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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3월 20일 목요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저승에 간 부자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생각 거리를 전합니다. 저승에서 고통을 받던 부자는 처음에는 자기 처지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달라며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초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자기 형제들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관심의 대상이 자신에서 형제들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형제들에게 죽은 사람이 살아서 가지 않으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부자가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동안, 그의 대문 앞에 가난한 라자로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부자가 가난하고 병든 라자로에게 마음을 썼더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라자로가 자기 주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6,24 참조).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위로를 받는 데 만족하였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위로받고, 더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겪는 고초는 하느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뉘우침의 다른 표현입니다. 살아 있는 형제들이 늦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한창현 모세 신부)
돈은 돈다고 해서 돈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 25-26)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사제로 지내면서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음식을 직접 만드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지만, 교우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음식 담은 그릇을 깨끗하게 설거지해서 드리는 걸로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끔 주류를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미사 때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면 생강차를 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세탁소 하시는 분은 언제든지 옷을 가져오면 드라이클리닝을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어쩌면 제게 딱 맞는 노래 같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과분한 사랑입니다. 사제를 위하는 마음은 한국 공동체가 각별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박해의 시간을 사제와 교우들이 함께 견디어냈습니다. 교우들은 사제들을 모시고 공소로 다녔고, 공소에서는 사제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사제가 다른 공소로 이동할 때면, 교우들이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눈물로 이별했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교우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던 사제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 맺고 있습니다.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습니다. 교황님은 관절이 나빠지셔서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폐렴이 있어서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5분의 교황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했던 요한 23세 교황님. 이스라엘을 방문하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했던 바오로 6세 교황님. 한국을 2번이나 방문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전통과 교리를 지키려고 하셨던 베네딕토 16세 교황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4분의 교황님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천상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서 저는 3가지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방명록입니다. 2014년 교황님은 124위 복자 시복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는데 아주 작은 글씨로 구석에다 적었습니다. 교황님의 겸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방입니다. 교황님의 가방은 30년은 넘어 보였습니다. 낡은 가방에서 교황님의 검소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입니다. 교황님은 본인이 타실 자동차를 ‘쏘울’로 정했습니다. 소형차를 선택하신 교황님에게서 소박함을 보았습니다. 교황님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것을 따르고,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벗이 바라는 때에 벗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19ㄱ.20)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23)
나
몸소
벗에게
나
아쉬운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눈길
벗에게
나
건네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발길
벗에게
나
가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내
손길
벗에게
나
내밀고픈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나
몸소
벗에게
나
아쉬운
때가 아니라
벗
애타게
바라는 때에
오늘의 성인
성 밥티스타 (Baptista)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만투아(Mantua)
활동연도 : +1516년
같은이름 : 밥띠스따
부친은 에스파냐계이고 모친은 이탈리아계인 밥티스타는 만투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혈통 때문에 ‘스파뉴올로’(에스파냐 사람)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많아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더니 커서는 철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페라의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험난한 완덕의 길에 도전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문학과 성서 등을 계속 연구하였는데, 그의 라틴어 문장과 시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인본주의 작품으로 손꼽혔다.
하느님은 그에게 상담자로서의 놀라운 능력을 주셨다.
그는 6번이나 개혁 카르멜회의 부총장으로 뽑혔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지녔으며, 마리아 공경을 전파하는데 지칠 줄을 몰랐다.
그는 로레토(Loreto)의 기적을 노래하였으며, 좋은 글을 통하여 이교도들의 마음을 회개에로 인도하였다.
그는 16세기 최고의 그리스도교 시인으로서 높은 공경을 받아왔다.
성녀 포시나 (Photina)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사마리아(Samaria)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포씨나 포티나 포띠나
성 세바스티아노 (Sebastian)
신분 : 장군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아나톨리오 (Anatoliu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요셉 (Joseph)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빅토르 (Victor)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포시오 (Photiu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포티스 (Photi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치리아카 (Cyriaca)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 시카르(Sychar)라는 지방의 야곱의 우물에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는데, 성녀 포티나(또는 포시나)가 바로 그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한다(요한 4장).
