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호>
단풍잎 한 잎/ 이은봉
당신과 나,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숲속 졸참나무 가지 끝
잘 마른
검붉은 잎, 한 잎
가지 끝에 붙어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아슬아슬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단풍잎, 한 잎
당신과 나,
종종대며 보채지 않더라도
머잖아 땅에 떨어져
검붉은 흙이 되리
한 잎, 자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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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도 어머니처럼/ 이한성
장롱 속에 새 옷을 쟁여 놓던 어머니처럼
아내는 아들이 사 준 여름 신발 한 켤레를
거실에, 한 자리 내주고 눈으로만 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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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젯날- 사투리조(調)· 21/ 박기섭
파젯날 아직아래 떡이랑 찌짐붙이랑 제사 뒤끝 음식들을 목판에 담
아 이고 집집이 반기살이로 잰걸음을 치던 고샅
꼬까지 핀 도가지에 묵은 맛이 난다커늘 허물은 덮디라도 자랑은 노
나야지 땅찔레 연년이 뻗어 이 저승을 휘갑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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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에 놓인 가을/ 정현숙
창호를 스쳐가는 천 년 전 말굽 소리
전시실 유리관에 용봉무늬 칼자루가
북방의 사나운 바람 베고 또 베었다는
박물관 들어서는 가족들 발걸음과
시제 상 잔술 위에 말갛게 뜬 하늘은
국운이 흔들릴 때면 파사 탑을 꾹 눌렀다
골목집 빨랫줄에 늙은 부모 일복 두 벌
나직이 읊조리는 삼매에 든 귀뚜라미
돌 틈새 엉킨 무명초 저녁놀에 한창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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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로부터/ 박명숙
마침내 가장자리로 밀려난 장미꽃잎
가장자리는 파문의 둘레를 그려내지
향기가 밀려난 자리, 거기까지 장미야
장미꽃은 장미꽃, 중심부를 피워내렴
가벼운 깃을 대듯 덧문들을 달아야지
번지는 꽃자리마다 성채가 들어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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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감기/ 서성자
성급히 마음 앞서 만진 게 화근이었지
사람 손이 닿은 것은 거두지 않는다고
줄 하나 싹둑 자르듯 돌아서는 어미 고양이
생각하면 내 아픔은 온기를 남발하거나
죽지를 엉거주춤 편 채로 서 있을 때
며칠을 들락거리다 기침처럼 오곤 했지
피의 온도로 사는 너와 나는 더운 짐승
견디지 않아도 좋을 체온에 서로 기대
뿌리를 깊이 내리는 여름으로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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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 물을 씻다/ 한분옥
황토 시루에다 샘물을 길러 부어
그 물을 받아 내려 밥 짓고 국을 끓여
도저히 어린 소견에 이상하다 싶었다
푸른 들 일렁이면 허기도 출렁이고
씀바귀 고들빼기 입맛을 다시면서
흙으로 물 씻어 먹던 낙동강도 끝자락
물은 흙에 엎드리고 흙은 물을 어루만져
물길이 닿는 대로 불길은 붙은 대로
보리밥 보리흉년에도 아기들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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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에서/ 임채성
연대기는 남았는데
서사는 끝이 났다
드라마와 판타지가 넘나들던 흥행대작
배우들 사라진 무대 배경만 덩그렇다
웃음 눈물 퐁퐁 솟던 우물은 메워지고
포스터로 걸려 있는 빛바랜 사진 몇 장
필름은 복원이 안 돼 빗줄기가 내린다
재개봉을 기다리는
마당가 풀과 나무
때 되면 찾아와서 바치는 꽃다발 앞에
전편을 오마주 하듯 속편 다시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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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유선철
햇살은 지상의 것
내겐 외려 죽음이죠
사방이 검정이에요
온기도 하나 없는
무젖어
지낸 날들은
잉태의 시간이죠
해토를 기다리다
발목은 부었지만
우듬지 환하도록
더 깊이 숨어야죠
어둠이
꽃이라는 걸
알려줘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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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길/ 이준관
들길을 가면
내 옷이 저들이 옮겨 살 따뜻한 집으로 보였을까요
내 옷에 풀씨가 달라붙습니다.
서로 외롭지 않으려고
가을꽃들이 등을 맞대고
피어 있습니다.
이 가을에
누군가 잊지 않고 나에게 보내온
사랑의 엽서
잠자리.
나는
저 잠자리가 앉을
물빛 싸리 가지가 되겠습니다.
