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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묵상글 들 ( 연중 24주 목요일-제발 받아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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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4주 목요일-제발 받아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말씀, 그러니까
'제발 주어라!'와 '제발 받아라!' 중에서 어떤 말씀을 더 하실까,
문득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인색한 우리에게 가진 것을 제발 나누어주라고
하실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제발 받으라고 먼저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없는 걸 주라고 하실 분이 아니고,
주시지 않고 주라고만 하실 분이 아니시기에
주기 위해서는 먼저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발' 받으라고 하시는 더 큰 이유는
주셔도 도무지 받으려고 하지 않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지 않는 우리,
은총을 받지 않는 우리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또 사랑을 원치 않는 우리,
은총을 쓰레기로 여기는 우리라는 얘기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것은 다른 것을 더 바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용서를 더더욱 받으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용서의 사랑, 용서의 은총을 더 받으라고 하시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향유를 바르며 자신의 사랑을 최고로 표현한
죄지은 여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죄를 용서받고 보답으로 사랑도 크게 드렸는데
용서를 받지 않는 우리는 용서가 필요치 않다는 얘기입니까?
용서가 필요치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필요한데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고,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는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거나
죄인일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 큰 죄인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은근슬쩍 죄인이 아닌 양 넘어가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판공 성사 때 고해소에 들어와서는
주일 미사 빠진 것 외에 아무 죄도 고백하지 않은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죄도 짓지 않았냐고 하니까 지었다고 하고,
그래서 다시 왜 그 죄들은 고백하지 않았냐고 하니까
자기는 그 정도는 죄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살인죄를 짓지 않았으니 미워한 죄는 죄가 아니고,
사기 치거나 등쳐먹지 않았으니 거짓말하거나
험담을 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우리들 중에 용서를 받지 못하고 그래서 은총을
체험치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죄책감이 커서 다시 말해서
죄가 은총을 덮어서 은총을 체험치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해 감수성이 너무 무뎌서
죄도 없고 은총도 없습니다.
나는 이중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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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24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다’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자비가 크다는 것입니다. 또한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이라도 용서받을 권한이 있고, 용서를 받으면 그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습니다.”
동네에서 행실이 몹시 나쁜 여인이라고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그 용서를 청하는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작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바리사이들은 여인의 참회 행위를 보지 않고, 과거의 잘못에만 비중을 두었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모습에는 관심도 없고 여인의 과거 잘못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잡는 그녀의 손짓 하나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여인의 접촉을 부정을 타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 여인은 마땅히 심판과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난을 받아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나쁜 행실을 알고 있고, 주변 사람들이 그 여인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모든 참회행위를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시며 여인의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매여 미래를 막아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를 빌미로 한 사람을 매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용서와 사랑으로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어줍니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일에 연연하고 집착하면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큰 사랑은 과거의 잘못에 용서를 가져옵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모두를 품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랑의 법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야 합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저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주님을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물로 누벼놓는 하루를 주님의 자비가 감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결코 용서하시는 일에 지치지 않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기억을 잃어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십니다....하느님께는 어떤 죄도 마지막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법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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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36-50: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 바리사이의 집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회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37절), 그 여자는 예수께서 바리사이의 집, 즉 회당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아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땀에 젖은 채 식사 중인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다.
여기서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39절)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두 채무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바리사이는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43절) 채권자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주님께서는 밖에서도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셔서는 더 큰 기적을 행하셨다. 밖에서는 병든 육신을 고쳐 주셨지만, 안에서는 병든 영혼을 고쳐 주셨다. 밖에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셨고, 안에서는 죄 많은 여자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그러나 눈먼 바리사이는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들을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입맞춤이란 사랑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께서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듯이, 교회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교회만이 신부처럼 신랑에게 입을 맞춘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신부, 신랑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여자는 깊숙이 감추었던 눈물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여인을 옭아매고 있는 많은 조에서 그를 해방해 주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절) 이 말씀은 참으로 하느님다운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여자를 자유롭게 해주신 동시에 함께 앉아있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셨다.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49절) 말한다.
이제 용서는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47절) 라고 하신다. 베드로 사도도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꾸미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앞에 올바른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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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감사 ♣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이 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지만,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기뻐할 일이 생겨야 기뻐할 것이고,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지 않겠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인의 ‘기쁨’과 ‘감사’는 자기가 원하는, 또는 좋아하는 어떤 일을 만났을
때에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써 실천해야 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언제나 기뻐하게 됩니다.
