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 장엄한 존재
오늘도 아니타 무르자니의 책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의 한 글귀를 소개 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 명징한 상태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내가 늘 생각하던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렇게 존재해. 그렇다면 나는 뭐지? 나는 누구지? 분명 어떤 식으로도 내가 줄어들거나 작아지지 않았어. 오히려 나는 이렇게 크고 이렇게 힘 있고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였던 적이 없어. 와, 정말 이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구나. 거기에 내가 있었다. 몸이나 다른 어떤 물리적 특징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내 순순한 본질은 여전히 존재했고, 내 전체 자아에서 조금도 덜어내진 요소는 없었다. 아니, 내 물리적 존재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강렬하며 훨씬 더 넓어졌다고 느껴졌다. 사실상 장엄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나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저 장엄할 뿐이라는 앎이 나를 가득 채웠다”
이것이 바로 어찌 보면 우리가 보통 ‘참나’라고 하는, 주인공, 불성이라고 하는 그 자리를 탁 확인해보고 개합하면서 확인해보고서 느낀 어떤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나는 사실상 장엄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장엄한 순간이었다.” 라고 한 이 ‘장엄하다’는 표현은 부처님과 불국토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이거든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해서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원만 구족한 그대로로써 온전한 그것을 장엄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지금 이렇게 아파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돈이 없어 허덕이고, 지금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뚱이가 남들보다 못났고, 이랬다고 느끼는 이 순간에조차 우리는 언제나 장엄한 존재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입니다.
단 한순간도 이 장엄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훼손되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어디로 달아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도 부처가 나에게서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내가 부처가 아니었던 적은 없고, 우리가 부처를 잊어버린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부처에 집중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의 내 드라마, 내가 만들어낸 연극, 생각이 만들어낸 삶이라는 이 시나리오 속을 살고 있으니까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그 속에 빠져 심각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만이 나에게 중요하구나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사니까 나는 남보다 더 못하고,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것밖에 못 살고, 남들이 나를 무시했고, 남들이 나를 욕했고, 그것이 나인 줄로 착각하니까 그게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내가 뭘 먹고 살든, 뭘 해먹고 살든, 돈이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게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본질은 단 한 번도 훼손되지 않고 장엄한 부처 그 자체로 언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 드라마 속에 빠져서, 이 머릿속에 어떤 시나리오와 각종의 어떤 망상 분별 속에 빠져서 그것이 실체라고 여기면서 착각하고 사는 그 순간에조차 그것은 착각일 뿐이지, 사실은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장엄하다는 것이지요. 지금 이 모습의 나에게서 단 하나도 바꾸지 않더라도, 지금 이모습 그대로 우리는 장엄하고 아름답습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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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만상은 지금 이대로 장엄한 존재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