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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하나님의 말씀은(12, 13절)
12절과 13절은 안식에 대한 교훈과 대제사장에 대한 교훈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삽경(揷景, interlude)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에 대한 말씀(약속)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말씀 앞에 죄를 드러내어 회개하고 이 죄를 대속 받기 위해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본문의 말씀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1.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하십니다.
a.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하십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지만, 넓게 보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NASB)”하심은 성경은 오래전에 기록된 고문서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래 전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 중동에서는 2,600년 전에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에스겔 38, 39장) 곡과 마곡의 전쟁이 무르익어가고 있고, 2,000년 전 사도 요한이 보았던 짐승의 표 시스템이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적인 경전에도 성경처럼 미래의 사건을 정확하게 예언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는데, 성경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living and active)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b. 두 번째,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하십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엡 6:17)으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이 말씀의 검이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생선이나 고기를 부위별로 분류하는 회칼이나 필레 칼처럼 묘사한 것인데, 그 부위가 구체적으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라 하십니다. '혼과 영'(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과 '관절과 골수'(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라면 인간을 구성하는 영과 혼과 육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영적으로 지은 죄와 혼적으로 지은 죄와 육적으로 지은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겁니다.
죄 가운데는 성적인 죄처럼 육체로 짓는 죄가 있고, 시기, 질투, 탐심처럼 마음(혼)으로 짓는 죄가 있고, 우상숭배처럼 영적으로 짓는 죄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죄들을 낱낱이 드러내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십계명만 받아 내려온 것이 아니라, 성막의 모형도도 함께 가져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과 십계명을 통해 죄를 깨달은 자들이 이 죄를 대속할 수 있도록 성막의 모형도를 주신 것입니다. 12절에서 죄를 드러내는 말씀의 역할을 강조한 것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신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한 것인데, 여하튼 말씀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구세주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2.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하십니다.
a. 먼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라는 말씀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쪼개어 감찰하시는 말씀의 능력이 사람뿐 아니라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입니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 앞에 숨겨질 피조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을 성육하신 말씀으로 소개하는데(요 1:1-3,14), 예수님이 만물을 감찰하시는 말씀이 되시기에 갈릴리 바다 속 어디에 물고기가 있는지 아셨던 것이고(눅 5:4), 또 어떤 물고기가 베드로와 예수님의 성전세로 지불할 은 한 세겔을 물고 있는지 아셨던 것입니다(마 17:27).
b. 두 번째는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라는 문장이 헬라어에는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with whom we have to do, NASB)'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편 “드러나느니라”는 단어는 헬라어 '테트라켈리스메나'인데, 이는 '목(트라켈로스)을 뒤로 젖히다'라는 뜻인데, 구체적으로는 짐승을 잡기 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테트라켈리스메나'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테트라켈리스메나).”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 마지막 날에 우리를 상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9:27), 이때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고, 이후로 마치 도수장에 끌려온 양처럼 목을 젖히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하십니다.
c.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는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난 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옷(치마)을 만들어 입던 장면이 떠오르는데(창 3:7), 인간이 범죄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라 죄를 가리려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를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내시고, 이에 대한 형벌을 선포하신 이후에, 비로소 가죽옷을 입혀 죄의 수치를 가리게 하셨습니다(창 3:21). “벌거벗은 것같이 죄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회개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게 한 다윗에게도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의 죄를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내시고 회개케 만드신 이후에 비로소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죄가 있다면 감추려 하지 말고 드러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이 대속의 가죽옷을 입혀 죄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하십니다.
II.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4:14-16)
히브리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1장 1절부터 4장 13절까지가 선지자와 천사와 모세와 여호수아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본 말씀이라면 4장 14절부터 10장 18절까지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10장 19절부터 13장 25절까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설명한 말씀입니다. 1장 1절부터 4장 13절까지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설명한 말씀이라면 4장 14절부터 10장 18절까지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한 말씀이라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명 가운데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의 사명을 강조하여 설명한 것인데, 앞으로 이에 관해 몇 주 동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하십니다.
a. “그러므로”는 12절 13절에서 설명한 말씀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의미하는데, 이 말씀이 우리의 죄를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내고 정죄하니, 우리가 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하신 것입니다.
b.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는데, “큰 대제사장”은 헬라어로 ‘아르키에레아 메간’인데, 말 그대로 great high priest, 모든 대제사장들 가운데 가장 크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예수님이 아론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된 다른 대제사장들과는 차원이 다른 우월한 분임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이 되어 대속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c. 세 번째,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하십니다. 이 말씀은 14절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데,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지금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고 계시니(롬 8:34) 이런 예수님께 대한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직역하면 '고백'이라는 뜻인데, 이로 보건대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 안에 신앙의 내용을 요약해서 고백하는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서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고백서가 후일에 사도신경으로 정리되어 예배 시간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베풀 때 그 기준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하십니다.