(믿음에서 감사로, 감사에서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기쁨, 기도, 감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에 대해서,
“나쁜 일도 은총인가?”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욥’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살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은 일, 내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 일들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 나에게 좋은 일이었음을 깨달을 때도 많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바오로 사도가 한 이 말은,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지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언젠가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또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섭리였음을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인생의 끝부분일 수도 있고, 저쪽 세상에 간 다음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사람에 따라서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떻든 모든 사람의
모든 일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4-47).”v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떤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그 여자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언제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하셨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다면 여자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의 눈물일 것이고, 여자가 예수님에게 온 다음에 용서하셨다면
여자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사이에게 하신 말씀은, 시몬을 꾸짖거나
비난하시는 말씀은 아니고, 여자의 마음과 행동을 부각시키기 위한 말씀입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르는 여자의 행동은 매우 이례적인 행동인데
감사와 존경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반적인 손님 접대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뜻으로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입니다.
(“크게 회개한 사람은 주님께 큰 사랑을 드린다. 그러나 회개가 부족한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많은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큰 사랑을 드린다. 그러나 은총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자비, 용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베풀어집니다.
그러나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드리는 사랑에 차이가 생깁니다.
(온 세상에 똑같이 비가 내려도 큰 그릇을 준비한 사람은 빗물을 많이 받게 되고,
작은 그릇을 준비한 사람은 적게 받게 되고,
그릇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햇빛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해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사람은 온 몸에 햇빛을 받고,
뒤돌아 서 있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만 보게 됩니다.
암실 속에 숨어있는 사람은 빛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제대로 받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에 인용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1) 힘든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2)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3) 믿고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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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죄인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집,
죄인을 극도로 꺼리는 바리사이의 식탁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발을 닦는 여인의 눈물은 바리사이와 죄인을 갈라놓는 단단한 벽을 허물어뜨립니다.
루카 복음의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을 비롯한 다른 복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의 다른 점은 예수님의 장례가 아닌 죄의 용서에 대한 응답으로서 여인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께 다가서는 여인은 겸손이나 자기 비하 또는 속죄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기쁨에 휩싸여 있습니다.
죄는 불안을 가져옵니다. 죄는 고유한 삶을 망가뜨리고 주위의 눈치를 보게 하며, 끝내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 삶의 경험이자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어떠한지요? 어찌하면 용서받고 살아갈까요? 여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복음은 여인이 어떤 행동으로 용서받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용서받은 모습으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오늘 복음은 죄를 짊어지고 사느라 반성과 참회로 주눅 든 수동적 자세를 질타합니다.
반성과 참회가 이미 용서받은 것일 수 있음을, 그 반성과 참회가 감사와 찬미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듯합니다.
반성은 주눅 든 자기 비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설계하려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극복하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에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만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일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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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새벽을 열며.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빠다킹신부님.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뒤, 77세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보내고 있었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은 무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술을 10주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1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샤갈이라 불리는 ‘해리 리버만’입니다. 그는 101세에 22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10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0세가 넘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않고 있다가, 2~30년을 지나고 나서는 어떨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에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지 못할 장애를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졌을 때가 아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성공을 위해 끝까지 시도하는 용감한 사람의 몫입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힘들었던 여인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을 경멸하는 바리사이의 집까지도 찾아갔습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를 수 있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아보지만 바리사이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믿는 사람이지만 바리사이는 믿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확실하게 죄를 용서받지만, 바리사이 시몬은 여인으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은 바리사이 시몬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시몬은 그분을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에 기름을 부어 바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마지막 예언자, 곧 종말론적 예언자임을 시몬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메시아임을 알지 못한 시몬이나 다른 바리사이들과 달리, 큰 빚을 탕감받은 여인은 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갔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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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으니 이왕이면 사랑하는 일에 도전하는 게 낫다(짐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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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1-∞
1965년부터 201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무엇인가를 했던 화가가 있습니다. 로만 오팔카라는 폴란드 화가로 ‘1965/1-∞’라는 그의 대표작이자 유일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1965년부터 검은 바탕의 캔버스에 흰색 물감으로 1부터 차례대로 숫자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에 1,000,000을 찍었고, 그 후부터는 캔버스 하나를 다 채우고 나면 그다음 캔버스에는 바탕색에 흰색을 1%씩 첨가해 칠한 뒤 그 위에 또 끊임없이 숫자를 이어 써나갔습니다. 흰색이 1%씩 더해진 검은 바탕의 캔버스가 언젠가 흰 바탕이 되고 그 위에 흰 물감으로 보이지 않는 숫자를 그리려던 것이 오팔카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가 젊은 날 세웠던 목표 숫자는 7,777,777이었고, 마지막으로 쓴 숫자는 5,607,249였습니다.