예수님을 만난 후 성녀 포티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3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카르타고(Carthago)에서 순교하였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포티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성 아나톨리우스(Anatolius), 성 포티우스(Photius), 성 포티스(Photis), 성 파라스케베(Parasceve), 성녀 키리아카(Cyriaca)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인 성 요셉(Josephus), 성 빅토르(Victor)와 함께 모두 네로 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또한 성녀 포티나는 세인들의 말에 의하면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요한 4,1-42)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2 ─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 ─ 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4 그때에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
5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성 요셉 빌체프스키(Joseph Bilczewski)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대주교
활동지역 : 리비프(Lviv)
활동연도 : 1860-1923년
같은이름 : 빌체브스키,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빌체프스키(Josephus Bilczewski)는 1860년 4월 26일 당시 크라쿠프(Krakow) 교구의 일부였고, 오늘날은 비엘스코 지비에츠(Bielsko Zywiec) 교구에 속한 켄티(Kety)의 빌라모비체(Wilamowice)에서 태어났다. 빌라모비체는 우크라이나(Ukraine) 북서부에서 폴란드 남동부에 걸친 갈리치아(Galicia) 지역에 속한 곳으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Austria)의 지배하에 있었고 오늘날에는 폴란드(Poland)의 영토에 속하는 곳이다. 그는 빌라모비체와 켄티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바도비체(Wadowice)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1880년에 학위를 받았다. 이어 크라쿠프 인근의 신학교에 들어가 1884년 7월 6일 크라쿠프 교구의 알비노 두나제프스키(Albino Dunajewski)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교(the University of Vienna)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로마(Roma)와 파리(Paris)에서 계속 수학하여 1890년 크라쿠프에 있는 야기엘로니아(Jagiellonia) 대학교의 교수 자격심사를 통과하였고, 다음해에 리비프의 요한 카시미르(Joannes Casimir) 대학교의 교의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학교의 학장이 되기에 앞서 신학대학의 학과장으로도 재임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학생들로부터 교수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으며 동료 교수들의 존경 또한 받았다. 그는 학문적인 연구에 전념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식한 사람이란 평판을 얻었다. 그의 지적이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비범한 능력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f I)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에게 공석으로 있던 리비프 대교구의 교구장 후보로 그를 추천했고,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1900년 12월 17일 라틴 전례 리비프 대교구의 대주교로서 40세의 요셉 빌체프스키 몬시뇰을 임명하였다.
그는 대교구장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복잡한 사회적 · 경제적 · 인종적 · 종교적 상황에 깊이 참여하며, 놀라운 도덕적 노력과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에서 얻은 활기찬 신앙으로 교구민을 돌보았다. 그는 또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한없는 사랑에서 솟아난 그의 풍요로운 선의와 이해심, 겸손과 경건함, 어려운 일에 기꺼이 투신하는 사목적 열정으로도 잘 알려졌다. 그의 대교구에 대한 사목적 계획은 성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증진시키고 잦은 영성체의 필요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그의 사목 활동에 있어서 특별한 모습은 대교구의 사제와 신자들에게 사목서한과 강론을 통해 호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당대의 신앙과 윤리적 문제를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절박한 문제인 사회 계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성체성사와 예수 성심에 대한 헌신을 설명하고, 가정과 학교 안에서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종교적 · 도덕적 성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거룩한 사제성소를 육성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사제를 신앙을 위한 시초이자 가장 중요한 교사로서,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부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보았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자리를 만드는 사제는 성사의 집전자이고, 그런 이유로 사제는 그리스도의 성체로서 하느님의 백성이 양육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성체성사를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사제들에게 성체조배를 권고하고, 사목서한을 통해 사제들에게 사제적 친교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였다. 