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30-2월 2일 7명이 한일100년평화시민네트워크 차원에서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일본 중에서도 방문하기 쉽지 않아 늘 다음 순서로 미루어 졌던 곳이었다.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미군기지 자연생태와 환경 시민교류를 염두에 둔 방문이었다. 일정별로 간략히 소개 한다.
1일째, 인천공항에서 2시간 40분 거리를 날아 나하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그동안 메일과 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았던 다카하시 도시오선생(후텐마기지 소송단 사무국장)과 한국에 인턴활동가로 잠시 머물렀던 아리이메 유우리님 등 일본 평화단체 회원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모두 반갑게 인사하고 따로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인사와 설명을 듣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1945년 3월 23일부터 함포사격과 폭격이 이루어졌고 4월 1일 미군이 상륙작전을 전개한지 3개월만에 함락되었지만 미군과 일본군 그리고 주민 조선인 등 모두 24만명이 넘게 전사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하에바루((南風原壕群)에 있는 오키나와 육군병원 20호 동굴이었다. 준비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나서 입구에서 유우리씨와 아니야선생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안전모와 손전등을 받아들고 들어가 보니 꽤 넓은 공간도 있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져 있었다. 약병과 현미경 폭탄파편도 전시되어 있었다. 오키나와 는 본토결전을 저지하기 위한 요새로 전환되면서 자연동굴을 이용해 은신처와 주둔지로 조성되었다. 동굴병원 옆에는 헌법9조 비와 평화의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개 넘어 하에바루 기념문화센터에는 작은 박물관이 설치 되어 있었고 외벽은 오키나와 전투를 묘사한 타일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아부치라 동굴은신처였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인데 아주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군의 폭격과 공격을 피해 은신했다고 한다. 기념 자료관도 안내소내에 마련되어 있었고 평화를 염원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대가 표현되어 있었다. 이동하는 곳곳에 오키나와 수호동물인 시샤(사자상)가 집 입구와 건물 지붕등 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어서 버스를 타고 이토만시 마부니 언덕의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였다.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에는 오키나와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었고 특히 오키나와 전쟁의 현장을 사진과 형상으로 만들어 잘 전시해 두고 있었다. 평화의 불과 식전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 추모비에는 240,734명(일본인 현내 149,130 현외 77,033 미군 14,009 영국 82 타이완 3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 대한민국 364 류큐 오키나와 역사 교과서 중에서 인용) 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한국인의 경우 추가명단이 계속 올라 온다고 한다. 1971년에 세워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따로 조성되어 있어 분단 현실을 실감하게 했다.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뒤로하고 소바집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인 선원회관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도모리항에 붙어 있는데 작은 호텔처럼 잘 세워져 있었다. 재일 동포인 유영자님과 노래 잘하는 도미야마 마사히로(豊見山 雅裕)상 다카하시 도시오 선생과 함께 숙소에서 간단한 술판을 펼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유영자님과 도미야마 마사히로님은 동숙하면서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2일째, 선원회관 식당이 공사로 휴업 중이라 어제 남은 음식과 편의점에서 구입한 반찬과 일본 라면등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마이크로 버스로 미군수상헬리콥터기지가 추진되고 있는 나고시의 헤노코 해안으로 향했다. 중간에 나고 시청과 의회 건물을 지나치는데 건물 중간벽에 네모 구멍이 많이 나 있는 것이 아주 특이했다. 바람이 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고 여러차례 건축관련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헤노코는 후텐마(普天問)기지 이전 예정지로 지정되었는데 1997년부터 주민들은 '생명을 지키는 회(헬리기지 건설저지협의회)'를 조직하여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다카하시 선생이 준 헤노코액션이라는 책자에 소개된 '해상헬리콥터기지건설반대, 평화와 나고시 민주주의를 구하는 협의회' 라는 명칭이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커다란 천막 속에 책자와 홍보자료도 있고 계단에 앉아 설명을 듣고 철책으로 가서 기지 설치 반대 구호와 그림을 그린 작은 현수막과 천들이 묶여 있었기에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 '이 곳은 류큐국의 토지이니 1주일내 떠나지 않으면 오키나와민이 철거할 것'이라고 재미난 경고(?)가 미군기지 예정지 콘크리트 기초담장에 붙어 있었다. 듀공이 살고 있는 헤노코 해변을 매립해 해상헬리콥터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을 주민들이 저지 하는 중이었고 주민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격려하는 박수를 보냈다.
