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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침구인한약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경동기백
한국인 중의사가 본 한의학의 문제
출처 ; 디시인사이드 한의학갤러리 글쓴이 : 무당 2016-5-17 18:01:01
양방내과만 열심히 가르치는 한방내과
언젠가 모 한의과대학 부속 한방병원장으로 있으면서 내과주임을 겸하는 한의대 교수와 몇 시간 동안 함께 여행
을 하게 되었다. 여행 중에 한의학 이야기가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교수 말이 한방내과에서는 중국
교재로 수업을 하는데 별로 가르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양방내과를 의대보다 더 자세히, 깊이 있
게 가르치노라 하였다. 참으로 의아했지만 여행 중이라 더 깊은
이야기를 물어보기도 뭣해서 그냥 넘겨버렸다.
하지만 한방내과에서 가르칠 게 별로 없다니. 솔직히 내가 중국 유학 때 어떤 수업을 받았는지 얘기해주고 싶었
다.
한의대나 일반 의대나 의사를 양성하여 배출하는 곳이고, 의사란 기본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본령이다. 그리
고 양방이나 한방이나 모두 내과가 꽃이다. 전에 배운 모든 이론을 총동원하여 실제로 병을 어떻게 치료하는가를
배우는 가장 핵심되는 과목이 내과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방내과가 시간도 가장 많이 배정되고 임상시간도 가
장 많다. 기본적으로 50여 종류의 병을 배우는데, 한 교수가 전체를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분야별로 풍부한 임상
경험을 지닌 교수들이 각기 나누어 강의와 임상을 한다. 이 과목을 통해 의사는 환자를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진
찰하고 어떻게 판단하여 어떻게 처방하고 어떻게 치료하는지를 총체적으로 배운다. 각 교수들은 교과서를 중심
으로 하되 자신의 평생에 걸친 임상경험을 전수하여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을 해준다.
학생들은 그동안의 이론수업과 임상실습으로 이미 얻은 지식을 이 시간에 종합하여 토론하고 답변하면서 교정도
받고 새로운 시각도 배운다. 그러면서 졸업하여 바로 환자를 치료하더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기본을 닦아가는 것
이다. 또한 실습시간에는 학생들을 적당한 조로 나누어 외래진료를 하는 교수들에게 배당해서 실제 진료에 참여
시킨다. 학생들은 교수들의 진료 모습을 보며 기록했다가 집에서는 그날 본 모든 환자에 대해 자기가 직접 그 환
자를 보았다면 어떤 이유로 어떻게 판단하여 어떤 치료법으로 어떻게 처방하여 치료할 것인지 정리한 차트를 작
성하여 다음 시간에 제출한다. 그러면 교수가 그 차트를 보고 학생과 토론하고 지도하고, 차트가 형편없으면 질책
도 한다. 실제 진료차트와 다를 바 없는 완벽한 차트가 실습점수를 매기는 기준이 된다. 강의나 실습에서나 한 분
야라도 낙제하면 통과할 수 없고, 한방내과가 워낙 배정시간이 많은 과목이라 여기서 낙제하면 1년을 다시 다닐
수밖에 없다.
한방내과 시험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에서 치러진다. 시험문제는 모두 환자의 증세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처방
을 찾아가는 것이다. 임상 각 과목의 시험이 모두 이런 식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의사로서의 자신감과 기본
소양을 갖춘다. 따라서 중국에서 중의대를 졸업하면 어느 의사가 보든 같은 환자에 대해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동일한 진단과 처방이 나오게 된다. 그만큼 완벽한 이론체계와 임상체계를 갖춘 엄정한 학문이 중의학
이다. 실제 나는 본과 5학년을 졸업할 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세상의 모든 병을 고칠 것 같은 자신감
으로 충만했다.
양방과목 역시 완전한 기초이론에서부터 임상 각과에 이르기까지 해당하는 전문 양방 교수들이 일반 의대와 똑같
은 커리큘럼과 교육방법으로 동일한 수업을 실시했다. 나는 수술복을 입고 수술에도
참여해봤다.