지속적인 성체조배와 가난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원조회에 대한 참여는 사제들이 스스로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또한 어린이들의 교리준비와 미사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모든 교리교사들이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성체성사에로 인도하길 소망했다. 그는 많은 성당과 경당, 학교와 주간 보호소를 건축했고, 신자들이 교육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듯 그는 물질적 · 영성적으로 대교구에서 행해야 할 주요 사업들을 도와 그의 삶 전체가 기도와 사목과 자선사업으로 충만했다. 또한 교구 내에 현존하는 다양한 종교와 전례와 민족들의 측면을 존중하여 그의 재임기간 중에 종교적 · 민족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치와 조화와 평화의 옹호자였다.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항상 백성들과 가난한 이들 편에 섰다. 그는 사회생활의 기초는 정의여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람들이 증오와 타인에 대한 존중 결핍에 휩싸였을 때 그는 모든 종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관심을 두도록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그는 특별히 형제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가정과 젊은이들의 처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대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여 그 해결방법을 용감하게 제시하였다. 그가 교구장으로 있던 23년 동안 리비프 대교구의 모든 모습들이 변화되었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의 원대하고 거시적인 사목 활동을 끝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평화로이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의지에 순명하였다. 그는 참으로 거룩한 생각과 행동으로 일생을 살다가 1923년 3월 20일 그의 교구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거룩함을 알고 생활하도록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대로 참된 사제요 보호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유해는 리비프 대교구에서 가난한 이들의 묘지로 알려진 야누프(Yaniv)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리비프 대교구에 대한 그의 헌신과 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그의 시복시성 청원으로 표현되었다. 기적 심사를 통과한 그는 2001년 6월 26일 사목방문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리비프 대교구에서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마르티노 (Martin)
활동년도 : +579년
신분 : 주교
지역 : 브라가(Braga)
같은 이름 : 마르띠노, 마르띠누스, 마르티누스, 마틴, 말딩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기록에 의하면 성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당대의 최고 학자였고, 그리스도인 시인 포르투나투스는 그를 은혜를 수없이 입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원래 헝가리 판노니아(Pannonia) 지방 사람인데, 팔레스티나(Palestina)를 순례한 후에는 에스파냐의 갈리시아(Galicia)까지 갔다.
그는 여기서 국왕 테오도미르를 개종시켰다. 그 결과 수많은 다른 아리우스파(Arianism) 사람들과 배교자들을 로마 교회와 화해시켰다.
그의 선교 중심지는 두미오(Dumio)였다. 그는 '왕가의 주교'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자신의 생활은 지극히 엄격하여 은수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브라가 교구의 주교로서 죽을 때까지 교구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다. 선교사의 직무 외에도 그는 저술로도 교회에 기여하였으니, "올바른 생활양식들"이란 저서를 비롯하여 "거친 사람들의 교화에 대하여"라는 윤리 서적도 있다.ㅠ
성 쿠트베르토 (Cuthbert)
신분 : 주교, 수도승
활동지역 : 린디스판(Lindisfarne)
활동연도 : +687년
어떤 사람들은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또는 쿠트베르토)가 아일랜드계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코틀랜드계라고 하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잉글랜드 출신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얼마 동안 목동으로 살았고, 머시아(Mercia) 사람들과 싸웠던 경험도 있다.
성 쿠트베르투스는 영국 스코트랜드의 멜로즈(Melrose) 수도원에서 성 보스웰(Boswell, 7월 7일) 수도원장의 지도로 수도자가 된 후 성 에아타(Eata, 10월 26일)를 수행하여 리펀(Ripon) 수도원으로 갔다.
