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이라는 말에 앞서 쓰였던 말은 하늘이 주는 복과 사람이 베푸는 덕을 함께 나누는 곳을 의미했던 복덕방(福德房)이었다. 복덕방 주인은 집 자체에 대한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풍수지리와 동네사정 그리고 집안내력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을 우리말로는 집주름, 한자로는 객주(客主) 또는 가쾌라 불렀는데, 집주름은 집에 얽힌 지복(地福)과 천복(天福) 그리고 인덕(人德)의 내용을 주름잡던 사람이었다. 1890년 〈객주거간규칙(客主居間規則)〉이 제정되었는데, 이 집주름들이 모여 사무실을 차린 것이 바로 복덕방이었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경제적-건축적-위생적 관점에서 집을 보는 서양인들의 풍습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또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에 밀려 들어와 고급 주택을 사들이거나 지방의 부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살 집을 찾거나 상경한 유학생들이 하숙집을 찾거나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리들의 집 보는 관점이 자본주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게다가 대한제국은 한성보신사를 설립하여(1901년) 조세관료들의 집을 저당 잡고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횡령한 세금을 갚게 했다. 이로써 우리는 집이나 땅에서 복이나 덕을 구하려 하는 대신 지배욕과 경제성을 찾기 시작했다.
1961년 9월에 제정된 〈소개영업법〉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소개영업취체(紹介營業取締)에 관한 법령〉을 대체한 것으로 집과 땅의 거래를 자유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법이 만들어짐에 따라 서울뿐 아니라 전국 대도시와 근교의 논밭과 임야 그리고 단독주택과 공업단지 등이 상업적으로 활발히 거래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 주도의 각종 건설계획이 시행되고, 경제가 급속히 성장함으로써 부동산 가격도 급등하게 되었다. 복덕방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힘입어 일부는 주식회사로 발전해 갔고, 또 일부는 ‘복부인’과 함께 부동산 투기의 주범이 되었다. 복덕방이 점점 보다 심각한 경제-사회적 문제를 낳자 정부는 복덕방 영업을 정비하고 규제하기 위해 1984년 4월 〈부동산중개업법〉을 만들었다. 이로써 복덕방은 사라지고 부동산이 이 땅에 자리를 잡았다.
독자 구연상 /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 ≪부동산 아리랑(채륜, 2011)≫
첫댓글 네..복덕방은 사라지고 없네요...새롭게 배워갑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