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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석류
글쓴이/정재형
- 1부 -
모처럼 아내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그 동안 회사 일이 많아 야근을 자주 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회사 동료와 탁구를 치고 목을 축인다는 핑계로 맥주를 마시다가 술자리가 길어져 거의 매일 자정 무렵쯤 귀가한 탓에 아내와 저녁을 함께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랜만에 함께하는 저녁 식사인데도 아내의 표정이 어둡기만 하다. 몇 마디 말을 걸어 보아도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는 식사 후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드라마 속의 남녀 주인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잘도 재잘거렸는데, 오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내는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내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와서 샤워를 하고 안방으로 들어서자 아내의 입에서 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묻자, 아내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 쉬더니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봉 스님 알지?"
"누구?"
"내 친구 선희와 함께 지내던 스님 있잖아."
"아... 스님 돌아 왔대?"
"아니 사실은 오늘 암자 근처 토굴에서 사체로 발견됐대."
"뭐???"
"선희 계집애 불쌍해서 어떡해~~"
선희...
아내를 만나기 훨씬 전, 고등학교 1학년 문학반 전북 송년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불그레한 볼에 촉촉한 눈동자, 바람 불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은 가냘프고 자그마한 체구, 감기에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는 그녀.
송년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모두의 시선이 콜록 콜록 마른기침 소리를 내는 그녀를 향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결국 그녀의 입장을 몰라주는 무정한 감기 바이러스의 행패로 인해, 연신 작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뛰는 듯한 걸음으로 행사장 밖으로 나가는 그 모습 어찌나 안쓰러웠던지.
내 순서 바로 다음 차례인 그녀의 시낭송 시간, 자신의 차례임을 알고 행사장에 다시 들어 왔으나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자제할 수 없는 기침 때문에 시낭송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창피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그란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죄송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무대에서 힘없이 내려오는 모습은 한 떨기 수선화 같이 여리고 작은 여자로 내 가슴 깊이 각인되었다.
나는 그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으나 주저하지 않고 약국을 향해 달렸고, 행사장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감기약이 들어 있는 약봉지를 작고 뽀얀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고 쑥스러워진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사람들 틈에 몸을 숨겼으나, 마치 아주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마음이 뿌듯하고 훈훈했다.
매월 문학 모임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를 들뜨게 했고, 어서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녀를 처음 보게 된 날부터, 끙끙거리며 사랑의 열병을 앓았지만, 한 달여 만에 만난 그녀의 표정에서는 그러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내게 살짝 눈인사만을 건넸을 뿐이어서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나마 나를 기억해 주는 것 같아 한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보아하니, 선후배 사이(서)에도 인기가 많은 듯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맴돌았다. 환하게 웃는 모습에선 감기는 다 나은 듯 보였고,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치아가 매력적이었다. 말을 건넬 기회를 엿보았으나 그녀 혼자 있는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눈치만 보고 있다가는 말을 건넬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 같아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미리 준비한 석류를 불쑥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네..."
"석류를 자주 드셔 보세요. 석류는 비타민C가 풍부하고 감기 예방에도 특효가 있어요."
그녀는 내가 내민 석류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내 속셈을 눈치 챘다는 듯, 묘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꾹 참고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어젯밤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연습한 대사를 천천히 말했다.
"꼭 드릴 말이 있는데. 모임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주실래요?"
"......"
내가 어서 대답을 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라도 하듯, 당황스런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그녀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계속 서 있자, 재미있어라 하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수줍게 승낙을 했다.
그녀와 식사를 마치고 공원을 함께 걸었지만 바보 같은 나는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고 애꿎은 가슴만 두근거리며 이렇게 나란히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했다. 그녀가 말없는 나와의 데이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공원 곳곳에서 느껴지는 새소리, 물소리, 꽃내음이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한 연주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느낌일까? 생각하며 돌아보는 순간 그녀가 말을 꺼냈다.
"아참! 꼭 할 이야기가 있다 했는데 언제 할 거예요?"
"아... 그게 그니까요.... 사실은요..."
"피~ 거짓말이었죠?"
"저... 실은... 사실은... 선희씨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
"우리... 친구 할래요?"
"...... 하는 거 봐서요."
"네??"
"호호호..."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환한 미소가 떨리는 내 마음을 조금은 편안하게 해줬다.
어느덧 서산에 해가 걸리고 노을이 붉게 물들자 그녀는 그만 집에 가야 한다며 일어섰고, 나는 헤어짐의 아쉬움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또 다시 긴장이 되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주말에.. 계룡산..에 함께 가실래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돌더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너무 고마웠다. 그녀도 나와의 만남이 싫지 않은 듯 데이트 내내 얼굴을 붉히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일 때는 서산의 노을 탓인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한편으론 명랑한 성격이면서도 내심 수줍어하는 모습이 참으로 예뻐 보였고, 그런 모습이 내 가슴을 더욱 두방망이질 치게 했다.
