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10-28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마태복음 5장 43절-48절
“어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의 어원을 아십니까?
맷돌은 팥· 콩· 메밀· 녹두 등 곡물을 가루로 만드는데 쓰이는 제분용(製粉用) 도구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생활하기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중요한 생활도구 중 하나였습니다. 맷돌은 납작한 원통 모양의 돌 2개를 위아래로 맞추어놓은 형태로, 위짝의 것은 암쇠라 하여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래짝은 수쇠라 하여 가운데가 뾰족해 위짝과 맞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위와 아래의 짝을 연결하는 중쇠가 있으며 위짝에 손잡이인 맷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쇠와 손잡이만 갈아 끼우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맷돌의 모양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며 크게 나누어 중부와 남부 지방의 것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이 맷돌을 돌리려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암쇠에 달려 있는 맷손입니다. 맷돌에 맷손 없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맷돌은 한마디로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렇다면 맷돌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맷손을 순 우리말로 할 때 무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어처구니’라고 부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콩이나, 팥 등의 곡물을 갈려고 창고에 넣어 두었던 맷돌을 꺼내어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손잡이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그래서 ‘어처구니가 없네.’ 했는데 그 후 어이가 없는 상태를 가리켜 어처구니가 없다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당황스럽고 어이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 말씀 중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이 말씀이 부담스럽고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수많은 율법을 지키려던 바리새인들조차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었으면 레위기 19장 18절 말씀 즉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말씀을 각색까지 하였겠습니까?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각색하였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바리새인들은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이 어처구니없고 부담스럽게 느껴져 하나님의 말씀을 빼고 바꾸어치기 하는 수고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슬그머니 빼버렸습니다.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혀 반대의 의미의 말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칩니다.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받아 드리기 쉽도록 각색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한 계시록 22장 18절과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이 받아 드리기 쉽고, 자기들에게 유리하고 편리한대로 더하거나 빼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위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근본 취지는 무엇이고,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넓이와 높이와 크기를 우리들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찬양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45절에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어처구니 없어할 우리들의 생각을 잘 아시기에 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중국 사천성의 지진으로 인한 참담함 속에서도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매몰되어 죽어있는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있는 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합니다. 심지어 악명 높은 세리도 능히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모두 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자신이 직접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질탕하게 죄를 짓고 있었을 때”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여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죄를 짓고 있으므로 예쁜 짓이라고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시는 그런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열 번, 백번 같은 죄를 저질러도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우리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말씀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이 “원수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이르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참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으시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못쓸 마귀가 유혹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그만 마귀의 형상으로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동생을 사랑하기는커녕 돌로 쳐 죽여 버리는 마귀의 형상을 닮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처럼 사정없이 무너지고 파괴되고만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급기야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한 아들이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도 이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주님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씀만 하십니까? 오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왼뺨을 돌려댑니까? 내 속옷마저 빼앗으려는 악질에게 어떻게 겉옷까지 내 줄 수 있습니까? 내 자유를 빼앗는 사람을 어찌 가만둘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하라하십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처구니없는 것을 요구만 하시는 분이십니까?”
목사의 수는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 적지 않지만 세계적인 신학자 한분이 없는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역사를 다 뒤져보아도, 세계 역사를 다 뒤져보아도 손양원 목사님처럼 감동적인 원수 사랑을 실천한 분이 없으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도리어 자부심이 생깁니다. 신학보다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손 목사님은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日帝時代에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일곱 살에 전라도 여수에 있는 “애향원 교회”라고 하는 나병환자를 돌보는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천황을 신으로 인정하고 신사 앞에 절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끌려가서 해방되기까지 5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렇게 출옥한 후 다시 여수 애향원 교회에 돌아와서 나병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3년이 채 되지 않아서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중고등학생과 청년들이 공산당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중에 한 학생이 손양원 목사님의 큰 아들 동인이와 중학생 동신이를 끌고 가서 구타를 하고 고문을 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풀어 주겠다고 회유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두 아들이 그럴 수 없다고 하자 끌고 가서 총으로 쏴 죽여 버렸습니다. 두 아들이 이렇게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손 목사님은 100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두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다음과 같이 열 가지 감사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 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합니다.
둘 째: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이런 귀한 보배 같은 아들들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셋 째: 삼남 삼녀 중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넷 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을 바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병들어 죽어도 복이라 하거늘 순교 당했으니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던 큰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갔으니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는 사랑 주셔 감사합니다.
여덟째: 두 아들을 순교시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겨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역경 중에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쁨 마음을 주셔 감사합니다.
열 째: 나에게 이런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것은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 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알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두 아들의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손 목사님은 딸 동희를 불러 앉혀 놓고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이 아무리 원수지만 그를 양아들로 삼아야겠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어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딸은 아버지의 옷을 붙들고 미친 사람처럼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아버지는 예수를 믿어도 어떻게 그렇게 별나게 믿느냐”고 통곡하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때 손 목사님은 딸을 달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에 분명히 원수를 용서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않니? 그러므로 용서만 가지고는 안 돼. 그 학생을 살려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내 아들로 삼으려 하는 것이니 아비의 뜻을 따라 주렴.” 그리하여 결국 그 사람은 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원수 사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것은 이상일 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아직도 여러분들의 생각 속에 원수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그것은 누구의 음성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이처럼 원수도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 힘으로는 원수 사랑이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바뀌게 되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질 때, 바로 우리들이 작은 예수가 될 때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수년 간 자기 부모 형제가 가스실에 끌려가서 시체가 되어 나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나치에 대해서 이를 갈며 증오했던 ‘엘리 바이젤’이라는 유태인이 석방되어서 책을 썼습니다.
“증오심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서나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고통을 당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기가 더욱 힘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내 마음이 점점 사막화가 되어 갑니다. 그 미움이 점점 내 영혼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주님처럼 완전히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빚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그 노력을 결코 쉬지 않으실 것이며, 계속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