으시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도윤인 여기 육년 있고, 나는 내려가 그곳에 있지.’ 스님께선 다음날 내려가셨고, 나는 결국 여섯 해를 채우지 못하고 불사를 하게 되어 내려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대로 수행에 힘을 쏟을 걸 하는 후회가 남아 있습니다.”
설악산 영시암을 찾는 불자들이 많아지면서 스님을 알아보는 불자들도 많아져 ‘큰스님’이라 부르지만 이 또한 스님에겐 속박으로 여겨진다.
외부에 알려지다 보면 자연히 일과 수행에 게을러지지 않을까 해서다.
산 속 암자에서 평생 주경야선으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도윤 스님에게서 철저한 수행자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글=김중근 기자 gamja@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도윤스님은?
1931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도윤 스님은 동국대학교 사학과에 다닐 때 당숙인 故 김동화(당시 동국대 대학원원장) 박사의 집에서 4년 동안 살면서 불교를 접하게 됐다. 졸업 후 고향으로 내려가 농촌계몽운동을 2년간 했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학문의 갈증을 풀기 위해 불교로 눈길을 돌린다. 김동화 박사는 당시 불교학승의 최고봉인 복천암의 관응(직지사 조실) 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이 인연으로 복천암에 들어가 공부하다 1960년 출가했다.
이후 직지사와 수원 용주사 등에서 관응 스님을 모시고 교학을 공부하던 스님은 돌연 수좌의 길을 걷게 된다. 강원도 정선 적조암에서 머물 때 몇몇 스님들과 선방을 개원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때부터 스님은 설악산 오세암, 봉정암 등 인적이 없는 암자와 사찰을 찾아 주경야선을 하며 정진해 왔다. 특히 내설악에서만 30여년 때 살고 있다.
스님은 지금까지 주지직은 설악산 백담사와 의정부 쌍용사 두 번 밖에 맡지 않았다. 백담사 주지로 있을 때는 오세암과 봉정암을 복원했고, 쌍용사 주지로 있을 때는 석주(칠보사 조실) 스님을 모시고 중앙승가대학을 설립, 2대 학장을 지냈다. 1988년부터 설악산 영시암을 복원해 회주로 있다.
�
첫댓글 일궈 놓고 떠나는 도윤스님의 수행.
감동이 전해집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잔잔히 묵직히,,,()
봉정암을 다녀오는길에 영시암에서 상량식을 하고 있었고..우연히 만난 상량식에서 맛난 팥시루떡을 얻어온 기억이..
어이구~ 인연줄이 벌써 닿았군요!!~()
내설악에 굴러다니는 철모자들을 모아놓고 천도제도 많이 지내셨다는..호국영령들의 극락욍생을 위하여...그런법문을 들었던 기억이..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