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례원 좌통례 권공 묘갈명 병서〔通禮院左通禮權公墓碣銘 幷序〕
선대부(先大夫)께서 임오년(1582, 선조15) 진사시에 급제하셨는데, 당시 권두문(權斗文) 공이 시험을 감독하셨다.
20년이 지난 뒤 선대부께서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셨을 때, 전형(銓衡)을 맡은 장관도 임오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공을 학성관(學省官)으로 기용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가만히 창문으로 엿보았는데, 공은 연세가 많고 근후(謹厚)한 장자(長者)였다.
손님이 돌아간 뒤에 선대부께 공이 불우하게 된 정상(情狀)을 삼가 여쭙자, 선대부께서 위연(喟然)히 탄식하셨으니, 마음 아프게 생각하신 것이다.
그 뒤에 공이 조금 승진하여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으나, 마침 봉인(奉引)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 다쳤으므로 결국 병든 사정을 아뢰고 귀가하였다.
귀가한 지 13년 만인 정사년(1617, 광해군9)에 운명하였으니 향년 75세였다.
공의 자(字)는 경앙(景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대대로 관리를 배출하였으며, 장흥고 영(長興庫令) 휘(諱) 흠(欽), 휘 성손(誠孫), 휘 담(譚),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 휘 유년(有年)이 공의 4대 선조(先祖)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능과 학문으로 이름났으니,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앞을 양보하여 감히 나란히 하려고 하지 못했다.
임신년(1572, 선조5)에 선조(宣祖)께서 춘당대(春塘臺)에서 선비들을 시험하실 때, 공이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처음 교서관(校書館)에 소속되었다가 교검(校檢), 감찰(監察),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옮겼다.
병술년(1586)에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조정에 나온 관리들이 모두 내직(內職)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은 높은 벼슬로 통하기를 바라서이고, 당시 여론도 공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셨으므로 어른들을 봉양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뿐, 다른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체되어 돌아오자 또 고부 군수(古阜郡守)에 임명되었는데, 부모 곁을 떠나 벼슬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년(1592)에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나갔는데, 왜적(倭賊)이 팔도(八道)를 유린(蹂躪)하니, 문드러진 고기처럼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온전한 곳이 없었다.
공의 아들 주(𪐴)가 말하기를 “동촌(東村)도 군(郡)의 경내에 있는 지역인데, 지형이 깊고 험하니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의리상 꿩이나 토끼처럼 도망가는 것을 탐탁찮게 여겨서, 벼랑의 굴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웠다.
왜적이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순회하며 격문(檄文)을 돌렸는데, 요점은 식량을 마련하여 정성껏 자신들을 맞이하라는 내용이었다.
공이 적을 베어서 대중에게 보였는데, 왜적이 새벽에 굴을 압박해 들어와 맞서 싸우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왜적이 뛰어들어 공을 베려고 할 때, 아들 주와 첩 강씨(康氏)가 공을 감쌌기 때문에 공은 죽지 않았지만, 강씨는 벼랑에서 떨어져 운명하였다.
왜적이 고을 수령을 잡을 때는 반드시 생포하여 군상(軍賞)을 받으려고 했으므로, 마침내 공을 포박하여 끌고 갔다.
공이 오랫동안 잡혀 있으면서 적정(敵情)을 살펴 비밀리에 관군(官軍)에게 알리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호구일록(虎口日錄)》을 만들었다.
원주(原州)에 이르러 누각(樓閣)에 갇혔는데, 경비가 조금 소홀한 데다 마침 밤에 우레가 치고 비마저 쏟아져 칠흑(漆黑)같이 어두웠다.
이 틈을 이용하여 아들 주가 벽을 뚫은 다음 공을 업고 탈출하여 산골짜기로 달아나 남쪽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에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 공을 만났는데, 공에게 격문을 보내 일을 함께 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에 임명되었다.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환도(還都)한 뒤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으로 옮겼다.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임명되자 거둔 세금으로 떠돌이와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그 뒤에 연이어 진산(珍山)과 영천(永川)과 금산(錦山)의 군수에 임명되었는데, 그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을 수령으로 나가는 것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함인데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배나 채우려고 고을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전원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자손이나 가르치고, 향당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거문고를 타고 술이나 마시며 여생을 보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조정으로 들어가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으며,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나갔다가 돌아와 내자시 정(內資寺正)에 임명되었고, 좌통례(左通禮)로 승진한 뒤에 삶을 마쳤다.