히가시무라(東村) 해변 휴게소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서 다카에(高江) 헬리콥터기지 건설반대 현장으로 이동했다. 헬리콥터기지 도로변에 텐트를 치고 출입구를 막고 농성중인 상태였다. 나고대학의 박재덕교수도 잠시 방문해 주셔서 오랜만에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주민들은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었고 기꺼이 안내를 해 주었는데 출입구 입구를 막아선 텐트 앞에서 설명하는 동안 공중에서 미군 헬리콥터가 오가고 있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지나가던 미군을 태운 버스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지의 뜻으로 기념T쳐츠도 사고 인사를 나눈 후 츄라우미 해양EXPO수족관을 방문했다. 세계최대의 수족관이라고 하는데 바닷가에 붙어있고 특히 1,000m 심해어와 생물 연구에 권위가 있다고 한다. 커다라 수족관에는 상어와 대형 가오리를 비롯해 다양한 물고기들이 공생하고 있었다. 수족관 관람이 끝난 후 다시 도모리항으로 이동했다. 교통체증에 걸려 예정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 ‘평화를 만드는 류큐활동센터’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우로무 교회 전도소를 방문하였다. 니시요 이치히로 목사님과 유아원교사인 니시요 테루코 사모님과 유영자님이 와서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목사님 내외분은 도쿄에서 신학대학중 만나셨고 오키나와에는 40년간 사셨다고 한다. 오키나와 특유의 음식도 있고 처음 만난 분도 있기에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한일 양측이 돌아가며 노래도하고 아침이슬도 함께 불렀다. 늦게까지 이야기하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대화시간을 가졌다.
3일째, 아침에 일어나 기노완(宜野灣)시에 있는 후텐마 미군해병대기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가가즈(嘉數)공원 언덕에서는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청구(靑邱)의 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교토 등 일본 본토인들이 전투에서 희생추모탑도 있고 오키나와 최초의 격전지였던 만큼 토치카도 옛모습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는 후텐마기지를 내려다 보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망원경과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었다.
사카에 미술관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2004년 8월 13일 후텐마기지 소속의 미군 헬리콥터가 기지 주변에 있는 오키나와 국제대학 구내에 추락한 사건을 계기로 기지 이전요구가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었던 일에 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오키나와 지역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의 연설장면을 보고서 오키나와 지역정치 현황에 관해 조금 설명을 들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유영자선생의 따님이 도착해 함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사키마(佐喜眞) 미술관은 후텐마기지의 일부 땅을 돌려 받아 건축된 미술관인데 오키나와 전이라는 대형 그림이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 옥상에서 후텐마기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사키마 미치오(佐喜眞 道夫) 관장으로부터 전시관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미술관 잔디밭에 오키나와 고유의 자궁모양의 무덤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묘라고 한다. 집 근처에 묘를 세우는데 제주도와 비슷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감동적으로 느껴 졌다. 다시 다시 차를 타고 가데나 공군기지를 돌아보다가 ‘가데나길역’ 전망대를 찾았다. 사람들이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등 장비를 이용해 자유롭게 기지내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그리고 미군기지 부지에 붙어있는 작은 텃밭을 시민들에게 개방해 두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주민피해의 역사자료관이 있는 가네다길역 전망대 2층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자동차로 바닷가를 이동하면서 전쟁을 비롯한 역사현장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가데나 공군기지는 전세계 최대규모의 미군기지이며 베트남전에 출격했던 곳이기도 하다는 설명이었다. 