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이화은
우는 아이에게 집에 가자고 하면 뚝 울음을 그친다
집은 울지 않아도 되는 곳인 줄 아이는 알았을까
전학해 온 지 한 달 된 학교
앞에 놓은 시험지는 깜깜하고 깊었다
심해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빈 시험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선생님이
그래 눈물만한 답은 없지
내 시는 아직도 눈물만한 답을 얻지 못해 헤매고 또 헤맨다
객짓밥이 유난히 시린 날은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이 말을 두텁게 덥고 잠들곤 했다
신접살림 집에 딸을 두고 돌아서며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이제는 여기가 네 집이다 못을 박았다
그래도 나는 자주 집에 가고 싶었다
우는 아이 손을 잡고 집에 가자 달래면서도
나도 내 집에 가고 싶었다
어머니 돌아가실 즈음
혼미한 중에도 입술만 가만가만 집에 가자 하신다
우리들의 집이었던 어머니도 집에 가고 싶으셨구나
켜켜히 쌓인 한 생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해 줄 그런 집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십 년
제사를 거둔다는 전갈이 왔다
어머니 이제 가고 싶은 집에 닿으신 거다
- 계간 《유심》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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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객지
연말이었을 것이다. 연예인들의 시상식에서 큰 상을 타게 된 젊은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조명과 박수와 환호 소리가 그를 에워쌌다. 소감을 묻는 사회자에게 그 배우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 순간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그의 심정에 공감했다. 함성과 박수와 조명 속에서 그의 외로움을 찰떡같이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에게 그곳은 객지였을 것이다.
객지는 아무 데나 존재한다.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나에게 객지는 만성질환처럼 늘 내 몸에 거주해 왔다. 단순히 고향이 아닌 곳만이 객지는 아니었다. 고향에 사는 친구들이 나이 들어가니 고향도 객지라고 한다.
나에게 집은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다. 어머니가 즉 집이었다. 어머니가 부재하는 집 밖은 모두 객지였다. 그게 일차적인 내 생의 객지였다. 살아가면서 객지는 무한 확장 무한 번식했다. 난감한 상황이나 불안하거나 외롭거나 슬픔 소외 등등이 모두 내 객지였다. 특히 시는 내 지독한 객지였다. 어머니에 대한 시는 수백 번 겹쳐진 객지 속에서 써졌을 것이다. 집에 가고 싶은데, 어머니가 계신 집의 그 무한 평화 속으로 가고 싶은데 돌아갈 집이 없다. 내가 언제 집을 떠났지? 라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돌아갈 집은 어디에도 없는 때다.
나는 지극히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눈물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근심 어린 얼굴로 빈 도화지 한 장을 들고 가정 방문을 오셨다. 미술 시간에 내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를 냈다고 한다. 한참 빈 도화지를 살펴보시던 어머니가 도화지 한구석에 연필로 아주 작게 그려진 간장 종지 하나를 발견하고 여기 그림이 있지 않냐고 큰소리를 쳤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거론되는 내 어릴 적 비화이다. 어머니는 내 숨겨진 모든 걸 발견해 주시는 분이었지만 내 지나친 소심을 걱정하셨을 것이다. 백지의 공포는 세상에 대한 내 타고난 두려움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잠시 어머니와 내 역할이 바뀌었다. 장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던 내 어릴 적처럼 어머니는 매일 오지 않는 딸을 기다렸다. 혼자서 긴 하루를 견뎌내는 아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타나 주는 착한 엄마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한창 공포의 백지를 메꿔가는 중이었다. 어머니 없이도 이 백지를 건너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중이었다. 어쩌다 군고구마라도 사 들고 나타나면 어젯밤에 좋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네가 웬일이냐고 반가워하셨지만 어머니의 유일한 낙인 고스톱으로 몇천 원 잃어 드리는 게 내 효도의 전부였다. 간장 종지는 이미 깨어지고 백지는 나 혼자 건널 수 있다고 오만한 순간 어머니 돌아가셨다.
그 후 삼십 년간,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던 객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머니가 아픈 몸을 누이던 그 요 밑에 내 객지들을 모두 깔고 누우셨던 거다. 어머니의 족쇄가 풀리자 악령 같은 객지가 내 앞에 도로 백지를 내민다. 연필을 쥐어 주며 백지 귀퉁이에 다시 간장 종지를 그리라고 한다.
TV 속에서 젊은 배우가 상을 받는 동안 나는 화면 밖에서 이 시를 쓰면서 조금 울었다. 집요하던 객지도 이제 많이 늙었다.
—계간 《시와 함께》 2025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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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1991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 『미간』 『절반의 입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