저 잠자리 날개를 밀어올리는
파아란 하늘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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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서영처
처음인 온갖 일들이 끝이 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하고
이 많은 이별이 빙판 같은 하늘에 박혀 있다 사수자리 아래서 화살을
맞는다 이정표처럼 서 있는 나목 위로 까마귀 떼가 날아와 검은빛을 점
화한다 구름 사이로 긴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하는 과거에서 오는 신호
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 많은 별은 오고 간 사람들의 이름 같고
당신이 부르던 성가가 네우마 기보로 또박또박 기록된 것 같고 긴 날의
당신을 수확해 구근처럼 묻었다 지구는 한 기의 푸른 봉분 수피처럼 하
늘을 향해 23.5° 머리를 기울이고 이 많은 생과 사를 동력으로 회전한
다 추운 숲에서 태어나 다른 하늘로 자리를 옮기는 좌표 어떤 신호 같
은 이명이 다시 들려온다 처음인 온갖 일들이 끝이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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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호>
미련/ 이진흥
새나 물고기 어둠 속 번갯불은 지나가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데, 지상에 잠깐 왔다 가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세상에 미련을 갖는지
요. 아무리 책을 쓰고 이름자를 새기며 깃발을 꽂아도 세월이 흘러 시
간의 지우개가 지나고 나면 모두가 그만 아닌가요. 아 그런데 참 이상
하지요. 이 세상 모든 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면서 왜 나는 오늘도 창가
에 서서 당신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밤하늘의 별을 헤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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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국수/ 공광규
광주 어느 아름다운 사업가가 마련한
고급 타운하우스 내 창현전시관 들러
송정역으로 왔다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며
옛 송정역 시장거리에 나가
잔치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앉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문 앞에 나가 비 구경을 했다
시장이 처음 들어선 1913년에도
슬펐지만 착한 이 거리에 비가 내렸겠구나
1945년에도
1950년에도
1980년에도
저 방앗간과 고향식당 앞에도
국밥집 앞에도
갑자기 비가 내려
비를 만난 사람들이 겅중겅중 뛰어다녔겠구나
옛날 국숫집 마당에 널어놓은
국숫발처럼 희고 긴 빗줄기가
착한 전라도 길거리와 지붕을 푹 적셨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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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눈물/ 최석균
1
풀잎에 모여앉은 물은
반짝반짝 넘치는 기쁨을 띄우다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풀잎을 춤추게 하면서 가볍게 가볍게 하면서
둥근 고요 속에 만물을 담아내다가
왔던 자리로 돌아간다
2
지상의 일로 열받아 천상에 운집한 물은
슬픔을 폭포처럼 쏟아붓는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날아올라
검은 날개를 펴면서 대기의 강으로 범람하면서
사랑이 아닌 일로 뜨거워진
인간사를 덮기도 하고 지우기도 한다
3
내게로 와서 머물다 가는 물은
무엇에 닿아 반짝이려고 몸을 날리는지
무거워지고 탁해져서
나는 또 어디에 닿아 부서지려고 몸을 부풀리나
4
천년을 몸부림치는 물을 만났다
티브이 화면 속에서
그물을 찢고 플라스틱 조각을 빼내기 위해
바다거북을 흔들며 울부짖고 있었다
바다거북의 눈을 마주하면
소금보다 짠 물의 눈물을 만날 수 있다
물의 열기가 하늘에 닿아
사랑이 아닌 일로 불타오르는
사람의 눈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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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 서정혜
사랑이 빠진 말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생각을 얼어붙게 하는
모진 말이 심장에
쇠꼬챙이 같은 고드름을 매달았다.
귀에 쟁쟁한
얼음 박힌 말들.
시간은 어느 것도 데려가지 않았다.
