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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불교의 개황
불교가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의 인도에서였다. ‘불교(佛敎)’란 부처님(佛陀: Buddha)이 설한, 불타가 되기 위한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면 누구나 부처님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특정인에게만 붙여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2500여 년 전 부처님이 말씀한 가르침 그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수천 년의 역사를 경과하면서 광대한 지역에 전파되었고, 시대와 사회에 따라 교섭을 가진 사상과 문화도 다양했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는 원초적인 형태가 어느 정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때문에 불교를 하나의 범주에 넣어 취급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조차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교는 이처럼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변화를 경험한 종교’ 로서다.
세계 각국에 전파된 불교는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을 지켜왔다. 이것은 교단적 측면에서나, 교리적 측면에서 세계불교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서로 격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각국의 불교는 자기들의 전통과 행동방식만이 가장 정통적(正統的)이고 순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불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호부정은 부처님이 입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있어 왔다. 이른바 근본분열(根本分裂)의 원인이 된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의 갈등이 그러하고,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정통성 시비가 그러하다. 오늘날에도 세계불교를 양분하고 있는 남방불교(南方佛敎)와 북방불교(北方佛敎)는 상호비난은 하지 않는다 해도 정통성과 순수성의 주장에는 한 발자국의 양보도 없다. 남방불교 또는 북방불교라 해도 한 가지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각종 종파가 분립(分立)해 서로 다른 교의(敎義)를 가지고 있으며, 심한 경우 상호용납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르친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진리라면, 그것이 비록 불교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변치 않은 채 순수한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불교는 없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한 고집은 자기가 경험한 것과 다른 것은 무조건 낮춰 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나라와 불교적 전통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불교 전체에 통하고 있는 허다한 일체성을 무시해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종교인 불교를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세계의 모든 불교도들은 이제부터라도 넓은 안목으로, 각국의 불교가 어떤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의 실정은 어떤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사실을 포함해 세계불교의 실상을 정확하게 사실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불교라는 보편적 종교가 미래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바르게 평가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대 세계불교의 실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불교도의 수는 얼마나 될 것인가? 산출기준에 따라서 그 수치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대강 어림잡아 본다면 약 2억에서 8억 5천만 사이가 될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추측이다. 또한 비교적 불교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는 나라들까지 계산한다면, 그 수치는 9억 3천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 나라들이란 스리랑카ㆍ미얀마ㆍ태국ㆍ캄보디아ㆍ라오스ㆍ베트남ㆍ네팔ㆍ시킴ㆍ인도ㆍ한국ㆍ몽골ㆍ중국ㆍ대만ㆍ일본 등이다.
과거 아시아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던 중국이 현재는 공산화되어 있어서 불교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좀처럼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곳에도 공산정권의 승인을 받은 전국적인 불교조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티베트를 포함한 중국에서 불교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중국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나라의 불교도 수는 2억 3천만이라는 계산이다. 그 가운데 적어도 5천만 명은 남방불교(테라바다)의 신봉자들이며, 1억 8천만 명은 북방불교(마하야나) 신봉자들이다. 이 밖에 남북아메리카와 유럽에도 불교도를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오늘날 세계의 불교도들은 어떤 불교를 신앙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시아에 있어서 불교의 판도는 대략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테라바다(Teravāda: 上座部)를 신봉하는 남방불교권이고, 또 하나는 마하야나(Mahāyāna: 大乘)를 믿는 북방불교권이다.
전통적인 보수불교는 현재 스리랑카ㆍ미얀마ㆍ태국ㆍ라오스ㆍ캄보디아 등지에서 열렬히 신봉되고 있다. 이 계통은 초기불교의 순수하고 바른 전통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켜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그들이 초기불교에 비교적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를 해왔다는 점도 지적한다. 북방불교에서는 이들을 소승(小乘: Hirayana)이라고 낮춰 부르는 전통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그러한 말은 경멸의 뜻이 담겨 있으므로 자칫하면 불교 전체를 분열시켜 일체감을 상실할 우려가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쨌거나 남방불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왔다. 불교의 모국(母國)인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반도에서는 10세기를 전후해 이슬람의 파불(破佛)로 불교가 소멸되기도 했지만, 그 외의 다른 곳에서는 어느 종교보다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해 왔다.
1975년 이후 이 지역의 불교활동은 부분적으로 침묵에 들어갔다.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화되면서 라오스ㆍ캄보디아ㆍ베트남(대승불교국)에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제한받게 된 것이다. 많은 불교지도자와 신도들은 공산화이후 유럽이나 미주로 피난했다. 사원은 텅텅 비고 불교는 절멸상태로 들어갔다. 최근 공산정부는 국민을 결속하는 도구로써, 제한적으로 종교 활동 재개를 허용하고 있다고는 하나 과거와 같은 전성은 되찾지 못한 상태이다.