한의과대학의 엉터리 교재
함께 여행했던 그 한의대 교수의 말을 이해하게 된 건, 훗날 한의대생들과 이야기해보고 한의대에서 쓰는 교재를
직접 본 다음이다.
한의과대학의 임상내과 통일교재. 그걸 보고 난 다음의 절망감은 참으로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몇
번이고 한의과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정말 교재가 맞느냐고. 그러니 다들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맞는
데 왜 그러느냐는
표정이다.
전국한의과대학 통일교재의 주된 내용이 서양의학 임상내과이다. 편제도 전부 서양의학 임상내과 편제를
따르고 있다. 서양의학 임상에 의한 질병별로 분류하고 마지막에 한의학의 몇가지 방제를 첨부해놓았다.
이건 동양의학이 아니다. 동양의학의 탈을 쓴 서양의학이다.
중국에서는 양방의과 대학에서도 한의학을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동양의학이
아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병을 보는 패러다임이 전혀 다르다. 서양의학의 패러다임에 따라서 유사한 처방
몇 가지 배운다고 한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학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동양의학에서도 임상내과는 의학의 꽃이다. 모든 이론을 총집결해서 결국 실제
임상에서 어떻게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지를 배우는 핵심 과목이다. 의학에서 내과가 제대로 안 되면 다른 임
상과목도 될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한의사를 배출해낼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참으로 답
답하다.
중국에서는 양방임상내과와 한방임상내과 교재가 따로 있고, 강의도 양방임상내과는 양방의 전문임상의사들이
한방임상내과는 한방전문임상의사들이 강의한다.
한방임상내과에서는 동양의학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분류한 50여 가지 병을 배운다. 이 50여 가지 병도 한 사람이
강의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열 사람 이상이 나누어 맡아 자신이 임상에서 전문적으로 보는 병을 중심으로 강의
한다. 그래서 정말 열띤 강의가 이루어지고 치열한 토론도 벌어지며 교수의 임상사례도 검토하고 실제로 실습을
통해 각각의 병들을 익히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해당 질병의 환자를 모셔놓고 강의하고 토론하기도 한다. 그 이
전까지 배운 기초가 부실하면 이러한 강의를 소화하며 쫓아갈 수가 없다. 동양의학 패러다임에 따라 분류된 각각
의 병의 정의, 동양의학적인 생리·병리의 원인과 병의 기제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비슷한 병과 어떻게 감별할
것이며, 동양의학적인 확진은 어떻게 할 것이며, 각각의 원인에 따라 어떤 처방이 좋은지, 각각의 처방에서 각각
의 약재는 어떻게 해야 하며, 교재에 나온 것과는 다른 실제 임상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등, 그동안 배운 모
든 이론과 방제학, 약학 등이 총동원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각각의 교수들이 평생 동안 이론과 임상을 통해 얻은
독특한 깨달음이 전수된다. 약재 하나도 임상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 처방의 양
에 따라 성질이 이러저러하게 변한다는 것 등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수많은 내용들이 전수된다.
예컨대 설사라는 병을 어떻게 강의하는지 보자. 앞에서도 말했지만 동양의학에서도 설사는 여러 가지 병의 부차
적 증상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자체로 병이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강의에서는 이런 경우를 모아서 하
나의 병명으로 처리하여 논의된다.
우선 동양의학에서 설사라는 병의 정의가 논의된다. 역사적인 근원으로 올라가 대부분 『황제내경』으로 시작하
여 현재까지 유력한 내용을 담은 이론과 임상 서적의 내용이 소개되면서 설사의 정의가
내려진다.
