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의 성씨』 구성안(52회 영산, 영월 신辛씨) ▬▬▬
우리나라에서 마흔두 번째로 큰 성씨가 ‘매울 신辛’ 자를 성으로 쓰는 신辛씨는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19만 2천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이 신辛씨로는 영산靈山 신씨와 영월寧越 신씨가 있는데 두 성씨 모두 한 형제이다. 본관만 달리 쓸 뿐 시조도 동일한 분을 모시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경 이전에도 신辛씨가 등장한다. 신라 경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온 신시랑辛侍郞이다. 그는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이 땅에 정착한 인물이다. 하지만, 신시랑辛侍郞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어 고려 때의 인물인 신경辛鏡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영산⦁영월 신씨는 시조의 9세손 때 영산과 영월로 본관이 나누어진다. 영산靈山 신씨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을 본관으로 하고 영월寧越 신씨는 강원도 영월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계파는 크게 다섯 파가 있다. 시조의 8세손인 신지화의 아들 4형제에서 덕재공파⦁초당공파⦁부원군파⦁판서공파가 나오고 5세 신주계辛周繼에서 갈라진 상장군공파가 있다. 이 다섯 파 중 덕재공파⦁초당공파⦁상장군공파는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영산 신씨라 하고 부원군파와 판서공파는 영월寧越을 본관으로 삼아 영월 신씨라 한다.
신유정⦁신인손⦁신석조 삼대가 있다. 신유정辛有定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그는 서기 1386년 우왕 12년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데, 용맹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1403년 태종 3년에는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쳐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가 된다. 이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와 의주도병마사를 거쳐 충청도병마도절제사와 평안도도안무사에 오른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신인손辛引孫은 태종과 세종 때의 인물이다. 140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는데 항상 여러 대군大君과 함께 경전과 사서를 강론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는다. 경상도 관찰사와 도승지를 거쳐 후에 형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는데 글씨에도 뛰어났다 한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신석조辛碩祖는 신인손의 아들이다. 그는 1426년 세종 8년,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에 등용된다. 그리고 이 해 19세의 나이로 권채⦁남수문과 함께 최초로 사가독서제에 선발되는 영예를 얻는다. 1456년 세조 2년 새해를 맞아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문장에 능하여 <세종실록> <경국대전> <의방유취> 등의 편찬에도 참여한다. 벼슬이 이조참판⦁대사헌에 이르고 1459년 한성부윤을 거쳐 개성유수로 있을 때 향년 53세로 생을 마친다. 시호 문희文僖이고 저서로 <연빙당집淵氷堂集>이 있다.
고려 말 풍운의 개혁가 신돈辛旽이 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나 경상도 영산현에 있던 옥천사에서 자란다. 후에 승려가 된 그는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왕의 사부가 되고 국정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어 1366년 공민왕 15년,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개혁정책을 단행한다. 귀족들이 불법으로 탈취한 땅과 노비를 원래 대로 돌려놓는 이 정책은 백성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이어 역모죄로 체포되어 개혁정책을 시행한 지 채 5년이 안된 1371년 유배지 수원에서 향년 49세로 생을 마친다.
조선 중기 인물로 신경진辛慶晉과 신경행辛景行이 있다. 신경진辛慶晉은 율곡 이이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문신이다. 그는 1584년 선조 17년, 31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병조좌랑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전쟁이 벌어졌고 그는 체찰사 류성룡의 종사관이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여 년간 큰 역할을 한다. 류성룡은 비록 동인의 영수였으나, 서인인 신경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항상 중책을 맡긴다.
이후, 강릉부사와 성주⦁충주목사를 거쳐 광해군 원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헌에 오른다. 후에 고향 황해도 배천에서 7년 동안 은거하다가 1619년 광해군 11년, 향년 66세로 생을 마친다.
신경행辛景行은 서기 1547년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에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던 그는 1577년 선조 10년, 31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1592년 한산군수가 되고 1596년에는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이 된다. 이때 호서의 토적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문무를 겸전한 그는 선봉에 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에 오르고 영성군에 봉해진 그는 이후 공주목사와 장흥부사⦁동부승지를 거쳐 1608년 선조 41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오른다. 하지만, 광해군 즉위 후 1611년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 낙향하여 향년 77세로 생을 마친다.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묘는 충청북도 증평에 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辛格浩 회장이 있다. 그는 1921년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평범한 농가의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 그는 양털깎기와 양돈 일을 뒤로 한 채 사업가로 성공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간다. 3년 뒤인 1944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는데 주경야독으로 와세다 대학 화학공학과를 다닐 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 본 일본인 하나미츠가 자신이 구상한 사업을 권하며 거금을 투자한다. 이에 신격호는 커팅오일과 윤활유를 제조하는 첫사업을 시작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면서 사업은 실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고 1946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솥단지 하나로 비누 공장을 차려 재기에 도전하는데 이번에는 큰 공장을 차릴 정도로 대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새로 만든 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48년 주식회사 롯데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롯데는 사업을 확장하여 롯데 그룹으로 성장하고 일본의 10대 재벌이 된다. 1966년에는 모국인 대한민국에도 사업을 확장하여 2016년 서울 송파구에 롯데월드타워를 세우기에 이른다. 롯데월드타워는 지상 123층, 높이 554.5m로 국내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마천루이다.
이외, 영산⦁영월 신씨 인물로는 고려 말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운 신렴辛廉⦁신부辛富⦁신순辛珣, 전공판서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낙향하여 절의 지킨 신사천辛斯薦을 비롯하여 조선 전기 김종직의 제자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직산에 내려가 죽림의 학자들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한 신영희辛永禧와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변절자 공호겸孔好謙을 생포하여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된 신초辛礎, 조선 후기 문신으로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146명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인 600여 명을 데리고 온 신계영辛啓榮 등이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데 독립운동에 헌신한 신동욱辛東旭과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활약한 신공제辛公濟를 비롯하여 3·1운동 당시 경남 창녕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신영락辛泳洛과 신암우辛岩宇, 1919년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신강면辛康勉과 경상남도 거제 출신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신용기辛容祺 등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정계에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과 신정훈 22대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신기하⦁신기남과 신경식⦁신경민 전 국회의원 등이 있고
신학용 전 국회의원 신민선 전 국회의원 신장열 전 울산광역시 울주군 군수
법조계에는 신광옥 전 법무부 차관과 신종대 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신진욱 변호사 등이 있다. 교육계에는 신용태 전 계명대학교 부총장과 신순기 전 동아대학교 부총장을 비롯하여 신홍기 전 한양대학교 교수, 신민교 전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등이 있고 문화계에는 시인 신석정과 원로 서예가 신용옥辛容玉을 비롯하여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신봉승辛奉承, 전 부산MBC 사장인 신건식 등이 있으며 연예계에는 배우 신애라辛愛羅와 신예은辛叡恩을 비롯하여 가수 신형원辛炯琬⦁신미래와 트로트 가수 신정화?⦁신인선辛仁善 등이 있다. 또, 신재식 예비역 육군중장과 신상대 예비역 해군소장, 신민승 부산 일신여객 사장과 축구선수 신영록辛泳錄도 모두 영산⦁영월 신씨이다.
신辛씨는 중국 하나라 우임금의 성인 사姒씨 성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하나라 제2대 계왕의 차남인 진鎭이 분봉할 때 성을 신莘으로 사성받으면서 신씨의 역사가 시작된다. 뒤에 후손들이 신莘 자의 초艸 변을 제거하면서 신辛씨가 탄생하게 된다.
資料 : 靈山, 寧越 辛氏大宗會 2024年 6月 事務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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