공산주의와의 관계에서 이 지역 몇몇 국가의 불교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미얀마와 스리랑카 승려들은 사회주의를 ‘불교가 이상으로 하는 세계에 들어가는 전 단계’로 보고 적극적으로 불교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키려 했다. 태국과 패망 직전의 남부베트남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런 시도가 있었다. 이를 ‘불법사회주의(佛法社會主義)’라고 하는데, 특히 미얀마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서력기원을 전후해 일어난 대승불교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네팔ㆍ시킴ㆍ부탄ㆍ티베트ㆍ몽골ㆍ구소련의 일부(특히 부리야트 지방)에 퍼져있는 라마교(密敎)와 중국ㆍ대만ㆍ홍콩ㆍ베트남ㆍ한국ㆍ일본ㆍ본토 밖의 화교(華僑)들이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ㆍ싱가포르 등지의 선(禪)과 정토(淨土)가 혼합된 대승불교가 그것이다.
대승불교 말기인 7세기경에 일어난 밀교는 티베트에 들어가 라마교라는 독특한 모습으로 변해 몽골에 전해졌고, 네팔에도 들어갔다. 1959년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되면서 많은 라마승들은 네팔과 시킴으로 옮겨가 밀교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다. 공산화된 몽골에서는 라마교가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종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티베트도 최근 중국 당국의 종교정책 완화로 다시 부흥될 조짐이다.
중국(대만을 포함한)ㆍ한국ㆍ일본 등은 전통적인 대승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무엇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느냐에 따라, 종파불교가 성립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에서는 종파관념이 거의 없다. 한국은 2차대전 후 18개의 종파로 분립(分立)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조계종(曹溪宗)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일본에는 13개 정도의 주요 종파가 남아 있다. 이들은 일본에서 생겨난 종파들로서 중국이나 인도에서의 것과는 다르다. 일본승려들의 생활방식은 매우 세속적이어서 가정을 가진 승려들이 많다.
불교의 승단은 부처님 재세시(在世時)부터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 남방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불교에서는 비구만 있고 비구니는 없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곳에서는 어느 때인가는 확실치 않으나, 비구니의 계맥(戒脈)이 끊어진 후부터 여자는 출가승(出家僧)이 되지 못하고 있다. 스리랑카나 태국에 여자로서 독신수행자가 있기는 하나(이들을 그곳에서는 식차마나(戒學女)라고 부른다) 비구니는 아니다. 그러나 북방불교 권에서는 중국ㆍ한국ㆍ일본에 모두 비구니가 있고, 교화분야에서의 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서구의 불교다. 2500여 년을 동양에서만 영역을 확대해 온 불교는 19세기말 서구 강대국의 동양진출과 함께 서양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서구의 불교수용은 처음에는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였다. 그들은 동양의 식민 지배를 위한 도구로써, ‘동양학(東洋學)’을 정책적으로 장려했으며, 주로 언어학ㆍ미술사ㆍ비교문학ㆍ인류학ㆍ고고학 쪽에서 접근했다.
불교는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일반적 관심, 다시 말해 흥미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어필되기 시작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는 단계로 이행되었다. 그들은 서구적 방법론으로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동양의 불교학이 해내지 못한 고증학적인 불교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불교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연구하는 시각을 열어준 것은 서구의 불교학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승(大乘)만을 위대한 진리로 믿고 있던 북방불교에 있어서는 서구인들이 각종 인접학문을 종합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고, 그로 인해 그동안 감춰졌던 진실을 드러낸 것은 큰 충격이었다.
유럽의 불교학 전통은, 스위스의 인도학 교수였던 C.리가미의 분류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의 앵글로-저먼학파, 러시아의 레닌그라드학파, 그리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프랑크-벨지안학파로 분류된다. 앵글로-저먼학파는 팔리경전학회를 중심으로 상좌부불교 연구가 중심이었고, 레닌그라드학파는 범어(梵語)자료와 불교용어 정리 등에 업적을 쌓았다. 이에 비해 프랑크-벨지안학파는 티베트ㆍ중국 등 대승불교까지 연구한 학파다.
서구에서 최초의 불교도는 당연히 불교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이론을 탐구하면서,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진실 때문에 스스로 불교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동서의 문화교류가 시작되자, 동양의 불교국에서도 적극적으로 전도승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미주대륙에는 동양계 이민들에 의해 불교가 알려졌고, 전도승과 서구학자들에 의해 더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불교가 서구에서 일반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전통종교인 기독교를 중시하고 있으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뜨거웠던, 동양학 붐이 가라앉자 불교세력의 확대도 비례해서 주춤하고 있다.