2.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십니다.
a.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씀에서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연약함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욥기 4장 19절에서도 인간의 연약성을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강한 듯싶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와 바이러스에도 목숨을 잃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b. “체휼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쉼파데사이'인데, 이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파스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쉼파데사이'를 번역한 영어 단어가 sympathize인데, 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선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은 인생들이 겪는 고통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겪는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시며 우리를 돕기 위해 나서신다는 겁니다.
3.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하십니다.
a. 우리를 체휼하시는(sympathize)하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긍휼하심(mercy)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무엇을 구할 때는 자신의 의나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만 의지해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grace to help in time of need.)”를 구해야 합니다. 배고플 땐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고, 병들었을 땐 병 낫기를 구해야 하고, 주의 오심이 가까운 것을 깨달았을 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때인지 아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 소경 바디매오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8: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기회에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해서 기도함으로 눈을 뜨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눅 18:43)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b.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은혜의 보좌(the throne of grace)”는 ‘속죄소(시은좌)’라 해서 본래는 성막 지성소에 있는 법궤의 뚜껑을 의미하는데, 성막이 완성되면 바로 이 속죄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 속죄소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레16:2-3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 바로 이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막 15:38)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6)라는 말씀의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4. 5장 1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절에서 구약시대 당시 대제사장으로 선택되는 과정과 저들에게 주어진 사역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1) 먼저,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하십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대제사장을 세웠다 하십니다. 이는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위하여” 일하는 중보자(中保者)의 사명을 맡은 자라는 겁니다. 3) 세 번째는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하십니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의 중보사역이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차례 씩 대속죄일에 드린 예물과 속죄의 제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레 16장).
5. 2, 3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하십니다.
a. 2절과 3절은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로 세우신 이유를 설명한 것인데, 먼저,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2)하십니다. 여기서 “무식하고”라는 단어가 헬라어 '아그노우신'인데, '알지 못하다' 혹은 '모르고 죄를 짓다'라는 의미이고, “미혹한”은 헬라어 '플라노메노이스'인데, '잘못 인도되다'라는 뜻으로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짐짓, 10:26) 고범죄와 구별되는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스스로도 연약에 싸여 있기에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9:7; 레4:2,13,22,27; 5:2-4).
b. 두 번째,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하십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으며, 또한 일반 제사장들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지만(출28:1,2) 그럼에도 항상 부지불식 간에 죄지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율법이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드려야 할 속죄제의 규정을 따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레4:3-12;9:7).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레 9:7)하십니다.
6. 4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하십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여 대제사장이 되었고, 이 직분은 이후로 그 후손들에게 세습되었습니다(출28:1;민3:10;18:1). 대제사장으로 처음 부름받은 아론은 사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진노케 했던 사람입니다(출 32장). 행한 일로만 따지면 결코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인물이지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저를 택하여 기름을 붓고(레 8:12) 대제사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자격으로 따지면 부족한 자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가 자격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론의 경우와는 반대로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음에도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려다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광야 길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던 고라당(민 16장)과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가 버림받은 사울 왕(삼상 13장)과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분향의 제사를 드리려다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 웃시야 왕(대하 26장)이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부르신 자리에 머물러야지 이 자리를 떠나 부름 받지 못한 사역을 탐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8. 5, 6절,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하십니다.
a. 구약의 대제사장 직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것처럼,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시 110:4) 대제사장이 되었다 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유다지파로 레위지파 아론의 후손들만 승계할 수 있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을 수 없으셨지만, “여러 임금을 쳐서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어준”(7: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이라는 말씀이 헬라어로 '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론을 제외한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아론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대제사장을 승계받았다면,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아론처럼 직접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대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이런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은 7장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선 7장을 강해할 때 살펴볼 예정입니다.
b.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5)하신 시편 2편 7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같이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대제사장일뿐 아니라 아론의 후손들로 세워진 대제사장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아론의 후손들과는 달리 아론과 멜기세덱처럼 하나님이 직접 대제사장으로 세우셨고, 또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간이 아니라 죄와 허물이 없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대제사장으로 세움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구약의 그 어떤 대제사장 직분보다 뛰어나다는 겁니다.
[출처] 히브리서 강해 7 – 대제사장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작성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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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오늘의 끝이 내일의 처음입니다. 오늘 무엇을 했느냐가 내일을 결정합니다.
오늘 바쁜 일을 미루면 더 바쁜 내일이 되고, 오늘 바쁜 일을 처리하면
여유로운 내일이 됩니다. 오늘도 좋은 생각들, 마음들을 가지고 보내도록해요.
꽃길만 걸으시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주인공으로 출발하시는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