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
서정시의 대명사, 시인 박재삼(13)
박재삼은 1979년 5월 소설가 오영수(吳永壽. 1914. 2. 11-1979. 5. 15)가 타계한 것을 신문기사를 통해 알았다. 박재삼에게 오영수는 옛 직장 ‘현대문학’의 상사(편집장)였으므로 울산 본가까지 가야 했으나 서울 도봉구의 쌍문동 빈소로밖에 가볼 수가 없었다.
필자도 오영수 소설가가 현대문학사 편집장으로 있을 때 도봉산 가는 길목 어디쯤 야산 밑에 있었던 그의 댁에 가본 일이 있었다. 박재삼이 그 곳을 쌍문동이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필자가 간 그 집도 쌍문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대학 4학년일 때 갓 문단에 등단하여 친구 따라 오영수 소설가댁을 찾았는데 그 뒷등성이에는 연산군의 무덤이 있었고 무덤 곁에는 5백년 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은행나무의 아랫부분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택시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곳을 다녀와 필자는 <연산의 능에서>라는 시를 쓰고 대학 문학의 밤에서 낭송한 바 있다.
박재삼이 찾아간 쌍문동 빈소는 전에 서울 살 때 오영수가 쓰던 방이었다. 그 방에서 박재삼은 현대문학사에서 조연현 주간과 오영수 편집장 밑에서 일하던 갖가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잠시 회고에 젖어 있었다. 박재삼이 처음에 오영수를 만났던 것은 1952년 부산 피난 수도 시절이었다. ‘새벗’에 오영수의 소설 <코스모스와 소년>이 발표되었는데 순전히 그 작품이 좋아 수정동에 있었던 오영수의 집을 방문했었다. 그 때 동생되는 오양근이 와 있었는데 군에서 무슨 일인가로 집에 와 쉬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었다.
박재삼이 오영수로부터 받은 인상은 정이 많은 듯했고 그 만큼 시골 사람에 가까운 분으로 느껴졌었다. 그 때 인상은 오영수를 현대문학사에서 상사로 곁에 있을 때나 또 만년에 시골로 갔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현대문학사에 근무할 때 오영수는 수많은 시인, 소설가를 만났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를 분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가령 현대문학사로 누가 찾아오면, 찾아온 사람은 오랜만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면 오영수도 반가운 듯이 대한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박재삼이 변소를 가면 오영수는 변소에 따라 들어와서야 박재삼에게 실토하는 것이었다. “박군, 금시 그 사람 누고?” 여태 모르고 아는 체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아무개 아닙니까” 하면 그때서야 “참, 그렇재?”하고 새로 사(社) 안에 들어가 아는 체를 하는 것이었다.
박재삼은 오영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간혹 술자리가 벌어지곤 하면 오선생은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분은 만도린을 꺼내어 ‘목포의 눈물’을 뜯고, 일본 노래 ‘유노마치 엘리지’를 켰지요. 그래서 그 분에겐 흔한 말로 무드가 있었지요.”
현대문학사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고를 들고 현대문학사에 들른 황순원, 허윤석이 오영수를 무슨 일로 놀려대었다. 그 때 오영수는 “말로야 당할 수 있어야제” 했는데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날씨도 풀리고 했으니 창경원에 가야 그대들을 만날 수 있겠네.”하고 황, 허 두 작가를 몰아부쳤다. 무슨 말이냐 하면 황, 허 두 작가는 동물의 물형(物形)으로 치면 재주가 많은 원숭이상을 띈 데서 한 말이었다. 그래서 한바탕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영수는 한 번 박재삼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군은 아마 연애를 못할 걸로 알아” 했다. 박재삼은 처음에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박재삼은 그 다음의 주를 달아서 비로소 알아차렸다. “내가 이런 말을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그 생각 갖고 있으면 평생 연애 한번 못하네”하는 것이었다.
한 직장에서 10년을 함께 지냈으니까 오영수도 박재삼의 성정을 알 만큼은 안 것이었다. 박재삼은 오영수가 만년에 문학사상에 <特質考>를 써서 문단에 파문을 일으킨 것에 대해 못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단정한 성격의 소유자인 오영수가 그런 작품을 썼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