이제 겨우 200년이 될까말까한 서구불교의 역사에서 동양과 같은 민중들의 생활 속에 일상화된 불교의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서구에도 불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확실한 뿌리를 내릴 것이란 기대는 가져도 좋다. 이러한 기대가 이미 몇 가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철학적인 면에서 서구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불교의 예지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그렇고, 금세기의 대표적 역사학자 토인비가 그렇다. 또 하나는 서구의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정신적 빈곤, 그 해결을 불교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이나 미국 곳곳에 선원(禪院)이 늘고 불교강좌가 성황을 이루는 것은 서구에서 불교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서구에서의 불교가 낙관적인 마지막 이유는 이민불교(移民佛敎)의 정착과 전도승들의 활동이다. 중국공산화와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로 많은 불교도가 서구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고유한 종교적 전통을 지켜가는 한편, 백인포교(白人布敎)에도 나서고 있고,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 동양에서 보낸 전도승들의 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현재 서구에서 불교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나라는 일찍이 동양학 붐의 본산지였던 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벨기에, 그리고 미주 쪽에서는 미국, 오세아니아에서는 호주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밖에도 스위스ㆍ그리스ㆍ스페인ㆍ덴마크ㆍ네덜란드ㆍ이탈리아 등에서도 불교도의 수는 늘어나고 있으며, 북미에서는 멕시코ㆍ캐나다, 남미의 브라질ㆍ아르헨티나에도 불교의 사찰이 세워지고 있다.
공산권인 러시아ㆍ폴란드ㆍ체코 등지에도 불교는 있다. 다만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활동이 부진할 뿐이다. 세계적으로 불교가 취약한 지역은 이슬람이 있는 중동지역과 검은 대륙 아프리카다. 동양의 불교가 보다 강대한 힘을 갖게 된다면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포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제 싹이 트고 있는 서구의 불교가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워낙 잡다한 종류의 불교가 다 수용돼 있기 때문에 동양의 어떤 특정한 불교(이를테면 상좌부 불교나 대승불교 또는 선불교나 밀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란 점이다. 오히려 그런 의미에서 서구의 불교는 지금까지 발생한 각종 불교를 통합 재창조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해 서구적 가치관에 의해 걸러진 새로운 불교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러한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불교를 믿고 수행은 하지만,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는 독신주의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제도(制度)종교보다는 교리 자체에 이끌리고 있으며, 출가재가(出家在家)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 자신의 표현대로 한다면, 대승도 소승도 아닌 신승(新乘: Navayāna)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서구불교 전체의 성격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가능성만은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불교가 다른 종교처럼 어떤 도그마를 갖지 않는다는 특성으로 해서 역사적으로 많은 변모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신승(新乘) 출현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불교의 세계적 개황을 이해하면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불교는 아직까지 세계를 통합하는 기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티베트불교의 법왕(法王)은 정교(政敎)를 장악하지만, 그것은 티베트에 한해서일 뿐이다. 로마교황과 같은 존재는 불교에 없다. 불교에 교황과 같은 존재가 없는 것은 근원적으로 교리에 근거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신과 같은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절대적인 권능을 갖는 지배자가 있을 수 없다. 부처님 자신도 교단의 일원일 뿐 지배자를 자처하지는 않았다.
불교가 세계적인 통합ㆍ통일이 안 되는 이유에는 각국의 불교가 의지하는 경전이 다르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의 성경처럼 불경은 단순화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종파적 특성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이 각각 다르다. 통일된 성전을 갖게 되면 교리해석도 크게 차이는 없을 것이고 의식도 같아질 수 있겠지만, 불경은 워낙 방대해 단순화된 통일성전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조직화되는 추세를 반영하여 세계적인 연합기구의 필요성을 불교도 인정케 됐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말라레세케라 박사에 의해 창설된 세계불교도우의회(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다. 이 모임은 출가승려와 재가불교도가 함께 참여하여 우의를 다지고 공통의 관심사를 논의한다. 그동안 매년 한차례씩 장소를 바꾸어가며, 동경(일본)ㆍ양곤(미얀마)ㆍ방콕(태국)ㆍ대만 등지에서 회의를 열어왔다. WFB가 결성된 이후 세계 불교도들은 나라마다 다른 불기(佛紀)를 통일하는 작업을 하는 등 세계불교의 연합기구로서 주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또 하나의 불교의 세계적 기구로는 세계승가회(WBSC: World Buddhist Sangha Council)가 있다. 1966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창설된 이 단체는 출가승려들만의 모임으로서 3년마다 대회를 갖고 있다. 이 단체는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한때 공백기간을 갖다가 1981년 대만에서 3차대회가 열려 재건됐다. 본부는 대만에 있다. 이밖에 지역적으로는 유럽불교의 연합기구인 유럽불교도연맹(BUE: Buddhist Union Europe)이 있고 몽골에 본부를 둔 아시아불교평화회의가 있다.
현대사회는 불교의 새로운 변모를 요구하고 있다. 서양문명이 크게 일어나 불교를 자극하고, 국제적으로 볼 때도 모든 나라에 걸쳐서 사회정세가 변화되었으므로 불교는 그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성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아시아에서는 현재 불교 개혁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교육시설이나 연구계획, 또는 재가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이 늘고 있는 것 등이다. 또 많은 지역에서 새로운 불교단체가 조직되고,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일로 새로운 학문이 발달하고 통신과 교통수단이 개발됨에 따른 것이다.
이제 불교도들은 서로가 더욱더 긴밀한 접촉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머지않아 불교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부처님의 진리 안에서 결합시키고,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를 실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불교도가 이러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은 결코 분수에 넘치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무력에 의하지 않고, 오직 설득에 의해 전파된 세계 유일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출처 : 홍사성의 불교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