공은 천부적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있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새벽에 일어나 방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여쭈었고, 물러나서는 동생들과 그 기쁨을 다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위로 먼 조상에게까지 미쳤으니, 종척(宗戚)들이 감화되었다.
본성을 따라 행동하여 약삭빠르거나 거짓됨이 없었고, 우아한 척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온종일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견지하여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도 바른 태도를 잃지 않았고, 변고에 처해서도 지조를 버리지 않았다.
처음 왜적에게 붙잡혔을 때, 저항하고 꾸짖으며 굽히지 않다가 자결(自決)하여 죽기로 마음먹었는데, 천행(天幸)으로 적의 칼날을 벗어나자 스스로 호랑이 입에서 살아나온 목숨이라고 여겨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접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에 공을 애석하게 여긴 사람이 말하기를 “공의 관직 서열과 품계가 이미 승진할 시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조금 더 머물러서 높은 벼슬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는 의리상 마땅히 떠나야 하는데, 어찌 영화를 탐하여 분에 넘치는 벼슬을 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웃의 아홉 노인과 모임을 만들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리는 삶을 즐겼으니, 그 풍류(風流)가 숭상할 만하였다.
공은 성품이 책을 좋아하여 집안에 도서(圖書)가 많았고, 손수 교정하고 주석하기를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생(後生)들을 이끌어 주어 당시에 알려진 사람이 많았다.
저서에 《남천유고(南川遺稿)》가 있다.
영천(榮川) 방현(方峴)의 감좌(坎坐) 등성이에 안장하고, 숙인(淑人) 박씨(淑人)를 합장하였다.
박씨는 우의정(右議政) 은(訔)의 후손이자 처사(處士) 해(海)의 딸인데, 점잖고 아름다운 데다가 법도가 있어 안팎으로 공경을 받았다.
두 아들 점(點)과 주(𪐴)는 모두 진사(進士)이고, 딸 하나는 학유(學諭) 이휘음(李徽音)에게 출가하였다.
주의 세 아들은 숙(塾), 후(垕), 기(墍)이고, 세 사위는 아무개 등이다.
학유의 두 아들 숭언(崇彦)과 상언(尙彦)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세 사위는 아무개 등이다.
후도 또한 진사인데, 공의 큰아들 점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그가 공의 문인(門人) 전(前) 승지(承旨)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서울로 달려와 내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공의 큰아들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니, 정의(情誼)로 볼 때 사양할 수 없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죽는 것은 내게 달려 있고 / 死在我
죽지 않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었으니 / 不死在賊
공이 산 것은 또한 다행한 일이며 / 公生亦得
관직에 나가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고 / 仕在人
관직에 나가지 않는 것은 내게 달려 있으니 / 不仕在我
공이 물러난 것은 적절한 일이었네 / 公退則可
전원보다 더 즐거운 곳 없으니 / 莫樂田園
좋은 곡식 있어 / 爰有嘉穀
은거하기에 알맞네 / 宜爾初服
집안 번창하고 / 溱溱家室
자손들 효성 지극하니 / 子孫多孝
대대로 보답 받으리라 / 惟以世報
< 고전원문 > 동주집 > 東州集 文集 卷九 > 墓碣銘 >
[주-D001] 권두문(權斗文) : 1543~1617.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이다. 《鶴沙集 卷9 左通禮南川權公行狀》
[주-D002] 권주(權𪐴) : 1576~1651.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지(子止), 호는 춘수당(春睡堂)이다. 《海左集 卷36 成均進士權公行狀》
[주-D003] 김륵(金玏) : 1540~1616.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栢巖集 附錄 有明朝鮮國嘉義大夫……栢巖金先生神道碑銘》
[주-D004] 박은(朴訔) : 1370~1422.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태종을 도운 공으로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고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 太宗朝相臣》
[주-D005] 이휘음(李徽音) : 1575~160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흡(汝翕)이다. 《丹谷集 卷5 成均館正字李公墓碣銘 幷序》
[주-D006] 이상언(李尙彦) : 1597~1671. 본관은 경주, 자는 용수(溶叟), 호는 성서(城西)이다.
[주-D007] 김응조(金應祖) : 1587~1667.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이다. 《鶴沙集 附錄 墓誌銘 幷序》
[주-D008] 은거(隱居) : 초복(初服)은 벼슬하기 전에 입던 옷이라는 의미로, 벼슬을 떠나 처음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 은거함을 비유한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물러가 다시 나의 초복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라고 하였다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