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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몰이
조에 부스케(1897~1950)
「1897년 프랑스 나르본에서 태어나 1950년 카르카손에서 사망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6년 자원입대했다. 1918년 5월 27일 바이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발포한 탄환에 척추를 관통당해 하반신 불구가 된 그는 남은 생을 카르카손의 자택 침실에서 보냈다. 병상에서 폴 엘뤼아르, 막스 에른스트, 장 폴랑, 루이 아라공, 르네 마그리트, 시몬 베유 그리고 갈리마르 가의 사람들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28년 <작업장>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바람의 약혼녀>(1928), <정말 어두워선 안 된다>(1932)등의 시집과 소설 <어느 겨울 저녁의 랑데부>를 발표했다. 1940년 잡지 <남쪽의 노트들>을 창간하고, <침묵에서 번역된>(1941), <저녁의 인식>(1945), <달몰이>(1946)를 발표했다. 」
제1부 내 그림자 곁에서
[1]
스무 살에, 나는 포탄을 맞았다. 내 몸은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는 우선은 내 몸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내 불구가 현실이 되면서, 나는 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상처받은 나는 이미 내 상처가 되어 있었다. 살덩이로 나는 살아남았다. 살덩이는 내 욕망들의 수치였다.
나라는 존재는 절단으로 이미 축소되었는데, 날 죽여야겠다는 결심은 추억처럼 되살아났다. 불행이 제아무리 많아도 불행을 느낄 감각조차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다.
나는 여자처럼 살았다. 정신을 잉태했고, 정신을 내 감각들로 젖 먹이었다. 나를 망가뜨린 사건을 부조로 모두 새기는 데 수년이 필요했다. 그 순간은 두 문 사이에 끼여 있다. 날 경색시켜 고통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시간, 모든 것이 날 떠났다.
내 정신적 폐허는 깊고도 깊다. 내 의식은 내 위대한 불운에 맞먹는다. 그들은 생명을 무릅쓰고 나를 전장에서 빼냈다. 내가 누워 있는 텐트 천의 가장자리를 잡고, 침착하고 재치 있게 땅의 기복을 이용하였다. 눈빛을 교환하며 잎이 우거진 곳 밑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화염에서 이송되어 온 내가 충격에 정신을 잃지 않도록 그들은 온 정성을 다했다. 나는 내 죽은 장화를 보았다. 내 몸은 나와 함께 있었으나 죽은 개였다.
[2]
사람들이 내 불운을 곰곰이 생각하며 상상하게 될 자와 그 어떤 것에서도 다르지 않기. 육체적 추락을 했어도 그 인간에게서 결코 뽑아갈 수 없었던 것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매일 아침 불안에 잠을 깬 나는 난파당한 자의 공포를 느꼈다. 매일 찾아오는 시련이 나 태어난 그 흐릿한 날을 되불러 냈다. 간호사가 나를 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의식이 깨어나면서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 아들이잖아!”
일 년 후 방 청소하는 하녀가 덫에 걸린 나를 발견했는데, 나는 그때, 갑작스레 죽은 유모의 팔에 안겨 놀고 있었다. 내가 겪은 이 모든 것이 실존이라는 개념을 던진다.
[3]
나는 폐허가 된 마을의 바람 속에서 거대한 문을 다시 보았다. 한 생의 구원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그 단 하나의 상, 나는 한껏 높아진 푸른 여름 하늘을 다시 보았다. 나는 추위 아래 떨던 겨울 풍경이었다. 겨울 시냇물에 죽은 새들이 떠내려 왔다. 나는 감옥이었다. 나는 고독이었다. 그러나 희망이기도 했다. 나는 고통이었으므로.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가 잡고 있는 것은 나의 내해. 나는 하루하루에서 내 삶을 찾지 않는다. 삶은 날들 이전에 있으며, 삶은 사실들을 어떻게 잊느냐에 따라 드러난다. 사실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한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꿈에 열려 있는 삶이 아니라, 나에게 닫혀 있는 삶에 예속되기를 원하였다.
장교는 주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에게 모르핀을 놓으려는 거였다. 마치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갈 것처럼 그들은 신중했다. 젊은 아가씨의 머릿수건에는 십자가 핀이 꽂혀 있었다.
기이한 공포에 나는 눈을 떴다. 벌 하나가 내 이마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내가 누워 있던 좁은 텐트 천이 서서히 밝아졌다. 벌을 아무리 쫓으려 해도 쫓아지지 않았다.
나는 어린 시절 모든 여름을 마르세앙의 수도원에서 보냈다. 수도원 건물은 네모 탑 하나에 이어져 있었다. 다 허물어진 폐허에서 탑만 홀로 살아남았다. 떡갈나무와 소나무 가지들이 수도원 건물 위층의 늘 닫혀 있던 덧창들을 건들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연장된 건물 벽들이 정원을 에워싸고 있어, 수도원 건물 입구가 숲의 정문이 되어 있었다. 우리 작가들의 열망은 사물들 속에 묻혀 있는 아름다움을 예감하는 것이다. 시 작품이 시의 속성이 아니다. 시는 영혼 속의 지평선이다. 죽음에 와서야 흡입하게 될 것들을 미리 보는 일이다. 작품이라는 닫힌 화병 속에다 아름다움을 결정시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표명된 모든 시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사물의 미가 우리에게 시적 의식을 만들어주도록 도와야 한다.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면 나는 슬프지 않다. 별들로 뒤덮인 하늘처럼 어둠은 내 추억들로 빛나기 때문이다. 내가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내 사랑스러운 순간들은 내게 현존할 테고, 햇살처럼 빛날 테니까. 멀어지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계속해서 살기. 그건 우리 안에서 무한한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미리 느끼는 슬픔은 경계 심한 불빛들로 타오른다. 얼굴 속, 눈의 푸른 광선이 우릴 붙잡는다. 사랑스러운 밤은 바다 빛들이다.