무슨 난로에 가슴을 녹여야 하나
내가 밉고 아득하다.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고드름 녹아 뚝뚝 떨어지고
마음에 굳은살 붙겠지 했지만
이 쇠꼬챙이 같은 고드름
무슨 사랑을 쬐야 녹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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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나요/ 강혜성
오늘 당신의 애인이 되어 드릴까요
빙산의 일각에 생긴 미세한 균열 사이로 아주 천천히 굴러떨어지는
한 방울의 진수를 받아 마실까요
당신이 원하면, 아니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되는 나는
발 아픈 당신이 늘 가고 싶어 하던 초원을 달려
자작나무숲에 산다는 흰 표범의 눈부신 이마에 입맞춤을 할까요
아니면 깊고 푸른 바닷속 캥거루를 닮은 수컷 해마의 눈물겨운 출산
에 경의를 표할까요
많이 담담해졌다는 건 물처럼 투명해지는 기분
점점 투명해져서 증기처럼 떠나는 이별법을 연습해볼까요
당신은 외줄을 타고 춤추기 시작한 광대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아야지만 훔칠 수 있는 눈물을 폐부 깊숙이 흘리며
더 이상 당신의 춤을 보고 싶지 않네요
그만 돌아서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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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귀엣말/ 이승은
막무가내 소문들에
한 귀를 내줬더니
갇힌 말이 시끄러워
한 열흘 어지럼증
나머지 귀도 벙벙해 나갈 길을 찾는 중
대책 없이 쉿, 이라며
너는 잠시 다녀가도
이미 불 댄 주전자는
알아서 물이 끓고
그렇게 삐삐거리며 수증기로 빠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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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엄/ 문무학
사람은 누구라도 만나면 헤어지고
삶의 이 저런 일 비지땀 청구한다
헤엄이 인생이었다
멈추면 곧
빠
지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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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비다/ 김소해
숲이 욱은 꽃길 끝에 허름한 화장장
붐비지는 않았지만 굴뚝 연기 붐빈다
소매 끝 적시는 울컥
물기 없이 붐빈다
*****
너머에서 왔어예/ 권애숙
줄기줄기 저를 포개 온몸을 꿈틀대는
어떤 뒤꼍 이름들은 벽 너머가 전부다
닫힌 창
다 흔들어놓고
터뜨리는 저물녘
그늘 건너 왔어예 사지 근육 키워가며
이 방향 만드는데 생의 전폭을 걸었어예
능소화 동물성 앞섶
허무 뚝
뚝
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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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탁/ 이분헌
식구들 내력 품은 오래된 식탁 하나
꽃들의 성찬이듯 화병을 올려놓고
어스름 반쯤 덮여오는 저녁을 건넌다
한 세대 떠나가고 말수도 줄어들고
허름한 실루엣 배경 같은 몸피에
고요가 밀물처럼 출렁, 들어와 앉는다
*******
눈사람/ 류미야
뫼비우스의 무한루프를 몸소 그려 보이며
영원히 되돌아올 사랑을 증명했네
새하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마술로
*****
그늘의 배후/ 최정희
그늘의 배후는 한낮의 초록이다
그늘 한 필 짜는 동안 봄을 다 탕진했다
남은 건
적막 가득한
오후의 열기뿐
햇살 냄새 오롯한 초록빛 어둠 속에
청량한 바람 한 점 그림자에 스며든다
태양이
뜨거워진다
그늘이 싱싱하다
매미의 울음소리 여름이 깊어간다
땀에 젖은 시간이 꽃으로 만개한다
그늘을
긁어모으자
소금이 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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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바다에 갈까요/ 김형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을 뿐인데
손가락 사이로 느닷없이
울음이 쏟아졌다
울고 싶은 생각 전혀 없었는데
어느 손금 사이 숨어 있던 풍경들인지
거리낌 없이 달려 나와 사정없이
굳은 몸을 흔들었다
새들도 눈물을 흘릴까요
언제, 무엇 때문에 울게 될까요
아니, 울음은 너무 무거워서
애초에 울음을 갖지 못했고
울음이 없는 몸이어야
하늘을 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새들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하늘을 바라볼까요
캔맥주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젖히면
늘 하늘 가득 날아가던
새들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바다에 갈까요
바다는 어쩌면 새들이 버린 눈물이 모인
거대한 항아리,
눈물로 이루어진 대륙이 아닐까요
얼굴을 덮은 손바닥,
손금 사이로 바다를 바라봅니다
쏜살같이 날아내려 눈물을 떨구고
아무 일 없던 듯 눈부시게 날아오르는
새 떼들을요
******
맺음말/ 이송희
인사말을 다 쓴 후에 노트북을 닫는다
파란 배경이 꺼지면서 사라진 지평선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의심이 몰려왔다
어떠한 형체도 없이 부서진 말들과
플라스틱 테 안에서 부패한 눈빛들
나무는 모양을 바꾸더니
특수문자로 남았다
탄소발자국을 따라가던 김씨가 실종된 후
비도 눈도 오지 않는 검고 흰 둘레에
또 다른 수식을 걸어
당신을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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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고비/ 김미정
삶은 늘 고비라고
사막도 고비라고
고비는 고비마다
이 고비만 넘겠다고
어느 날 마다하지 않고
고비고비 매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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