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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다잉메시지
-황세연(추리소설가)
‘윤제 데리고 친정 가요. 생활비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마세요.’
밤늦게 집으로 들어서던 그는 현관 신발장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관리비 등의 체납 독촉장과 단전조치 경고장 위에 남겨져 있는 아내의 메모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내의 행동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자란 아내는 즐거움은 같이할 수는 있어도 고생은 같이 할 수 없는 여자였다.
점심때가 다 되어 눈을 뜬 그는 잠자리에 그대로 누워 오늘은 또 누구에게 돈을 빌릴까 머리를 굴렸다. 우선은 그 대상 선정이 문제였고 다음은 어떤 방법으로 빌려야하는지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돈을 빌릴 만한 친구나 선후배들에게는 이미 크고 작은 돈을 모두 빌렸다. 돈을 빌리고 갚지도 않는데 추가로 돈을 빌려줄 만큼 의리가 있는 친구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보면 마누라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등의 갖은 핑계를 대며 돈을 갚으라고 요구할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추락했을까, 그는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그가 대전에서 대학을 졸업한 것은 약 8년쯤 전이었다. 대학도 그렇고 학과도 별 인기 없는 학과였지만 그는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취직한 곳은 작은아버지가 경영하는 관광호텔이었다.
대전 변두리에서 농사를 짓던 작은아버지는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논밭이 갑자기 그린벨트에서 해제되는 바람에 졸부가 되었다. 돈을 펑펑 쓰며 빈둥거리던 작은아버지는 번듯한 명함이 아쉬웠는지 사업을 하겠다며 관광호텔 하나를 사들였다. 술집 아가씨들을 끼고 숙박시설을 드나들다보니 호텔이 돈이 되겠다 싶었거나 종업원들 위에서 신처럼 군림하는 호텔 사장이란 직함이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작은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유성의 관광호텔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다음해에 대리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 과장이 되었으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것도 호텔과 식당에서 쓰는 물품을 구입하는 총책임자인 구매부장 직책이었다. 그리고 직함이 부장이지 실제로는 사장이나 다름없었다. 사장인 작은아버지는 여전히 술집을 드나들며 계집질이나 할뿐 호텔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의 입을 통해 작은아버지에게 호텔경영에 대한 보고가 올라가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실세인 그에게 연줄을 대려 안간힘을 썼다. 거래처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네 회사 물품을 써달라고 돈을 싸들고 왔고 룸살롱에서 수백만 원어치 술을 사기도 했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룸살롱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 자주 구경을 시켰다. 물론 자신의 돈으로 술을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 거래처 사람들에게 술값을 내게 하거나 접대비 명목으로 회사의 법인 카드를 긁었다.
돈이 있으면 친구도 생기고 돈이 없으면 친구도 떠나간다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당시 친구나 후배들은 그가 그들을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중요한 약속까지 미루며 앞 다투어 달려오곤 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그에게 비극이 시작된 것은 약 2년 전이었다. 어느 날 그가 근무하는 호텔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일본관광객들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 사실은 곧 지방신문과 방송을 타고 순식간에 지역사회로 퍼져나갔다. 그 일로 호텔식당은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는데 식중독을 일으키게 한 음식재료를 공급한 업자 역시 그가 뇌물을 받아먹고 거래를 튼 사람이었다.
그에게 더 재수가 없었던 것은, 그 무렵 젊은 여자에게 빠져 막대한 돈을 탕진하고 난 작은아버지가 조금씩 정신을 차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식중독 사건으로 호텔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는지 원인규명에 나섰고 그를 시기하던 직원들의 밀고에 의해 그동안 그가 횡령하고 유용한 공금이 엄청나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호텔을 그만두게 된 그는 그동안 모은 돈과 아파트를 담보로 빚을 얻어 대전 변두리에 꽤 큰 규모의 식당을 차렸다. 그러나 식당은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인근의 다른 식당들은 장사가 잘 되는데 이상하게 그의 해물탕집만은 장사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는 곧 주식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주식도 그가 투자하는 곳마다 폭락해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적 치명타를 입었다.