수십 년간 같은 작업을 해나간 그의 작품을 통해 영원하지 않은 인간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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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이야기하였고,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17년 전에 저는 교구 사목국에 있었고 사목국의 사제들은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어 제목은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지만 원 제목은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입니다. 성공이라는 말은 없고 삶을 효과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사목국에는 ‘교육, 전례, 선교, 가정, 복음화, 직장사목, 기획’을 담당한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업무에서 주어진 일을 하지만, 사목국 차원에서 함께 협력하고 연대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구는 ‘시노드(교구사목회의)’를 통해서 교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님은 ‘2020’을 말씀하였습니다. 2020년에는 가톨릭 신자가 20%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열심히 했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이어달리기에서 다음 사람에게 배턴을 넘겨주듯이 저희는 후배 사제들에게 사목국의 일을 넘겨 드렸고, 지금의 사제들은 코로나19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습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물과 배는 제자들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와 권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들은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소중한 것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잡는 일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는 일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율법의 가치를 무너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이제 소중한 것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박해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 것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서 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몇 달간 자리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소중한 직무입니다. 신문을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중한 직무이지만, 공동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매 주일 공동체를 위한 미사에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본당을 떠나서 교구에서 지냈습니다. 모처럼 공동체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니 제게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발라드린 여인은 소중한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오늘 하루 소중한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일을 찾았다면 행동으로 옮기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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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의 삶 - 사랑, 만남, 회개, 용서, 구원 -
세상에서 떨어져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33년째 머물러 정주하고 있지만 세상 중심 한복판에 살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혼자 유리된, 고립단절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편해야 저도 편하고 세상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합니다. 바로 수도자의 마음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게 되고 최선을 다해 매일 강론을 나누게 됩니다.
어제 받은 세 통의 카톡 메시지가 새삼 이런 진리를 확인하게 합니다.
“며칠전 수도원에 다녀온 이후로 참말로 매사 매순간 감사를 느끼며 지냅니다. 우리 가정 식구 모두가 무탈하게 세끼 식사하며 가정 기도를 매일 같이 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한거예요. 신부님 기도 덕분이라고 느껴지네요.
세상적으로 보면 최하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편안함을 잠시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주신 휴식인 것
같아요. 자존심의 꽃이 다 떨어져야 인격의 꽃이 편다고 하더니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신부님,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요? 자연 이치대로 순행하며 사니까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덜한 것 같아요.
신부님 만나고 나서 제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기도 덕분에 이경자씨가 기적처럼 깨어 나셔서 중환자실에서 하루만에 일반병실로 내려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이분 위해 15일 미사봉헌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주님을 만난 분들의 고백입니다. 구원은 언젠가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가까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 구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먼저 사랑의 손길을 뻗으십니다. 어제 저녁 식사전 수도형제들을 줄 복숭아를 오토바이에 싣고 싱글벙글 웃으며 오는 한 수사님의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대로 구원과 부활의 기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과 만날 때 회개요 용서요 구원이요, 늘 우리를 찾아 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환대함이 그렇게도 중요
합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주님 부활의 증인이요, 부활의 구원의 기쁨을 사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도의 겸손한 고백이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맨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바오로의 겸손한 고백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마치 후반부는 그대로 저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만날 때 회개요 겸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시켜 겸손하고 아름다운, 매력적인 구원과 부활의 참 삶으로 이끕니다.
바오로와 쌍벽을 이루는 은총의 여인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죄녀입니다.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감동과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미 죄녀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며 하여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사랑의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향유의 사랑! 그대로 죄녀의 회개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표현된 죄녀의 회개입니다.
죄녀의 회개를 촉발시킨 예수님의 사랑이 이미 선행했음을 느낍니다.