그 다음에는 이 병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과 기제가 동양의학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논의된다. 동양의학 패러다임
에 의한 생리·병리 이론들이 모두 종합적으로 논의되어 결론이 도출된다. 동양의학에서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
건 비위가 설사의 관건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다시 구체적으로 실제 임상으로 들어간다. 비위의 기능실조를 일으켜 설사를 발생시키는 원인을 찾는 것이다. 외
부의 사기가 들어와 일으키는 설사가 있고(이것은 외부의 사기가 한사냐 열사냐에 따라 다시 나뉘어 고찰된다),
음식을 잘못 먹어 생기는 설사, 감정의 이상으로 생기는 설사, 비위기능이 원래 약해 자주 생기는 설사, 신장의 양
기가 허약해서 생기는 설사가 있다. 그리고 비장이 약해 몸에 습이 생기는 것이 총체적인 병기(病機)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리고 설사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게 취급해야 할 비슷한 병에는 무엇이 있고,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구별할지
를 논한다. 예를 들면 이질 같은 병이다.
이렇게 설사를 논한 후, 원인에 따른 치료가 구체적으로 논해진다. 외부의 사기가 들어온 경우에도 한습한 사기인
가 열습한 사기인가에 따라 치료가 달라지고, 음식을 잘못 먹어 체해서 생긴 설사와 감정의 문란으로 생긴 설사는
각각 어떻게 치료하는지, 비위가 근원적으로 약하여 생기는 설사는 어떻게 치료하는지, 이른바 오경설사라고 하
는 신장의 양기가 허약해서 생기는 설사는 어떻게 치료하는지 등. 각기 치료를 논하면서도 구체적인 증세는 어떻
고 그런 증세는 동양의학적으로 어떠한 생리·병리상의 이유로 생기는지를 논하며, 그럴 경우 치료원칙은 어떻고
대표적인 처방으로는 어떤 것이 있으며, 각기 처방에 있어서 각각의 약재들은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논한다.
마지막으로 총결론을 내면서 설사라는 병을 임상에서 다룰 때 유념해야 할 총체적인 이론과 주의점, 치료원칙 등
을 논하게 된다. 그리고 참고문헌과 문장들을
소개한다.
이상과 같은 체제로 된 것이 중국의 임상내과 교재이다. 이런 내용은 서양의학 편제에 따른 서양의학의 병명으로
는 다룰 수 없다. 즉 통일교재로는 이런 내용을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설사를 동양의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치료해야 하는지 개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통일교재로 공부한 한의대생은 병을 서양의학적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진정한 한의사는 동양의학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병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능력을 갖춘 한의사다. 동양의학은 진단
부터 처방까지 동양의학 패러다임에 의하여 일관되게 이루어져야만 효과가 있다. 한국 한의대의 교재로 배우다간
한의사의 탈을 쓴 양의사밖에 될 수 없다. 이론적 패러다임과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개념은 양의사인데 처방
만 한약으로 할 뿐이다. 그
처방이란 것도 단순히 암기한 것만 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교류이고 동양의학의 과학화라고 한다면 정말 교각살우(矯角殺牛)다. 그런 것이
과학화인가. 의학은 우리 몸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나는 생명의 창조와 죽음을 다루는 학문이다. 여기에 과
학화라는 이름의 단순 반복이 끼어들 자리가 있는가.
서양의학에서는 이론으로 밝혀지지 않은 병은 치료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방임상내과 교재는 새로운 이론이 나올
때마다 나날이 두꺼워진다. 그러나 동양의학은 병을 고치는 방식이 다르다. 50여 가지 병을 배우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병을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치료하는 원리와 사고방식을 배운다. 이 세상에는 병명이 없는 병이 수도 없
이 많다. 이를 동양의학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원인을 찾고 치료해가는 변증이라는 사고방식을 익히는 것이 임상
과목들의 더없이 중요한 요체다. 양방 교재의 편제에 따르고 처방 몇 가지를 더한 것으로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생
길 수가 없다.
김용옥이 『황제내경』이 사변적이며 횡설수설하는 소리라는 둥 역사적으로 병명이 어쩌고저쩌고 변해왔다는 둥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 사람이 동양의학을 모른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서양의학 교재로 동양의학을 배웠
으니 병을 서양의학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서양의학적인 병명과 동양의학적인 병명이 일치하더라도 구체적인
병의 정의로 들어가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동양의학의 병
명과 서양의학의 병명이 같다고 두 병이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배웠으니 김용옥도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답답하다. 천재라 일컬어지는 동양철학자도 한국에서 한의학을 엉터리로 배우고는 엉터리 소리를 떠들어서
나 같은 어리석고 둔한 인간에게도 힐책을 받다니.