두 달 정도가 지나자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지만 내 가슴 속에서 들려오는 쿵쾅 쿵쾅 소리는 여전히 계속 되었다. 그녀는 내 생일이 자기보다 10개월 빠르다며 나를 오빠라 불러 줬다. 겉으로는 같은 학년인데 무슨 오빠냐며 만류 했지만, 여동생이 없어서 오빠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녀가 오빠라고 불러 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녀는 항상 김밥 도시락을 준비했는데 그 모양이 참으로 다양하고 예뻤고, 그녀가 싸온 김밥 도시락은 세상 어느 음식보다 맛있고 달콤했다. 김밥이 그렇게 맛있고 달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데이트 때마다 나는 석류를 준비했고 그녀가 석류를 먹는 모습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석류의 신맛에 한쪽 눈을 살포시 감고 몸서리를 치며 석류를 먹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아마 하늘나라의 선녀가 석류를 먹을 때 저런 모습일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런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석류를 준비하기도 했다.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계룡산의 은선 폭포는 그녀와 나 둘만의 아지트였다. 계룡산 정상에 오르기 보다는 은선 폭포가 보이는 근처 숲속 우리의 아지트에서 도시락도 함께 먹고 문학을 이야기하며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실은 내가 땀이 많은 편이라 등반 후 옷에 배인 땀 냄새를 느끼게 해주기 싫었다.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향기가 좋았듯 나도 그녀에게 좋은 향기만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두 번째 계룡산 데이트 때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그녀가 발목을 삐끗해서 그녀를 업고 산을 내려오는 바람에 많은 고생을 한 탓에 우리의 데이트는 등산이 아니라 가벼운 산책 수준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녀가 발목을 삐었을 때, 내 잘못이 너무 컸다. 산을 내려오다가 계곡물이 보이기에 잠깐 쉬어 가기로 하고, 우리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발을 물에 담갔다. 그녀의 엄지발톱에는 빨간 봉숭아물이 들어 있었는데, 흐르는 물속에서 꼬물꼬물 움직이는 그녀의 앙증스러운 발가락이 참으로 귀여웠다.
"선희 발가락 참 귀엽다."
선희는 내말에 부끄러운 듯 살짝 눈을 흘기며 발가락을 오므렸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짓마다 예쁘고 귀여운지...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는 내 발가락까지도 예쁜가 봐~~ 내가 그렇게 좋아?"
"..... "
그녀의 반응에 쑥스러워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에 물을 살짝 뿌렸다. 놀라서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이던 그녀도 나를 향해 물을 뿌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간 후 그녀를 향해 많은 양의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행동에 깜짝 놀라 물 밖으로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뿌리는 물을 피해 도망치다가 발목을 삐끗하며 넘어진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른 달려가 살펴보니 발목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그녀를 업고 산을 내려와 한의원에 들러 침을 맞은 후, 가벼운 상태니 너무 염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한의사의 말에 안도는 했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발목이 아파서 이마를 찡그리는 표정에 내 가슴은 송곳에 찔리는 듯 매우 고통스러웠다. 내가 아픈 것 보다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런 느낌 난생 처음이었다. 아마도 나는 내 자신보다 그녀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다친 발목 때문에 한동안은 기차 여행을 주로 했다. 덕분에 목포, 여수, 부산 등 당일치기로 많은 종착역을 다녀왔다. 돌아올 열차 시간에 맞춰 역 근처 도심을 한가로이 거닐 수 있는 기차 데이트는 우리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피곤한 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잠을 청할 때, 작은 숨소리와 머릿결의 향기는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그때마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녀의 발목이 다 나은 후 계룡산을 다시 찾았다. 그날의 계룡산 행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두 가지 의미를 안겨 줬다.
첫째는, 그녀는 문학에도 관심이 있지만 사실은 도예가가 되는 게 꿈이라 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후, 그녀가 만든 도자기에 내가 쓴 시를 써 넣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의 증표로 계룡산 은선 폭포 근처 우리 둘만의 아지트에 석류 씨를 묻었고, 먼 훗날 석류나무가 크게 자라서 우리의 사랑의 열매가 탐스럽게 열리기를 소망했다.
둘째는 첫 키스였다. 석류 씨를 땅에 묻은 그 날 그녀는 내게 물었다.
"나에게 뭐 바라는 거 없어?"
"바라는 거? 선희에게 특별히 바라는 거 없는데? 그냥 이렇게 자주 봤으면 좋겠다는... "
"그런 거 말고, 정말 나에게 바라는 거 있으면 말해 봐. 뭐든지..."
"뭐든지??"
"응. 오빠에게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서 그래..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평소답지 않게 긴장되고 진지해 보이는 표정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저 멀리 숲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자, 숲속에서 쉬고 있던 산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나를 향해 눈을 흘기면서 뜻 모를 소리를 요란하게 내 지른다. 그녀는 내게 다시 물었다.
"내가 오빠에게 등을 돌려도 나 미워하지 않고 영원히 지금처럼 잘 해줄 거야?"
"그럼... 당연하지."
"정말?"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게."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녀의 몸은 스르르 내 품속으로 스며들듯 안겼고, 놀란 내 가슴과는 달리 내 두 팔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꼬~옥 껴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은 가을비를 맞은 참새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을 쳤지만 내 입술은 어느새 그녀의 향기로운 작은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러운 솜사탕 같았다. 딛고 있는 땅이 솟아올라 우리 두 사람의 몸은 하늘의 구름 위로 올라갔고, 어디선가 감미로운 천상의 음률이 들려와 전율을 느끼게 하더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결코 잊지 못할 짜릿하고 흥분된 첫 키스였다. 그녀는 그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와의 키스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와의 키스가 아쉽게도 그날 한번으로 그친 건 나에게 용기가 없었던 탓이었으리라.
- 2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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