회개해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해서 회개입니다. 그러니 누가 회개하지 않는다 꾸짖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회개할 것입니다. 죄녀와 예수님의 만남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오늘 복음중 절정의 장면입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 미사전례에 참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은 한 순간에
죄녀의 전부를 알아 챘습니다. 죄녀의 예상치 못한 행위에 놀란 바리사이 시몬과는 너무 판이한 주님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은연중 죄녀와 바리사이 시몬을 빗댄, 빚을 많이 탕감받은 자와 적게 탕감받은 자에 대한 적절한 예를 들면서 시몬을 직격直擊합니다. 바로 우리를 깨우쳐 회개에로 이끄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인간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수록 즉시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회개하고 사랑할 때 순수요, 죄가 없어 구원이 아니라 회개할 때 하느님 사랑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사랑과 죄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람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랑의 빛 앞에 사라지는
죄의 어둠처럼 말입니다. 죄녀가 그 순간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녀는 죄인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의 죄의 개념이 순전히 율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 죄의 개념은 관계적입니다.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사라지는 죄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사랑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백배 유익하고 낫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복음의 죄녀는 물론 마치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의 회개로 표현된 죄녀의 아름답고도 슬픈, 깊디 깊은 믿음에 감동, 감격하신 주님의 구원 선언입니다. 아, 이제부터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 함께 구원의 삶,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죄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본격적 우정의 여정에 오른 죄녀요 주님과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과거는 불문에 붙이고 다시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제나 내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나를 보십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가까이 있는
이웃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처벌이 아니라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려 노력하십니다. 처벌은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소망은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지는 것이며 내적 평화와 조화를 체험하며 구원과
부활의 기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1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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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님.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큰 사랑을 드러낸다
- 사도직의 동기에 관하여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한 여인이 귀한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어 드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는 향유를 부어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직을 회고하면서 부활 체험을 고백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죄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귀한 옥합에다 값비싼 향유를 준비해 와서는 아낌없이 예수님께 사용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미처 살펴볼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는 일만이 관심사였듯 싶습니다.
어떤 사정인지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그 여인은 그분에게 아주 큰 용서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그 후 그 여인은 남은 일생을 다 바쳐서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니고도 남을 것입니다.
독서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은총으로 거저 받은 선물임을
고백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주신 선물임을 긍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아울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발현의 상황은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번개와 함께 벼락을 맞은 것이었고,
그 바람에 그는 사흘 동안이나 눈이 멀어야 했으며, 그 벼락 소리가 그에게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말씀으로 들려왔으며,
눈이 멀 정도의 번개빛을 맞아 혼비백산할 지경이면서도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되물었으며,
다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하는 말씀을 듣고 회심하여 십여 년 간 잠심하면서 구약성경을 샅샅히 훑어가면서
바리사이즘을 총검토한 끝에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살아계시다는 결론을 얻고 투신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예수님께 대해서 우리가 보여드릴 수 있는
사랑의 크기는 그분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 깨달음의 크기에 정비례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직의 동기는 불의와 사회악에 대한 분노로부터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준으로 그분으로부터 받은 용서나 은총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네 신앙의 동기가 그분께 대한 감사로부터 나오는 현상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것이 감사하면,
그 감사의 정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혹시 이제까지 그분께 소홀했던 점 등은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리지요.
속죄의 기도보다 감사의 기도가, 감사의 기도보다 찬양의 기도가 한 수 위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역사적인 시민사회운동에서 많이 발견되다시피,
불의와 사회악에 대한 정당한 분노에서 촉발되어서 시작되고 확대된 움직임이 없지 않습니다.
시작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또 그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삶을 바꾸어놓고
세상의 역사도 한 단계 진보시킬 수 있으려면 진리나 정의라는 가치에 정조준된 더욱 순수한 동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나 정의라는 가치를 하느님에게로까지 최대한으로 승화시킨 존재로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 또 그분께로부터 받은 용서에 대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가톨릭적이고 영성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시작 단계에서부터 예수님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고
그분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정해서 시작한 일은 이른바 사도직이라고 불리우면서 우리네 혼자 힘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힘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한 힘을 위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복음과 독서에
나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의 동기에 관한 매우 강력한 교훈을 얻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직의 동기는 반드시 종교적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살면서 선택한,
혹은 부여받은 어느 분야에서든지 진리와 정의, 사랑과 평화라는 가치를 위한 투신은 예수님이라는
인격적 존재를 거쳐서 또는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과해서만 최고도의 영적 충전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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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랑과 용서의 상관 관계를 알려 주십니다.