한의사가 양방임상내과를 가르치다
게다가 한국 한의대에선 양방임상내과를 한방임상내과 교수가 함께 가르친다고 한다. 한의학 교수들은 의학을 독
학해서 가르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임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임상과목을 가르친다면 공론밖에 되지
않는다. 임상과목은 반드시 임상을 해본 사람들이 가르쳐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도대체 평생 양방 처
방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임상과목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중국에서는 중의사들이
양방 처방까지 한다. 그렇지만 양방임상과목들은 전부 양방전문의들이 가르친다. 강의란 책 읽는 게 아니고, 더군
다나 임상과목은 강의가 전부가 아니다. 물론 내가 공부한 베이징중의약대학은 엄청나게 큰 종합병원을 세 개나
갖고 있어 풍부한 교수진이라는 조건을 갖추었지만, 우리나라 한의대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양방 교수들
의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안 되는 건 치졸한 감정대립 탓이다. 학문을 하는데 감정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분야를
막론하고 이른바 집단이기주의가 극도로 팽배해 있는 것 같은데, 의료 분야에서의 감정대립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서양의학이면 어떻고 동양의학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환자다. 의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진정으로 환
자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린다. 한방임상과목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양방임상과목도 임상경
험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런데 평생 처방 한번 해본 적 없고 양의사 자격증도 없는 한의사들이 왜 양방임상과목
을 가르치는가?
중국에서는 양방임상내과도 한 교수가 가르치지 않는다. 중국에는 양한방 모두 전문의 제도가 없지만 자기가 전
문적으로 보는 분야가 있어 주로 그 분야를 강의한다. 어느 날 양방내과 수업 때 강의를 맡은 여교수가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우리 병원에 농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 사람이 들어와 있습니다. 옆의 교수가 이 환자를 담당하여 응급조
치를 하고 있는데 처방하는 약의 양을 보니 예후가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문화혁명 시기 의대를 졸업하자
마자 농촌에 배정받아 상당 기간 농촌에서 생활했는데, 그때 농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 사람들을 적지 않게 치료
했습니다. 그런데 의학 교재에 기재된 처방약의 법정 허용치로는 그들을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법정 허용
치의 서너 배 용량을 처방해야 살아납니다. 나는 농약 한 병 이상을 먹고 온 사람도 살려내곤 했습니다. 오늘 들어
온 환자는 4분의 1병 정도 마셨는데, 옆의 의사를 보니 법정 허용치 내에서 약을 처방하고 있더군요. 아마 예후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담담하고도 자신 있는 어조였다. 그리고 다음 강의시간에 들어오더니 그 사람은 결국
죽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의사가 될 학생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나도 이때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
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 환자가 바로 옆의 이 여의사를 만났다면 살아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부터 시
작해서 왜 이 여의사는 옆의 의사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었을까, 그리고 이 여의사라면 과연 법정 허용치 이상의
용량을 처방해주었을까 등이 궁금했다. 내가 유학을 할 당시 중국에는 양방을 중심으로 의료분쟁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그것도 유학생 입장에서 그 여의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왈가
왈부할 수는 없고, 중요한 건 임상과목 강의에서는 그렇게 교수의
임상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이다.
임상과목에서 교수들의 임상경험은 교과서 이외의 것까지 전수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수
들은 중국처럼 배워본 적도 없고 임상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중국 교재를 봐도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이 나오
는 것이다. 그러니 죽어라고 양방내과만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이런 식으로 교육받고 졸업한 학생들이 한의사가
되고, 또 교수가 되어 똑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언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막상 임상실습을 할 환자가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한의과대학 부속병원에는 중풍이나 침 맞는 환자 빼고는 다
양한 환자가 없다. 그러니 실습이 안 된 채로 대학을 졸업한다. 실제로 교수들이 치료하는 걸 보고 배운 적이 없는
데 졸업이랍시고 한 뒤에 어떻게 바로 환자를 볼 수 있는가? 그러니 백과사전식 처방책을 뒤지며 환자를 볼 수밖
에 없다. 한의대 교육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거라면 대학 문 닫고 아예 강습소를 차리는 게 낫다. 뭐하러 6년씩
이나 배우고 시험치고 하는가? 더군다나 일체 써먹지도 못하는 양방과목은 왜 그리도 열심히 양방의과대학보다
더 가르치고 배우는가?
