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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41)
-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1) -
마태복음 6장 25-34절/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본문은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은 관심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김으로 하늘의 보물 -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 - 에 마음이 있는 제자들의 생명과 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와 살핌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로 불러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있는 제자들의 생명과 몸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생명과 몸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공중의 새들과 들의 꽃인 백합화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공중의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곡식을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습니다만 하나님께서 그 새들을 기르십니다. 공중의 새들이 씨를 뿌리거나 곡식을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새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새들도 자신들의 먹이를 찾아 날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충분히 먹이를 먹지 못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주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공중의 새들의 생명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부지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중의 새들이 씨를 뿌리거나 곡식을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하나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느니라” 라고 하심은 공중의 새들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그 새들이 곡식의 씨앗을 심고 자라게 하고 추수하고 저장하는 그러한 것에 있지 않을지라도 먹이를 먹게 하시고 물을 마시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있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에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들은 굶어죽는 일이 없이 날마다 먹이시고 기르실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씨를 뿌리거나 곡식을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는 염려에 있지 않은 새들이 먹이를 먹음에 있고 자람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말해 지고 있는 것에서 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공중의 새들이 살아 있는 하루하루 모든 날의 생명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이런 새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참새의 경우 한 앗사리온 - 한 앗사리온은 로마의 동전으로 한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되는 적은 금액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므로 지금의 우리나라 화폐로 계산하면 하루 근로자의 값을 대략 4만원으로 칠 때 약 2,500 정도이다. 그런데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가 팔리고 있었으므로 참새 한 마리는 1,250 정도에 불과하다 - 에 두 마리가 시장에서 팔리는 정도의 아주 적은 금액에 거래되고 있는 하찮은 것으로 취급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적은 금액에 거래되는 하찮은 새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비를 입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생명과 몸은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더욱이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공중의 새들의 처지와는 다르다고 하는 것에서입니다. 공중의 새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만물의 하나로서 땅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만, 지금 예수께서 함께 하시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양자된 영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과 그 생명에 있는 몸은 하늘에 속해 있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명과 몸은 공중의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그러니 공중의 새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비에 두고 계시는데 하물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생명에 있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생명과 몸을 보호하고 살피는 자비로우신 분으로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명과 몸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안전히 보존될 것임을 알게 해 주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명과 그 생명에 있는 몸은 사람들이 염려에 있으면서 구하는 먹고 마시는 것에서 하루하루 지속되는 것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자비에 두시고 보호하시고 살피시며 안전히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먹을 것이고 무엇을 마실 것인지를 염려하는 것에서 한 순간이라도 생명이 연장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에 있는 그러한 것이 결코 제자들의 생명을 더 지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마실 것인지에 있는 염려가 제자들의 생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그 생명이 어찌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제대로 먹지 못함과 마시지 못함에 있을지라도, 그래서 그 곤핍함으로 곤란을 겪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위험에 처할지라도 제자들은 그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에게서 참으로 중요한 것에 그들의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을 이제 두 번째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들의 꽃인 백합화입니다. 예수께서 들의 백합화를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마실 것인지에 이어서 무엇을 입을 것인지에 대한 염려에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믿음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에서입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으며 길쌈도 없으나 솔로몬이 일생동안 누린 영화로도 비교될 수 없는 자연의 원색이 지닌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입고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이 원색을 염려함에 있는 것에서 입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의 백합화가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옷입고 있는 것은 수고하는 것에 의한 것도 아니고 길쌈하는 것에 의한 것도 아닌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들의 백합화는 오늘 피었다가 내일 지며, 또한 그 아름다움의 영화도 아궁이에 던져져 불살라지기도 합니다. 들의 백합화가 입은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그렇게 참으로 하찮은 것입니다. 하지만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도 그 꽃만큼 영화롭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들의 백합화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왕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서 색을 곱게 내려고 하여도 원색을 따르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원색을 모방하려고 하여도 원색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에는 미치지를 못합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을 동원해서 수를 아름답게 놓을지라도 자연 그대로인 들의 백합화를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들어서 제자들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하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솔로몬의 영화도 따르지 못하는 들의 꽃인 백합화이지만, 이것들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에 불과한 참으로 하찮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없어질 백합화에게도 하나님께서 아름다움을 입히시는 돌보시는 자비에 두시고 있다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에는 아궁이에 던져져 불살라져 없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명과 그 생명에 있는 몸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하나님의 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와 살핌을 받음에 의해 영원히 보존 받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이 이러한 이해를 갖고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그들의 믿음이 있는 것에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함으로 그것들을 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제자들의 믿음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는 믿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그래서 거기에 전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를 책망하는 것에서 하시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 부정의 용법을 사용하시는 것을 통해서 오직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인 믿음을 강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의 산상설교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로 섬겨 따름에 있는 제자들이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는 자신들의 실상을 이해하고 이제 그들의 마음이 가 있는 보물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서 그들에게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지닌 능력을 권능있게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주로 섬겨 따름에 있어 그분의 이름을 증거하여 온 세상에 전파해 나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자신들의 육체에 받는 것에서 사도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헐벗고 굶주렸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며 대적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고 매를 맞으며 온갖 고생과 박해를 당하는 것이 한 번 두 번이 아니며, 이로 인해서 생명의 위험에 처하며 결국에는 그 몸에 해를 입어 죽음을 당할 것에 있기도 합니다만, 이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몸은 죽음의 해를 당할지언정 그 목숨<생명>은 결코 빼앗김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몸과 함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을 해하는 대적자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대상은 몸과 함께 목숨을 빼앗는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명과 그 생명에 있는 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있어 영원한 보호와 살핌에 있으면서 안전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로 있을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지금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오직 그들의 생명과 몸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에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하는 기도에 언제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거하는 입에 언제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권세, 이 하나님의 의요 구원이 지닌 능력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생명있게 발휘되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영이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권능있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스도이심의 시인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섬김에 있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떻게 날마다 나타날 수 있는지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 위로부터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단 한 차례도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지닌 권능을 날마다 힘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인 그날 그때는 항상 여상합니다. 이 믿음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 하나의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며 주께서 하셨듯이 또한 자신들에게 공급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함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게 되는 사랑은 단지 하나님의 자비<사랑>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지닌 권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