"그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의 대접을 받고 계시지요.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되풀이해 읽어 봅니다. 그녀가 하는 대로 발을 내어맡기신 예수님 마음에도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남녀를 떠나서, 의인과 죄인을 떠나서, 어느 집 누구인지를 떠나서, 사랑을 행하는 여인과 사랑을 받으시는 예수님 모두에게서 온 정성과 온 마음을 다 쏟아내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참, 아름답지요?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바리사이 시몬은 고을의 죄인인 여자가 제 집에 들어온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에 더해 제 손님에게 손을 대니 마음이 불편했을 겁니다. 부정한 이와 닿으면 부정해지니까요. 그런데 예언자라는 사람이 죄녀의 손길에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고 있으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그의 속은 더 복잡해지고 까칠해집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
이미 그 속을 다 읽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녀 대신 그녀의 행동을 설명해 주십니다. 용서와 사랑의 관계가 명쾌히 정리되는 말씀입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그녀라고 왜 보란듯이 그 생활을 청산하고 떳떳이 새 삶을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한 인간을 옭아매는 가난이나 소외나 그밖의 여러 한계 상황들은 그리 쉽게 물러나줄 만큼 만만하지 않습니다. 복음 환호송에서 미리 우리에게 힌트를 주듯, 그녀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복음 환호송) 우리 모두의 표상입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 그 집 손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마음을 쏟아놓는 것은 죄인이건 보통 사람이건 쉽게 할 수 있는 예사 행동이 아닙니다. 고을을 찾은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려고 향유가 든 옥합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이미 용서의 은총이 시작되었지요. 비록 그녀는 이 마음의 끌림을 신학적인 전문 용어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설명이 불가능한 비이성적 비논리적 불합리성으로 다가오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 속에서 여인은 마음이 끌리는 사랑을 표현했고, 바리사이 시몬과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은 율법에 묶여 "속으로"(루카 7,39.49) 끊임없이 구시렁거리지요. 사랑한다면 알 수 있는 신비에 접근할 권한이 아직 그들에겐 없어 보입니다. 참 안타깝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자격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1코린 15,10)
열렬한 바리사이로서 자청해 "새로운 길"을 박해하던 사울은 은총으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가감없이 드러내면서 용서받은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 나는 ...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바오로가 은총에 순응해 예수님을 향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그의 사랑은 오늘 복음 속 여인처럼 진실되고 뜨겁습니다. 그가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그렇고, 그 사랑에 감사할수록 증거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니 우리를 용서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받고 용서받은 우리는 자연스레 사랑을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경축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와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우리는 용서받은 은총의 주인공임을 온몸으로 증언합니다. 용서받은 이의 자유는 사랑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을 배가시킵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할 일이 우리 주변에 온 천지 가득 널려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우리 인생입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복음 속 여인처럼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받은 용서의 증거니까요.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 가족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받은 거룩한 상흔(오상)을 기억하는 축일을 지냅니다. 프란치스코는 당신의 독생성자를 우리 하잘것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 놓으신 하느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는지 체험하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피정에 들어갔고 오상의 선물을 받았답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거룩한 수난 상처가 벗님 여러분 모두에게 맘속 깊이 체험되는 은혜로운 선물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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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창조시기 17일째-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7,47)
'큰 사랑을 합시다!'
오늘 복음(루카7,36-50)은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이 소식을 알고, 예수님께 다가가 이런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7,38)
그녀의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대화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큰 사랑을 한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큰 사랑을 드러낸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큰 사랑을 합시다!'
'큰 사랑을 받았으니, 큰 사랑을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되심으로써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큰 사랑'이며,
우리가 항상 잊지않고 기억해야 할 '본질'인 '케리그마'(kerygma)입니다.
이 게리그마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를 통해 선포되고 있는데, 이 케리그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이며, '하느님 은총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이 큰 하느님의 사랑과 이 큰 하느님의 용서를 잊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너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큰 사랑입니다.
우리의 앞선 큰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용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큰 사랑을 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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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루카 7장 36-50절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시는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내용, 여러분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가 주관한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가셨는데, 거리에 한 행실 나쁜 여인이 나타납니다.
예수님 발치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어드린 특별한 사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여인의 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데, 루가의 표현에 따르면 ‘죄인인 여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그간 살아오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죄를 지어온 여인, 밥 먹듯이 죄를 지은 여인, 죄 속에서 살아온 여인, 시편작가 표현에 따르면 머리칼보다 많은 죄로 괴로워하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죄에서 한번 벗어나보려고 몸부림도 많이 쳐봤지만,
결국 다시 죄로 빠져들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이 한 바리사이가 주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격식이나 체면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산해진미 앞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바람이 났겠지요.