증상 따라 처방하는 게 자랑인가
내가 학부 4학년인가 5학년 때,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에서 중국어 박사과정을 밟던 친한 후배가 찾아왔
다. 이 후배가 한국의 한의과대학 임상교수들이 중국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한번 만나보는 것
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한국 사람으로서 같은 길을 가는 입장이니 만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이왕이면
중국에 있으면서 불편한 점도 많았을 테니 우리집에서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래서 자리가 마련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한의학 변증이 화제에 올랐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변증을 잘 안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자 대번에 이 교수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는 변증 모릅니다. 증상에 따라 처방하는 것이 한국 한의학의 특징입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나중에
그 자리를 알선했던 후배가 말했다.
“난 한의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쩐지 시종일관 대화가 잘 안 되고 나중에 변증인가 뭔가가 나오니까 그
냥 말 끊고 도망가듯이 가버리는 게 좀 이상하네요. 선배님은 아직 학부 과정도 마치지 못한 학생이고 저 친구들
은 박사에 대학교수들인데
왜 이렇게 대화 수준이 안 맞습니까? 한의학 몰라도 그냥 느낌으로 알겠더군요.”
나도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한국에서 잠깐 머물면서 한의대생들도 만나고 교수들도 만나면서 그 수준
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 교수와 중국 교수의 동문서답
국민들 앞에서는 한국 한의학이 세계 최고라고 떠들지만, 적지 않은 학교에서 중국 교수들을 초빙하여 통역 강의
를 개설한다. 또한 중국의 베이징중의약대학과 교환교수 제도의 협약을 맺어 한국 교수가 베이징에서 연구하고
중국 교수가 한국에 와서 강의와 임상에 참여하거나 자문을 한다. 이 중국 교수들이 교환교수로 한국에 오게 되면
나와 연락이 되어 만나는 일이 많다.
어느 날, 중국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 한의대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그거야 직접 물어보면 되지 왜 그럽니까?”
“배우는 과목을 보면 중국하고 거의 비슷하긴 한데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요.”
잘 아는 한국 교수가 몇 번 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는 피부병 환자를 좀 보아달라고 하더란다. 환자를 살피니 종아
리가 퉁퉁 부어 있길래 습열하주(濕熱下注)라고 판단하고 이묘산(二妙散) 위주로 처방을 했더니 바로 치료가 되
었다. 그 후에 한국 교수와 서로 토론을 하려고 어떻게 병을 보고 어떤 처방을 했는지 물어봤더니, 그 교수는 박하
등 피부병에 주로 쓰는 약을 처방했다고 답했다. 중국 교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하는 약기운이
위로 올라가는 특징이 있어 다리에 병이 있는 환자에겐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수는 단지 피부병이란
이유로 피부병에 쓰는 한방약재를 쓰고(이런 서양의학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한국의 한의사들이다), 게다
가 변증이란 걸 전혀 모르고 습열하주의 개념은 물론 이묘산 처방도 전혀 이해를 못하더란다. 한국 교수는 그렇게
안 낫던 환자가 어떻게 치료되었는지 설명해달라고 하는데, 변증도 습열하주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줄 방법도
없을뿐더러 도대체 대학교수가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를 수 있느냐며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답답하다. 나만 해도, 아니 중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습열하주라고 하면 바로 이해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
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일순 난감했을 것이다.