승합차를 타고 요미탄(讀谷村) 찌비찌리동굴 집단 자결터를 방문했다. 오키나와 전투중에 일본군의 미군에 대한 악랄한 왜곡 선전과 강압에 의해 집단 자결을 강요받고 전원이 자살했던 곳이었다. 아직도 유골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입구에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했지만 입구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은 당시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었다. 반대로 자결을 피해 모두 살아난 경우도 있다고 설명해 주었는데 피난처에서 하와이에 산 적이 있는 일본인이 설득을 해서 모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아 1천명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무지와 편견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을 보는 것 같다. 이어서 한의 비를 방문했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조선민중상을 조각한 것인데 눈알이 없는 일본군인이 두손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건장한 조선인을 개머리판으로 치는 모습이었다. 경북영양군에 설치된 후 일제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임이 비문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다시 군전투기 격납고를 스쳐 지나볼 수 있었는데 제주 서귀포 지역에 설치된 격납고와 유사했다. 제주는 오키나와에 이어 일본 본토결전을 위한 준비가 진행중이었기에 비슷한 시설이 설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고야의 마쓰시로대본영을 방문했던 기억이 났다. 모두 일제가 패전함으로써 오키나와 같은 희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키나와는 전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 전체 20% 면적에 몰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영자 선생도 다른 일정을 위해 헤어졌다. 다카하시 선생이 우리를 슈리성에 내려주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슈리성은 류큐왕국의 왕궁으로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독립왕국 류큐가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지역)에 의해 점령당했다가 1879년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복속됨으로써 독립국가의 지위를 상실했다. 작은 성이었지만 왕궁을 중심으로 하는 류큐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슈리에성을 나와 모노레일로 고쿠사이도우리(國際通)로 이동했다. 오키나와의 번화가인데 오키나와 현청역에서 내려 거리 구경을 했다. 각종 기념품과 오키나와 특산품들이 즐비했다. 이자까야에서 함께 오키나와 소주 아와모리를 곁들인 저녁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4일째, 아침식사를 하면서 3일간의 평화기행에 관한 간단한 평가 시간을 가졌다. 이승무님은 따라다니는 입장이라 좋았고 일본인들이 친절하고 자상해서 좋았는데 일회용품이 너무 많아 조금 마음에 걸렸다고 하셨다. 홍선희 선생은 사카에 미술관은 초기 설정부터 훌륭했고 미술의 사회적역할이 인상적이라고 하셨다. 지영선님은 일본의 활동하는 모습에서 많이 배웠고 한국에서 오키나와 관련 활동 소개 및 강좌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정환님은 쉬는 셈치고 왔는데 일정은 빡빡했지만 준비된 일본 단체 활동가들이 훌륭했고 자유시간이 부족함을 아쉬워 하셨다. 박충수님은 집단자살에 충격을 받았지만 모두 살아난 사례도 인상적이었고 일본인에 대해 용서해야지 하는 차원을 넘어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예현님은 오키나와의 역사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고 유영자님의 어머니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고 하셨다. 고쿠사이도오리에서는 수십년간의 시차를 느끼면서 조금 어지러웠다고 하셨다. 공통적으로 일본의 시민단체가 환영해 주고 활동가들이 직접 안내해 준 것에 모두 감동했다고 했다. 3일간 함께 해준 도미야마 마사히로, 다카하시 토시오, 유영자 3인조 팀웤이 훌륭했다는데도 모두 공감했다. 아니야상은 오키나와의 평화가이드로 오키모토상은 통역을 잘 수행해 주셨다. 그리고 교류회 통역은 수족관 안내를 해주신 오오무라상(오키나와학교 사무노조 집행위원장)이 수고해 주셨다.
모노레일역에서 직접 승차권을 발권해 나하공항으로 향했다. 위치가 높아 올 때 제대로 보이지 않던 나하항과 나하공항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위대가 함께 사용하는 탓에 일장기가 걸린 군용비행기가 보였다. 공항에 도착해 국내선 터미널에서 쇼핑시간을 가진 후 국제여객 터미널에 도착해 탑승하면서 작별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