알크프리드(Alcfrid) 국왕이 리펀 수도원의 책임을 성 발프리두스(Walfridus, 10월 12일)에게 넘겨주자, 그는 다음 해에 멜로즈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661년에 멜로즈에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자신도 병에 걸릴 만큼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덕은 너무나 뛰어나서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였고, 수많은 기적도 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주로 선교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성 콜만누스(Colmannus, 2월 18일)가 로마 전례 거행을 결정한 휘트비(Whitby) 시노드의 결정을 거부하고 린디스판섬 수도자의 대부분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돌아갔을 때, 성 에아타가 그의 후임 주교로 임명되었고 성 쿠트베르투스는 린디스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멜로즈에서 린디스판 수도원으로 옮긴 그는 선교 활동을 재개했는데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 일은 그가 은수자로 생활할 허가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은수자로서 생활하던 성 쿠트베르투스는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새로 분할된 헥삼(Hexham) 교구의 주교로 선임되었다가 다시 헥삼 교구 대신 인연이 깊은 린디스판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2년 동안 자기 교구를 지도하다가 최후의 날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성탄절을 지낸 후 판(Farne) 섬에 있는 자신의 은둔소 방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687년 3월 20일에 선종하였다.
그리고 그날로 그의 유해는 린디스판 섬의 수도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러나 875년 바이킹의 침략을 우려해 수도자들이 그의 유해를 워킹턴(Workington), 휘턴(Whithorn), 체스털리스트리트(Chester-le-Street), 리펀 등으로 옮겼고, 최종적으로 더럼(Durham)으로 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종종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인 성 오스왈두스(Oswaldus,8월 5일)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메이서필드(Maserfield) 전투에서 사망한 왕의 머리를 후에 그가 다시 매장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복자 암브로시오 산세도니 (Ambrose Sansedoni)
활동년도 : 1220-1287년
신분 : 수도승, 설교가
지역 : 시에나(Siena)
같은 이름 : 암브로시우스, 앰브로스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사본 채식사(彩飾師)의 아들로 태어난 암브로시우스 산세도니(Ambrosius Sansedoni, 또는 암브로시오 산세도니)는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고 또 손과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났다. 어느 날 그의 유모가 도미니코회 수도원 성당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병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지나칠 정도였으며, 주일마다 병원을 그리고 금요일에는 감옥을 방문했다.
17세 때 그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미니코회 회원으로 입회하였으나 그를 미심쩍게 여긴 원장이 그를 프랑스 파리(Paris)로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파리와 독일 쾰른(Koln)에서 성 대 알베르투스(Albertus, 11월 15일)를 스승으로 또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를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위대한 스승과 뛰어난 친구의 도움으로 그는 높은 학덕을 얻었고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은둔생활을 갈망하여 장상의 허락을 얻었지만 설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결정에 따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중들은 설교하는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계시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청의 요청에 따라 성좌와 시에나의 정치적 알력을 해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복자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2월 16일) 교황이 서거함에 따라 자기 수도원으로 은신해 버렸다.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새벽 기도 후에는 2시간 동안 기도하였으며 나머지 시간은 공부하였다. 44년간의 수도생활에서 그는 매주 금요일에는 꼭 빵과 물로만 식사를 하였다. 그는 1287년 3월 20일 시에나에서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복자 히폴리토 갈란티니(Hippolytus Galantini)
활동년도 : 1565-1619년
신분 :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히뽈리또, 히뽈리뚜스, 히폴리또, 히폴리뚜스, 히폴리투스
히폴리투스 갈란티니(또는 히폴리토)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부유한 비단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장사를 배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열두 살 때에 메디치(Medici)의 주교이며 후일 교황 레오 11세(Leo XI)가 된 알렉산데르(Alexander) 대주교의 주목을 받게 되어 사제 수업을 받았으나 중병으로 인하여 그만두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식과 편태 그리고 밤새워 기도하면서 뛰어난 영적 식별력을 얻었고, 돈도 없고 책도 없이 재속회를 세우는데 성공하여 남녀 신자들에게 주요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가르쳤다. 그의 단체는 1602년에 회칙을 만들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재속회는 ‘그리스도교 교리회’였으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반체토니’이다.
그는 45세 때에 중병을 앓고 운명하였는데, 병중에 그는 천상 나라를 잠시 보았고, 자신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 친구하니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듯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1825년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