그는 가진 돈도 없었고 번듯한 직장도 없었지만 그동안의 헤픈 씀씀이를 쉽게 줄이지 못했다. 차도 여전히 고급 승용차를 탔고 옷도 최고급을 입었으며 술도 최소한 단란주점에서 아가씨들을 끼고 마셨다. 그가 구매부장으로 있는 사이 몸에 밴 습관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울리는 친구들이 구매부장 시절 사귄, 대전에서는 그래도 꽤 나아간다는 그런 부류의 친구들뿐이어서 씀씀이를 줄이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친구들은 술을 먹으면 당연히 룸살롱에서 먹는 줄 알았고 서너 번 중 한두 번은 당연히 그가 돈을 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가 대전에서 청주로 이사를 한 것은 고가의 아파트를 남에게 넘기고 작은 전셋집을 얻어 나가는 사실이 창피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타지로 이사를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습관은 청주에서도 그대로였고 만나는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이다 보니 생활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의 경제사정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카드 빛까지 수천만 원으로 늘었고 자동차는 물론 살림살이까지 모조리 압류를 당했다. 이제 먹고 죽으려 해도 정말 농약 살 돈조차 남아있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돈이 없으니 친구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잘나갈 때의 반가운 친구가 아니라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거머리 같은 존재였다. 카드빚이 쌓이고 자동차와 가구들까지 압류를 당하자 그는 그 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구들과 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예전 같으면 술 한 잔 값도 되지 않을 푼돈까지 구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몰락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사실이 주변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더 두렵고 더 수치스러웠다. 이런 강박관념은 거의 병적이어서 거리에서 자신을 보고 웃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신의 유행이 지난 옷차림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았고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리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다.
‘저 새끼, 아주 폭삭 망했데. 이제 주머니에 단돈 몇 만원도 없데… 완전히 알거지가 된 거지. 눈꼴시게 어지간히 으스대더니 꼴좋다! 저 물에 빠진 생쥐 꼴 좀 봐! 푸하하하…’
토요일 저녁의 카페 안은 꽤 한산했다. 그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카페 앞에서 산 즉석복권을 꺼내 긁기 시작했다.
“제기랄!”
그의 인생처럼 또 꽝이었다.
은요일은 약속시간보다 1시간쯤 늦게 나타났다. 그가 문자를 하고 전화를 세 번이나 건 뒤였다.
“선배, 늦어서 미안! 이게 얼마만이야? 참 오랜 만이네요. 많이 기다렸죠?”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난처함이 있을 뿐.
“선배, 그래서 나중에 보자고 한 건데… 공사 끝난 기념으로 대낮부터 회식을 했는데 사람들이 쉽게 놔줘야 말이죠. 2차 가자는데 약속이 있다고 겨우 빠져나왔어요. 그런데 어쩐 일로…?”
은요일은 꽤 술에 취했는지 발음이 부정확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 모처럼 대전에 왔는데 네 생각이 나잖아.”
“우리 어디 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요?”
“차를 가져와서… 오늘은 그냥 커피나 한잔 마시자.”
그의 말에 은요일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아마도 다행이라는 표정이 아닌가 싶었다. 별로 반갑지도 않은 선배와 술을 마셔봤자 술맛이 있을 리 없었다.
“어때, 생활은 할만 해?”
후배에게 물었다.
“죽을 맛이죠 뭐. 겨우,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아요.”
그가 경제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그런데 후배 은요일은 마치 그런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선배는 좀 어때요? 하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젤 잘나가는 사람이니 당연히…”
은요일의 그 말에 그는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선배, 혹시 돈 좀 여유 있어요?”
“돈?”
“한 이천만 원… 이번에 전세금을 올려줘야 해서 말예요. 선배는 푼돈이겠지만 난 빌릴 곳이 마땅치 않네요.”