습열하주란 말 그대로 몸에 습과 열이 동시에 아래로 몰리는 것을 가리킨다. 습이 몰리므로 당연히 붓고, 열과 함
께하니 당연히 열이 난다. 이런 경우에 여성은 누런 대하가 냄새와 함께 질질 흘러나온다. 무릎이 이유 없이 팅팅
부으면서 열이 날 수도 있고, 발목이 그럴 수도 있고, 하반신 어느 부위에나 습과 열이 몰려 병변을 일으킬 수 있
다. 이런 각각의 병변을 어떻게 책에 다 기록하겠는가. 증세 위주의 처방책에는 기재될 수가 없다. 『동의보감』
에도 들어 있을 리가 없다. 중국에서는 처방을 가르칠 때 대표적 증상을 일러주어 이해시키긴 하지만 증세로 처방
을 배우는 게 아니라 그 병의 원인과 기제를 한마디로 압축한 변증에 따라 이해한다.
이묘산이란 처방은 습과 열이 몸의 아래로 몰리는 경우 그 습과 열을 잡아주는 대표적인 처방이다. 내과적인 질환
이든 피부과 질환이든 부인과 질환이든 외과적 질환이든 이런 원리에 의해 발생한 병은 모두 이 처방을 기초로 치
료한다. 따라서 중국 의대에서는 모든 과목이 이 변증이라는 패러다임과 일사불란하게 연계되어 있다. 처방의 분
류나 약재의 분류도 변증 위주로 되어 있다.
이묘산은 황백과 창출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한약학 교재를 보면 황백은 열을 떨어뜨리고 습을 잡아주는 종류
로 분류된다. 이를 중국에서는 청열조습약(淸熱燥濕藥)이라 한다. 이렇게 분류되어야 변증에 따라 약을 맞추어 쓸
수 있다. 이 청열조습약에는 수많은 약재가 있는데 또 각각 특성이 다르므로 그에 따라 달리 사용한다. 예를 들면
청열조습약 중에 대표적인 것이 황연, 황금, 황백으로 세 가지 모두 누렇고 효능이 비슷하다. 그렇다고 임상에서
아무거나 쓰는 게 아니다. 모두 열을 떨어뜨리고 습을 제거하는 약이지만 황연은 주로 심장의 열을 떨어뜨리므로
심장을 중심으로 한 상부의 열과 습을 잡는 데 쓴다. 위와 장에도 작용하며 해독하는 기능도 강해서 습과 열로 인
한 설사에는 이 황연을 달여 먹기만 해도 웬만한 설사는 다 잡힌다. 황금은 폐,간을 중심으로 한 중상부의 열을 잡
는 데 쓴다. 그리고 황백이 바로 하부의 습과 열을 잡는데 쓰는 약이다. 따라서 습열하주가 일어나는 병은 어떤 증
세이든 이 황백을
쓴다.
신장의 음을 보하는 대표적인 처방인 육미환에 이 황백과 지모를 첨가하면 지백지황환(知柏地黃丸)이 된다. 신장
이 그냥 음이 부족한 정도를 넘어서 허열이 심해지면 음을 보하기보다는 허열을 잡아주는 게 낫기 때문에 청열조
습약을 넣는 것인데 신장이 신체 하부에 있기 때문에 다른 약이 아닌 황백을 포함시킨다. 황백은 또 허열을 잡는
성질도 있다.
창출은 방향화습약(芳香化濕藥)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향기가 강한 약들은 그 향기의 발산작용을 통해 습을
제거한다. 그런 약들 중 창출은 몸의 습을 잡아주는 동시에 비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우리 몸의 모든 습은 비장
에 원인이 있다. 따라서 단순히 습을 제거하는 약을 쓰는 것이 아니라 비장을 돋우면서 습을 잡는 약을 쓴 것이다.
이렇듯 이묘산 처방의 약성을 살펴봐도 피부병을 고친다는 얘기가 없다. 그래서 한국 교수와 중국 교수는 서로 대
화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암나무 수나무
구별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어느 날 중국 교수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한 교수가 나를 부르더니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나무의 암수를
구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뜬금없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였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같이 근무하는 한의
대 교수가 길거리의 나무를 보고 어떤 것이 암놈이냐고 묻더란다. 가지가 무성하니 이 나무가 암놈인가 보다 하는
식으로 짐작으로 대답했더니 맞다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나무의 암수를 구별하는 법을 첫째, 둘째, 셋째 꼽아가며
한참 동안 강의하더라고 저희들끼리 배꼽을 잡으면서 비웃음과 경멸을 곁들여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병도 제대로
못 보고 처방도 못하고 동양의학적 사고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런 건 뭐하러 그렇게 잡다하게 알고 있느냐는 투다.