이게 웬 떡이냐, 며 정신없이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수도자가 되기 위해 1년간 집중적인 교육을 받는 수련자 형제들과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앞으로 서원을 하고, 서품을 받으면 평생 아쉬운 것 없이, 불편한 것 없이, 그렇게 지낼 텐데, 수련기간 때만이라도 제대로 한번 가난하게 살도록 도와주자.
그래서 세운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물건을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습니다.
수련기간 동안은 그 어떤 물건이라 할지라도 새로 사지 않는다.
한 형제가 질문합니다.
“신부님, 그럼 운동화가 다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그럴 땐 기워 신는다.” 또 묻습니다.
“깁고 또 기워 너덜너덜 해지고 더 이상 방법이 없는데요.”
“그럼 빌려 신는다.”
음식과 관련해서는 이렇습니다.
첫째 수련소 사전에 일체 외식은 없다.
둘째 그러나 만의 하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외식을 해야 할 경우, 가격은 상한치 3천원을 넘지 않는다.
세 번째 혹시라도 다른 공동체나 잔치에 초대받아갈 때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에 최대한 먹어둔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노숙인들이었습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이집 저집 거처를 옮겨 다니시면서 챙겨주면 먹고,
그렇지 못하면 쫄쫄 굶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꽤 부자였습니다.
한 상 거나하게 잘 차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자며 열심히 영양보충에 전념하셨습니다.
이때 한 ‘껄끄러운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그 껄끄러운 존재는 다름 아닌 ‘죄인인 여인’이었습니다.
‘행실이 양호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영업’ 여인이었던가 봅니다.
상황을 봤을 때, 그 여인이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다들 그녀를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런 여인이 만찬석상에 등장한 것만 해도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그 여인이 하는 행동 좀 보십시오.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식사 중이시던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대뜸 울기 시작합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전라도 표현에 따르면 눈물을 찌끄렸습니다.
만찬 파티에서 대성통곡을 터트리고 있는 여인, 참 안 어울리는 장면이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더 괴로운 일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무리로 향유까지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더라면, 여인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야, 이 *야, 넌 왜 하필 밥상머리에서 이 난리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밥 좀 먹게 놔두면 덧나냐? 그리고 왜 찝찝하게 남의 발에 눈물을 찌끄리냐?
남사스럽게 남의 발에 입은 왜 맞추는 거야? 당장 그만 안 둬? 너 한번 디져 볼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조금도 몰아세우지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십니다.
여인의 눈물에 담긴 지난 세월의 상처와 아픔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여인의 회개하는 마음을 조용히 받아주십니다.
이윽고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여인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여인의 손을 잡고 여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여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예수님의 달콤한 사랑은 갈 데 까지 간 여인의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는 지난 세월 여인이 받아왔던 갖은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손길은 여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인간 본래의 존엄성과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위로자 하느님께서는 그 옛날 죄 많은 여인에게 보여주셨던 그 모습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상처입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향해 오늘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새살을 돋게 하십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지난 잘못이나 죄, 상처, 악습, 방황으로 괴로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고해성사 통해서 다 죄가 사해졌지만, 또 말끔히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불시에 그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괴롭습니다.
그럴 때 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죄인인 여인이 새 삶을 복원시키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 역시 지난 시절의 심각한 죄로 인해 고통당할 때 마다 우리 자신에게, 또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영원한 좌절은 없습니다. 영원한 눈물도 없습니다. 끝도 없는 슬픔이란 더욱 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앞길이 아무리 캄캄하다 하더라도 언젠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내 손 마주 잡을 위로의 큰 손 하나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느님 편의 희망입니다.
인간의 좌절은 하느님 측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지칠 때 가까이 오시는 분, 우리가 아주 지쳐서 탄식할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 견디다 울며 쓰러질 때 우리를 받아 안아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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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7,36-50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며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무엇일까요?
이 단어를 넘지 못하면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이 감사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받아 더 감사하니까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지금까지 저를 극도의 교만에서 구해주고 있으니 분명 주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단 한 순간도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구나!’였습니다.