“그, 그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던가. 그는 녀석의 선제공격에 당했다는 생각을 하며 최근 사업을 확장하느라 자기도 남들에게 푼돈까지 빌려 쓰고 있다는 등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오늘은 그만 일어나죠? 오늘이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이거든…”
자리에 앉은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은요일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 그래… 그런데 너는 집이 어디냐?”
“고속터미널 쪽… 아, 잘됐다. 고속도로를 타려면 선배도 그쪽으로 가야죠? 방향이 같으니 나도 선배 차를 타고 가면 되겠다.”
그가 현금이 없다며 눈치를 보자 은요일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그런데 지갑 안에 수표가 꽤 많았다.
“무슨 수표가 그렇게 많아?”
“노가다판이잖아요. 업자들이 몇 푼 찔러줬어요. 술 한잔하라고… 그런데, 차 바꿨네?”
은요일이 그가 타고 온 차가 외제 스포츠카가 아닌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으응, 마누라 차야. 세컨드 카….”
차를 타고 가는 사이 그는 은요일에게 돈 빌려달라는 말을 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눈치를 봤다. 물론 은요일이 선수를 쳤으니 목돈을 빌려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며칠 전 모교의 화학과 조교로 있는 후배 홍성준에게 했던 것처럼 그럴 듯한 핑계를 대서 몇 십만 원 정도라도 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은요일은 그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말을 끊거나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급기야 잠에 빠져있었다.
연료게이지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조만간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어야할 터였다. 그런데 수중에 몇 천 원밖에 없었다. 정확히 7천 5백 50원이었다. 예전에는 수중에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던 적도 많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몇 백 원 단위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7천 5백 50원… 기름통에 남아있는 기름이 어느 정도 될 테니 7천 원 어치, 몇 리터의 기름만 더 넣어도 집까지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앞에 나타난 주유소 불빛을 보자 자신이 7천 원을 내미는 모습이 떠올라왔다. “얼마치 넣어 드릴까요?” 하고 종업원이 물으면 그가 “7천원 어치요” 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종업원은 귀를 의심하며 “7천원 어치요?” 하고 재차 물어볼 터였다. 그를 측은하게 바라볼 그 종업원에게 있어 분명 천원 단위로 기름을 넣어달라고 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50CC 오토바이도 아닌데….
그는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스쳐지나가는 주유소가 오늘 따라 더 화려해 보였다. 마치 화려했던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던 고급 나이트클럽의 불빛 같기만 했다.
수중의 7천 원을 꽤 오래 생각하고 있던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고 있는 은요일의 지갑이 스쳐지나갔다. 지갑 속에는 현금이나 마찬가지인 10만 원 권 수표가 꽤 많이 들어 있었고 또 신용카드도 꽤 여러 장 들어 있었다.
그는 차를 한적한 길가에 세우고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강력한 흡입마취제인 클로르포름 병을 만지작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돈과 수표와 아내의 얼굴, 아이의 얼굴…
그 클로르포름은 며칠 전에 만난 화학과 후배이자 조교로 있는 홍성준에게 오래 전부터 부탁해 겨우 구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슴목장을 시작했는데 사슴뿔 자를 때 꼭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인생이 코너에 몰리며 이미 오래 전부터 범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이 타던 것과 같은 차종의 빨간색 스포츠카 한 대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옆을 스쳐갔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그는 전에 주유소에서 받은 휴지를 몇 장 꺼내 겹친 뒤 갈색병에서 휴지가 축축해 질 때까지 클로르포름 액을 따랐다.
그는 은요일이 잠든 사이 녀석을 마취시키고 지갑을 훔칠 계획이었다. 정신을 잃은 은요일은 집 근처의 골목에 내려놓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요일은 술에 취해 잠든 것까지만 기억할 테니 나중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은요일은 자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필름이 끊겼다고 생각할 테고, 은요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그에게 물어오면 집 앞에 내려주고 갔다고 말하면 되었다. 그러면 은요일은 당연히 어디서 지갑을 흘렸거나 자신이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잠든 사이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생각할 터였다. 룸살롱에서 하룻저녁 술값으로 몇 백만 원을 쓰던 그가 후배의 돈 몇 푼을 훔치려고 미리 마취제까지 준비해왔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그는 클로르포름이 묻은 휴지를 은요일의 얼굴에 천천히 가져다댔다. 마늘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자극했다.