동양의학은 음양오행의 도를 닦는 게 아니다. 도술은 동양의학과 아무 관련이 없다. 하긴 전 국민을 상대로 음식
의 음양을 가르는 엉터리 강의를 방송해주는 나라이니 나무의 암수를 구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한의학 공부라
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이런 교수를 보고는 음양의 도가 텄으니 그 처방이 얼마나 고매할까 신비스러워
할 것이다.
동양의학에서는 동양의학에 필요한 음양오행의 의미만 파악하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도를 닦을 필요는 없다. 평
생
음양의학의 도를 닦는다고 한의사 되는 건 아니다.
동양의학에 필요한 음양오행의 의미는 『황제내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것만 잘 이해하면 된다. 그 외에 음양
오행에 대한 전문적인 책을 볼 필요는 없다. 신비한 것 전혀 없이 유물론적 교육만 받은 현대 중국의 교수나 명의
들이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보며 난치병을 치료하고 있다. 그러니 신비의 유혹에 빠질 필요는 결코 없는 것이다.
교수 한 명에 20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
그 외에도 중국 교수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가관이다. 한국의 한 교수는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을 2
0명 이상 받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 교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중국 교수들은 훤히 알고 있다. 그러나 실
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어떻게 한 명의 교수가 학부 강의도 하고 그 위에 석·박사생을 20명 넘게 지도할 수 있느냐
고 한탄한다. 중국과 한국의 제도가 아무리 다르다지만, 일반 학문도 아니고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에서 이런
식으로 교육해서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건 학문을 좋아해서가 아니
라
다 밥벌이를 위한 간판이라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해줄 수도 없고, 그 자리에서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말았다.
정말이지 석·박사 과정을 그런 식으로 지도해서 학위를 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양의학 같은 전문의 제도를 도
입하겠다고 이전투구들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기실 석·박사생 문제야 별것도 아니다. 중국의 본과생만도 못한 석·
박사에 이젠 전문의까지 나올 판이다.
석·박사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내가 학부생일 때 우리나라 최대 일간지의 문화면 한 면을 다 채우면서 어느 역사학도가 『동의보감』 첫 페이지
에 나오는 인체도를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동의보감』이 최초로 척추의 숫자
를 정확히 그려놓았다고, 대단한 그림이라고 하면서 이걸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것이다.
동양의학의 패러다임에는 해부학 지식을 통해 질병을 판단하고 치료한다는 개념이 없다. 물론 『황제내경』에도
사람을 해부했다는 말이 나오긴 한다. 그러나 해부학 이론과 동양의학은 별다른 연계성이 없다. 오늘날 인체해부
학은 서양의학에 의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발전해 있지만 동양의학이 그걸 통해 발전한 일은 없다. 어차
피 동양의학에는 해부학을 이용할 패러다임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로 동양의학에서 인체구조를 해부학적으
로 밝히기 위한 노력이 별반 이루어지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청말에 중국의 한 의사가 해부학을 연구해서 책으
로 내기도 했지만, 그걸 통해 동양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아니다.
이런 동양의학의 패러다임도 모르고 그것을 주제로 삼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는다니, 또 그걸 우리나라 최대
일간지에서 한 면 전체를 할애하여 기사화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동의보감』 당시 우리나라의 쓰레기통
발전사를 연구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더 가치 있었을 것이다.
단, 동양의학에서 해부학이 쓸모 있는 건 침을 놓을 때다. 어느 곳이 위험한지, 위험한 곳은 얼마나 찔러야 안전한
지 등을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중국의 침구학과에서는 엄청나게 세밀한 해부학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롱침이야 그런 지식조차도 필요 없다. 대롱침으로는 어느 혈을 찔러도 위험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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