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전 성훈
며칠 전 지인들과 저녁 모임을 가졌다. 처음에는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가 되어 이런저런 말들이 조용하게 오고갔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누군가 화제를 집으로 돌리는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모임자리는 시장터처럼 왁자지껄하였다.
집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많다. 말 못할 가슴 아린 쓰라린 경험을 하거나 남몰래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야릇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는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과 맞물린 형태가 집이라는 물건으로 비쳐질 수 있어 집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이 있다. 결혼할 당시인 80년대는 부유한 집 자식을 제외하면, 스스로 벌어 결혼하고 몇 년 만에 집을 장만하는 게 가능했다. 결혼하면 서울 변두리에 단칸방 전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하거나, 서울에 방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부천이나 중동 같은 수도권 지역에서 출발하였다.
결혼할 즈음, 우리 집은 연대보증으로 풍지박산이었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집을 언제까지 비워주라는 ‘명도’ 결정문이 집으로 날아왔다. 집을 제 날짜에 비워주는 조건으로 받았던 ‘위로금’으로 고향 동네 부근에 전세방을 얻고 그 집에서 결혼하였다. 당시는 전세기간이 6개월이고 전세금 상한선이 없어 집주인 마음대로 집세를 올릴 수 있었다. 전세금을 올려주고 계약 기간을 한 번 연장한 후, 다른 집으로 이사하였다. 마침 직장에서 직원주택조합을 결성하고 회사가 소유한 부지에 아파트를 짓기로 하였다. 아내와 상의 끝에 부족한 금액은 처가에서 빌리기로 하고 직원 아파트를 신청하였다.
결혼 2년 만에 내 명의로 된 조그마한 아파트 한 채를 가졌다. 입주 첫 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이유가 뚜렷이 기억난다. 하나는 집 없는 설움을 극복했다는 성취감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다. 단독주택에서만 살다가 난생 처음 10층 아파트에서 잠을 청하였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자 천정이 빙글빙글 돌고 방바닥도 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며칠 동안 이런 증세가 계속되다가 차츰차츰 적응되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
아파트에 살며 몇 번 이사를 하면서 조금씩 평수를 늘려나갔다. 아이들이 커가며 본격적인 고민이 생겼다. 어머니와 우리 부부 그리고 중학생과 초등 고학년 남매를 두고 방 세 개인 아파트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몇 개월 고민 끝에 방이 네 개인 아파트로 이사 가기로 하였다. 이곳저곳 알아본 결과,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조금 더 보태면 살 수 있는 적당한 아파트를 찾았다.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창동 주공아파트였다.
1994년 당시 창동 주공아파트 구입한 돈이면 강남의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강남은 그저 한강의 남쪽일 뿐, 지금처럼 강북과 강남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삶의 주거지로 구별된 시기가 아니었다. 강북보통시와 강남특별시의 구분이 없었던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지금으로부터 약 24~25년 전 일이었다. 방 4개인 집으로 이사하여 기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았고 아이들도 무탈하게 잘 자랐다.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강남과 강북의 아파트 값이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기어가는 강북에 비하여 강남은 걸어가다가 슬슬 뛰어 달아났다. 그렇게 벌어진 간극은 도저히 그 차이를 메울 수 없게 되었다. 천정부지로 고가행진을 구가하는 강남의 땅과 아파트를 보면서 40대 초에 결정한 나의 판단과 요지경처럼 움직이는 집값의 용틀임에 한없이 원망하고 분노하였다.
젊은 시절 오랫동안 나를 무던히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돈’에 대한 욕망, 그리고 돈 없음의 원망과 분노도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게 내 곁에서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생활의 윤택함과 돈의 소중함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땅이나 아파트 값, 아파트 평수 그리고 어떤 자동차를 타는가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흰 머리카락이 머리 앞과 뒤, 좌우를 휘감고 있는 60대 중반, 세월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결혼 당시 옛 시절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웃음이 샘솟는다. 정말 꿈같은 소꿉장난을 하면서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던 추억 속의 젊은 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의 청춘기였다.
공자께서는 “육십이 이순(六十而耳順)”이라고 말씀하셨다. 육십을 넘긴 지 벌써 몇 년째다. 이순은 남의 말이 내 귀에 순하게 들리는 것만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이치를 깨달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자세와 태도가 몸에 익어간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내 한 몸 의탁할 공간이면 집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 표주박의 물 한 모금 마시고 소쿠리의 밥 한 덩이를 먹고, 팔을 베고 누워 하늘을 보며 ‘인생은 떠나가는 구름이라네.’라고 읊은 옛 선현 말씀이 생각난다. 세상을 관조하는 그 마음이 부럽고 부럽다. (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