휴지가 은요일의 코끝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몰락했기로 돈 몇 푼 때문에 내가 후배에게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바로 그 순간, 마치 자는 척 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은요일이 눈을 번쩍 떴다. 당황한 그는 휴지를 쥔 손으로 은요일의 코와 입, 눈을 힘껏 눌렀다. 은요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손을 올려 그의 팔을 밀쳐내려 했다. 그럴수록 그는 휴지를 쥔 손으로 더 힘껏 은요일의 얼굴을 눌렀다. 곧 은요일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은요일이 정신을 잃었는데도 그는 휴지로 계속 은요일의 입과 코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클로르포름 냄새 때문인지 자신까지 정신이 혼미해져 오는 것 같았다. 한 손을 은요일의 얼굴에서 떼어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차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은요일의 얼굴을 누르고 있던 휴지를 뭉쳐서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은요일의 코트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축 늘어진 은요일을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기분 나쁜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좀 전에 은요일이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술에 취해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이라도 빌려달라고 할까봐 대화를 단절시키기 위해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랬다면 은요일은 마취에서 깨어난 뒤 모든 상황을 기억할 것이 분명했다. 후배의 돈 몇 푼을 훔치기 위해 계획적으로 마취제까지 준비해 그 복잡한 짓을 벌였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스쳐지나가는 자동차의 후미등 불빛이 마치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듯 쏘아보는 은요일의 눈빛 같이 여겨졌다. 그 경멸감이 담긴 눈빛… 불쌍한 거지를 바라보는 듯한 측은한 눈빛들… 그 끔찍한 눈빛을 봐야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아니, 죽이는 게 나았다. 잘나가던 그가 좀도둑질을 했다는 것이 알려져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살인이 나았다. 절도죄보다는 차라리 살인죄가 나았다.
“제기랄!”
그는 두 손을 은요일의 목에 가져다댔다. 팔딱팔딱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손아귀를 힘껏 조였다. 팔딱거리던 맥박은 그의 손바닥 안에서 금방 힘을 잃어갔다.
“이런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은요일을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얘들아, 글쎄 말이야, 술값도 안 되는 돈 몇 푼을 훔치기 위해 그 선배가 은요일을 목 졸라 죽였데.’ 하며 비웃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왔다.
그는 운전석에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 누군가 인도를 따라 걸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액셀을 밟았다.
정신없이 차를 몰아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산길이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난간 너머에 내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길가에 차를 세운 그는 급히 조수석에서 은요일의 시체를 내려 난간 너머로 내던졌다.
중앙선을 넘어 단번에 차를 돌린 그는 마치 귀신에게라도 쫒기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액셀을 밟았다.
‘그래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은요일을 중간에 내려줬고 은요일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변을 당한 거야. 오늘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경찰이 찾아오면 그렇게 말하면 끝나는 거야.’
그런데 곧바로 그의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클로르포름이었다. 사체를 부검해 클로르포름 성분이 검출되면 그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클로르포름이라는 약품은 흔한 것도 아니었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찰은 클로르포름을 그에게 넘겨준 화학과 조교 홍성준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 치명적인 진술을 확보할 게 틀림없었다.
“제기랄!”
그의 귓속에 돈 몇 푼을 훔치기 위해 아는 사람을 유인해 죽였다고 비웃는 사람들의 비웃음소리가 가득 차왔다. 푸하하하하…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칼이 부러졌다.
다시 찌르기 위해 홍성준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칼을 뽑아내려는 순간 홍성준이 몸을 뒤틀었고 그 바람에 칼날이 뚝 부러진 것이다.
그가 부러진 칼을 들고 당황하고 있는 사이 홍성준이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는 홍성준을 뒤쫓아 가 문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하지만 문은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녀석의 숨통을 확실히 끊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끝이었다.