부모에게 무언가 잘못을 해서 죄가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면 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께 무엇을 잘못해서 죄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매 순간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자신이 더 해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가 향유를 깨뜨려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을
눈꼴사나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깨우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께 무언가 더 해주고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 시몬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초대에 응답해 준 것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바로 일어나기는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주는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바리사이가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1요한 4,20)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감사를 찾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상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큰 반감을 갖습니다.
영화 ‘똥파리’(2008)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잔인한 한 깡패와 한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야 했고 그 가족이 원수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 아는 것이 없지만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자신은 바람피우면서도 여동생과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업고 뛰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죽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게 잘해주려 하는데 오히려 어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오해받고 박해받는 여주인공.
그러나 잔인하고 안 됐지만, 이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하느님이 싫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하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선물을 주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선물이 싫으면 주는 사람도 싫은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 부모에 대한 용서와 감사를 찾아내지 못하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바리사이 시몬은 먼저 자신의 집에서 이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용기 있게 찾아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준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찾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아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서 감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에게 고문하는 이들에게도 감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는 도구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먼저 감사를 찾아내려 노력할 때, 그런 선물을 주신 주님께 더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감사로 가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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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 24 주간 목요일. 한상우 신부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눈물로
용서와 사랑을
배우게 된다.
먼저
나자신을
들여다본다.
용서의 열매는
쓰라린 사랑의
열매이다.
아픈 용서가
참된 사랑이다.
아프지 않는
사랑과 용서는
없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없듯이
죽을만큼 아파야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게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용서의 삶이다.
예수님의
용서로
죄많은 우리가
아름다워진다.
용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가장 가치있는
사랑이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사랑이 용서이다.
향유같이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깨뜨려져야
가장 향기로운
사랑이 된다.
용서의 향유는
아프기에
모두를
향기롭게 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용서는
죄의 치유이며
관계의 치유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용서와 사랑이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용서에 빚진
죄인임을
깨닫는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
사랑의 열매는
용서의 여정을
거친 가장 향기로운
눈물의 열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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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 24 주간 목요일. 이영근 신부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이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영광을 입습니다. 죄 많은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앞쪽에 나서지도 못하고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간직한 가장 고귀한 머리카락으로 땅에 붙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발에 당신 입을 맞추고 그 발에 자신의 전부를 쪼개어 부수고 깨뜨려 그 발에 붙고 발라드렸습니다. 하여, 그 옥함의 사랑의 향기는 온 집안, 온 고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이 ‘죄 많은 여인’을 교회에 비유합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 말고는 누구도 그런 향유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교회가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루가복음 해설)
이러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름다움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향기를 뿜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죄 많은 여인’(교회)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 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죄 많은 여인’인 교회는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는데 아직 내가 그 사랑을 보지 못함은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일입니다. 내내 토록 찬미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그 향 되어 날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향기가 되어 세상에 뿜으시길 바랍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의 불순한 입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깨뜨려 형제들의 발에 입 맞추는 사랑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주님!
제 영혼의 막힌 코를 뚫으소서!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듯
제 온몸에 쏟아지는 숨 가쁜 당신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저를 부수어 진한 향기의 피가 흐르게 하고
부서질수록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온 집안에 베인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를 내내 토록 찬미하게 하소서.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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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7. 연중 제 24 주간 목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의 주제는 그리스도 죄 때문에 돌아가심 묻히셨고, 부활하심과 나타나심 과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 나시어 열 두 사도들,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고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 죄인이어도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는다. 고 하였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나도 전해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코린 15,3-10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거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을 알 터인데.'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어떤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채권자는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들 더 사랑하겠느냐?" 물었다.
시몬이 "더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 줄곧 내 발에 입을 마추었다. ..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카 7,37-50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진정한 회개로 온전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죄인이었던 여자의 진정한 회개의 행위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있으며, 발에 입을 마추고,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진정한 회개의 행위와 사랑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셨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그 행위는 큰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진정한 행위의 회개를 통해서 큰 사랑을 드러낸 사람은 그의 죄를 탕감받고 용서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진정한 회개로서 큰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주님 앞에 드리는 온전한 회개의 행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을 아는 제자는 행위의 회개를 통해서 주님께 큰 사랑을 드립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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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7일 목요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_이흔관 사도요한 신부 집전
https://youtu.be/Iidi_v8qG3c (32:28)
•2020. 9. 17.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이흔관 사도요한 신부 (예수회) 집전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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