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설교제목 : 실상은 부요한 자
영원한 상의 상실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설이 주는 전통적 가치를 되새김질해야 하는 중대한 도전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서로의 복을 빌며 예를 갖추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와 연결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보다 깊은 곳에 뿌리를 두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보이지 않은 세계와 소통하는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입니다.
C.G. 융은 그의 마지막 저작인 《융합의 비의》에서 “영원한 상의 상실이 영적으로 대중을 허약하게 만들어서, 대중이 무가치하면서도 해로운 대체물을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다”고 진술합니다. 70년 전에 쓴 융의 글은 여전히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관통합니다. 근대 이전에는 위대한 종교 안에 위대한 이미지, 중심이 되는 상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원한 상을 잃어버리면서 정신적으로 허약해진 대중들은 무의식적 투사를 받은 집단적 지도자나 정신적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술과 마약에 의존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지나친 물질주의와 합리적 지성과 과학만능주의를 맹신하게 했습니다. 융은 이어서 말합니다. “위대한 종교들은 혼자 힘으로 서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올라설 발판을 제공하는 심리치료 체계이다. 오늘날 그 같은 발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다.” 위대한 종교는 한 인간을 온전히 서 있게 하는 든든한 토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의 본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든든하게 서 있게 할 토대를 오늘 우리는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있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정치 지도자들은 방송과 길거리 유세를 통하여 대중을 선동하며 무의식적 투사의 갈고리를 대중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이상과 그런 외부의 바람을 잘 분별하고 보다 깊은 곳에 계신 주님과의 건강한 유대만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나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에 두 번째로 편지를 씁니다. 편지의 발신자를 동일하게 언급합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8)”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처음이요 마지막, 부활하신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역사의 시작과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시오, 인간과 역사의 목표이자 미래를 완성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과 문명의 과거, 현재, 미래를 움직여가고 완성하는 것은 인간의 과학도 지성도 사회의 지도자도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작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완성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시작이시고 끝이 되시는 주님을 든든히 부여잡고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또한 죽음과 절망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알 때 우리 인생은 희망을 잃지 않고 여전히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힘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신뢰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서머나 교회는 극심한 핍박(황제와 유대인)으로 고통을 겪었었습니다. 그런 환난뿐 아니라 가난과 배고픔이 성도들을 더욱 고통 속으로 밀어넣었고, 더 큰 위축감을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부적으로는 환난과 지독한 궁색함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성도들의 실상은 부자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다름을 시사합니다.
최근에 만난 한 젊은 20대 청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위축되어 있고,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암울함으로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나 꿈에서는 그는 조금은 용기가 있었고, 어떤 이행을 위한 준비를 위해 힘겹게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늘 고개를 숙이며 있는 그분에게 잠시 고개를 들어보시라고 청했고, 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의 꿈은 희망적입니다. 당신의 삶은 겉보기와 다르게 새로운 이행을 준비하고 있고 달라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이것이 무의식 속에서 현실로 구체화가 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당신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2022년에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지진 혹은 쓰나미 등 재해로 폐허가 된 곳을 찾아다니며, 스즈메와 청년 소타가 다시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재앙의 문을 닫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적절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스즈메가 쓰나미로 잃어버린 엄마를 끊임없이 무의식 속에서 찾았는데, 어린 시절 여전히 트라우마로 고통받은 아이를 다시 보듬고 끌어안아 다시 상처를 회복합니다. 무의식 중에 고통의 문을 열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재앙을 대면하여 다시 고통받는 자신의 과거의 아이를 다시 보듬어 그 문을 닫을 때 재앙은 멈춥니다. 스즈메는 고통받는 옛 과거의 울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다시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나 어두운 측면, 외면의 모습과 동일시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내 안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실상은 삶의 내일을 충분히 열어갈 수 있는 충문한 자원을 가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삶이 지치고 가난하다고 느끼십니까? 주님은 어쩌면 실상은 부요한 자라로 말씀하시고 계심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충성으로
주님은 다시 힘주어 그들에게 닥칠 어려움을 말씀하십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예수를 믿고 따라가기 힘든데, 장차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장치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가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10).”
닥칠 고난과 시험, 옥에 갇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가올 삶에 고난과 환난이 예고된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위축되고, 그동안 고수했던 삶을 포기하고 돌아서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말이야말로 삶의 고난을 뚫고 가는 바른 삶의 자세일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마음을 한군데로 가지런히 하고 끝까지 가던 길을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충성은 삶을 적응할 때 필요한 가장 확실한 비책이기도 합니다. 종종 저는 고통스럽게 삶에 적응해야 할 때 “개처럼 충성하라”고 합니다. 충성의 마음이야말로 두려움 속에서 고난 속에서도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이 충성의 태도로 우리에게 고난과 두려움을 넘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충성한 자에게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에서 ‘면류관’이란 ‘스테파노(stephanos)’로 장식의 의미와 권위를 표상할 때 쓰이며, 경기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시련을 겪어낸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스테파노입니다. 이 관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전체성을 표상하는 자기실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시련과 환난을 겪으며 끝까지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끝까지 충성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사망의 해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로 귀가 있는 사람은 상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선포하며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보상을 다시 강조합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둘째 사망이라는 말은 탈굼에서 유래한 용어로 유대인에게는 친숙한 말입니다. 첫째 사망이 육적인 죽음을 가리킨다면, 둘째 사망은 영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증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육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자는 노년의 삶이 다가올 때 더욱 죽음의 두려움 속에 신경증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후반기 삶을 위한 학교이고, 한때 학교였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모든 종교는 원형과의 접촉을 초래하는 조직적인 노력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영생, 불멸, 죽음을 말하는 것은 심리적인 필요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C.G 융은 “모든 위대한 종교의 목표는 죽음이고, 종교는 죽음을 준비하는 복잡한 체계이며, ... 특별히 기독교의 ... 존재의 의미는 그 종말에 완성되는 것”[Jung CG, 한국융연구원C.G.융 저작번역위원회 역(2004a) : 융기본저작집 9권, 인간과 문화, 앞의 책, p100.]이라 말합니다. 융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실패한 일에 대하여 “인간 안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해명해주지 못했음을 후회하였습니다.
인간은 의식과 육체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의식을 훨씬 압도하는 영혼의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 만들어내는 나의 흔적은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나를 덮치지 않기 위해서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