그는 급히 집안을 둘러봤다. 현관에 놓여 있는 소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달려가서 소화기를 집어 들고 달려와 화장실 문손잡이를 힘껏 내려쳤다. 쿵쿵 소리만 요란할 뿐 화장실 문손잡이는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는 옆집, 아랫집, 윗집 사람들이 모두 뛰어나와 초인종을 눌러댈 것만 같았다.
그는 침착하기로 했다. 녀석은 화장실 안에 든 쥐였다. 도망갈 곳이 없었고 게다가 가슴에 칼날까지 박혀 있었다. 이곳이 비록 녀석의 자취집이긴 했지만 흐르는 시간이 결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휘둘러대던 소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집안을 살폈다.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다 화장실 문틈에 밀어 넣어 보았으나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문틈으로 칼이 들어가도 문을 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현관의 신발장으로 가서 문을 열어보았다. 안에 연장통이 있었다. 연장통 안에 노루발장도리가 보였다.
그는 장도리를 들고 화장실 앞으로 돌아왔다. 그때 화장실 안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겁을 먹고 똥이라도 쌌나?’
그는 장도리의 못 박는 부분으로 문손잡이를 내려치려다가 역시 요란한 소리가 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장도리의 망치 부분을 잡고 흔들어가며 반대쪽 못 뽑는 부분을 문틈으로 억지로 밀어 넣자 문틈이 벌어지며 장도리 끝이 조금씩 문틈을 파고들어갔다. 어느 순간 장도리 손잡이를 확 젖혔다. 그러자 화장실 문의 베니어합판 일부가 확 뜯겨 나왔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화장실 문의 잠기는 부분이 파손되어 문이 열렸다.
화장실 안의 광경은 끔찍했다. 화장실 바닥에 알파벳 카드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홍성준이 그 위에 엎어져 있었는데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타일을 타고 배수구로 흘러들고 있었다.
은요일은 피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며 오른손의 가죽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맨손 손가락을 홍성준의 목, 경동맥에 살며시 대보았다. 맥박이 없었다. 이미 죽었다.
‘그런데 웬 알파벳 카드지?’
그는 화장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종이로 된 알파벳 카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알파벳을 처음 배울 때 사용하는 그런 것이었다.
아까 홍성준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때 화장실 앞에 놓여 있던 뭔가를 발로 찬 것 같았는데 아마도 그게 알파벳카드들이 들어있던 어떤 통이었던 것 같았다. 조카나 누가 놀러왔다가 놓고 간 것 같기도 했다.
다시 가죽장갑을 끼며 화장실을 나오려고 하는 그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죽은 홍성준의 피 묻은 오른손 손바닥에 뭔가가 있었다.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놓았다. 그가 문을 부수는 틈에 녀석이 범인이 누구라고 쓴 종이쪽지를 손에 쥐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피 묻은 손에 붙어 있는 것을 집어 들어 살펴보니 찢어진 알파벳 카드의 일부였다. ‘O’나 ‘U’자 같은 곡선형 알파벳의 일부가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이걸 왜?’
뭔가 찜찜했다. 범인이 누군지 알리려는 다잉메시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그는 홍성준이 쥐고 있던 피 묻은 알파벳의 일부를 변기 속에 던져 넣은 뒤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물 내리는 버튼을 눌러 변기의 물을 내렸다. 그게 무엇이었든 이제 은요일이 남긴 다잉메시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내친 김에, 알파벳 카드들 중에서 ‘K’, ‘I’, ‘M’을 찾으려고 바닥의 알파벳 카드들을 살폈다. 하지만 ‘I’자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때 ‘A’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K’, ‘A’, ‘M’을 차례로 집어 합쳐서 죽은 홍성준의 손아귀에 쥐어놓았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함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자신이 왔다갔다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몰랐다. 머리카락이나 음모 같은 것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소기를 찾아 청소까지 했다. 그리고 청소기 먼지통의 먼지를 비닐봉지에 털어 넣은 뒤 묶어서 자신의 잠바주머니에 넣었다.
죽은 홍성준의 가슴에 박혀 있는 부러진 칼도 이 동네에 와서 산 것이니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물론 칼을 살 때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또 지금처럼 가죽장갑을 낀 채였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감기에 걸린 것처럼 콜록 기침을 해가며.
모자와 마스크, 신고 온 신발, 입고 있는 옷 등은 이 집에서 나간 뒤 벗어서 모두 처리할 터였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갈 때는 집에서 입고 나온 것들을 다시 착용할 계획이었다.
살인사건 신고를 받고 사건현장에 도착한 황은조 경감은 살해된 홍성준의 자취집 화장실 바닥에 널려있는 카드와 죽은 자가 손에 쥐고 있는 알파벳 카드를 유심히 살폈다. 손에는 ‘K’, ‘A’, ‘M’이라는 세 장의 카드가 쥐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여러 장의 알파벳 카드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카드의 앞면은 영어 알파벳이었고 뒷면에는 ‘에이’나 ‘비이’ 같은 한글 발음이 적혀 있었다.
뭐야? 범인이 ‘감’ 씨라는 이야긴가? 아니면 이니셜이어서 ‘강안문’, ‘문안강’, ‘안강문’ 같은 이름?
황은조 경감은 죽은 자가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게 범인을 알리기 위한 다잉메시지라면, 범인이 ‘감’씨이거나 이 알파벳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 텐데 범인은 왜 피해자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카드들을 그대로 두고 갔을까? 이렇게 화장실 문까지 부쉈으면서 말야?
범인이 문을 부순 이유는 피해자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고 재차 공격하지 않은 걸 보면 문을 부숴 열었을 때는 이미 피해자가 죽어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태로….
곧 도착한 과학수사팀 요원들이 화장실 변기의 물 내리는 버튼에서 죽은 홍성준의 피 묻은 지문을 검출했다. 칼에 찔린 홍성준이 화장실로 도망온 뒤 무슨 이유로 변기의 물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화장실 바닥에서 발견된 알파벳 카드는 한 장도 중복된 것이 없는 걸로 봐서 한 세트의 일부 같았다. 모두 17장이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손에 K, A, M이 쥐어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발견된 알파벳 카드들은 다음과 같았다.
L M C D T H I P V X Z A B S R K E J Q F
화장실에 흩어져 있는 알파벳 카드들을 이리저리 살피던 황은조 경감이 갑자기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알았다! 이 카드들은 역시 피해자가 죽어가며 범인을 알리기 위해 남겨놓은 다이메시지였어. 이제 피해자의 주변 인물, 용의자들의 이름만 살펴보면 범인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겠군!”
다음의 유력한 용의자들 중 범인은 누구일까?
1. 종수 (JONG SU)
2. 진송 (JIN SONG)
3. 범돌 (BOUM DOL)
4. 원영 (WON YOUNG)
답과 설명:
알파벳 카드 중에서 화장실에서 발견되지 않은 사라진 알파벳은 ‘G N O U W Y’이다. 이 알파벳을 조합해 만들 수 있는 이름은 4번 ‘원영 (WON YOUNG)’ 뿐이다.
피해자는 죽어가면서 범인이 누군지 알리기 위해, 하지만 화장실에 가장 먼저 들어올 범인이 그가 다잉메시지를 남겼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범인의 이름에 해당하는 알파벳들을 골라 찢어서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찢어진 알파벳 한 조각은 피 묻은 손에 달라붙어 변기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피해자의 손에 남아있었는데 그것을 범인이 발견해 다시 변기에 집어넣고 물을 내렸던 것.
첫댓글 <계간 미스터리> 2015년 겨울호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홍보용으로 올립니다..
와 재밌어요 !!^^
4번
은요일이 두 명인가요? 내용이 좀 이상하네요...범죄 피해자 은요일과 탐정 은요일..
있는 카드가지고만 생각했는데... 없어진 카드라. 재미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