[4]
인간은 환영이다. 현실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는 행동 속에서다. 현실에 있는 살덩어리는 정작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작품은 존재의 파편이며, 존재는 환영에 불과하다. 실재를 모방하지 말라. 실재와 협력해라. 너의 생각과 너의 표현 능력을 날들과 그 날들을 분간케 하는 사실들에 도움이 되도록 써라. 너를 사물들이 존재하도록 써라. 만일 사물들이 널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넌 아무것도 아니다.
[5]
공중의 지하 감옥. 긴 행로 후 두꺼운 벽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그가 누구와 경계를 공유하는 방은 하나도 없다. 그를 어디서 찾을지 안다고 해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 사는 자는 허수아비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사지는 다른 집에 익숙해 있다. 그의 집은 영묘 이외에는 없다. 매우 아름다운. 다 벗은 빈 방. 뚜렷이 보이지 않는 벽들 사이에 그는 갇혀 있다.
이 방의 특징이라면 거기 도사리고 있는 발언들의 점잖음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만남들은 완벽히 도덕적인 태도를 띤다. 하지만 여기서 만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자유로운 의식 속에서 사회적 절제는 전적으로 부재한다.
얼음처럼 차가운 날들이다. 나는 아침부터 방을 완전히 밀폐하듯 덧창을 내렸다. 지붕 위에 쌓인 눈도, 굴뚝 위에 다시 파래진 하늘도 보고 싶지 않다. 예감을 했는데도 위축이 되어 숄로 몸을 감쌌다. 손가락들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나 눈에 띄는 모든 것이 나를 춥게 만들었다. 그림자에는 이미 피가 비쳐 있다. 새벽 2시 나는 침대 머리맡 램프를 껐다. 반쯤의 어둠에 틀어박혀 나는 더 뜨겁고, 더 사실적으로 보이는 불을 바라본다. 두 여자가 복도에서 활기차게 말을 한다. 그 싱싱한 목소리에서 웃음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그녀를 나에게 소개할 때 보니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몇 년 전에도 보았다. 젊고 쾌활했던 여자였다. 오늘 저녁은 어두운 외투로 몸을 싸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밤으로 가득 찼다.
당신은 색들 한가운데 살고 계시는군요. 그녀가 내 그림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땅 밑에 있는 색들요. 한데 이마에 매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나요? 아니요 제법 갔어요. 우리 식구가 역까지 같이 가주었어요. 식구들 몰래 혼자 떠난 적도 있는데, 기차는 날 싣지 않고 그냥 가더군요.
[6]
계단에서 들리는 목소리에도,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도, 문을 흔드는 주먹에도, 시각을 알리는 열세 번의 타종에도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낡은 저택의 w마을 봉인하려는 듯, 두 젊은 커풀이 두 번의 춤 사이에 동백과 장미를, 야회의 향기와 궁기를 내게 가져왔다. 미뉴에트를 추는 그들의 이름을 나는 들었다. 나는 그들의 미소에 미소 짓는다.
짧은 치마를 입은 처녀가 야회 드레스들 사이를 지나더니 내 침대 가장자리에 와서 슬그머니 앉는다. 나를 바라본다. 머리를 기울이고, 검은 머리에 박힌 루비 십자가를 내게 보여주고 싶었나. 그녀를 누가 소개해주지 않았다. 아마, 모르는 여자는 다른 남자가 소개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나보다.
이 처녀를 보는 것은 나뿐이다. 난ㄴ 이젠 눈이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ㄴ느다. 그녀만 듣는다. 나는 난파선의 잔해 같으나 심해로 곤두박이치고 싶지 않다. 파도 마루에서, 이제는 없는 배의 실루엣을 끊임없이 그려대는 난파선의 잔해이고 싶다. 한순간 내게서 빼내간 모든 것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내게서 천천히 다시 빼내가야 한다.
이 새로 온 이를 누가 알겠는가? 그 눈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것을 맞출 텐가? 그녀는 나를 눈으로 훑은 후 이제 제 얼굴을 들이대며 나를 바라본다.
5월의 밤들은 흙내음을, 벌어지는 꽃내음을 맡았다. 단어들은 투명하다. 창백하다. 목소리는 흐린 빛과 함께 흐른다. 이 젊은 여인은 누구인가? 나는 그녀가 붉어지는 것을 본다. 그녀의 이름이 블랑슈라는 말을 듣는다. 삶이 꼭 겪어지라고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거기 그녀가 우릴 본다. 거기 그녀가 있다.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 예감된다. 밤의 어둠에 먹히어 꿈처럼 부풀어 올랐을 그녀.
[7]
나는 외부적 사건을 찾았다. 그 사건들 속에 내 모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삶은 이런 사건들에 포획되어 있으며 그것은 지평선이고, 모험이다. 우선은 가장 단순한 사건들을 살필 테지만, 하나는 나에게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내 영혼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 태양은 뜨고, 밤은 끝난다. 한 여자의 낙담, 받아주지 않을 내 문 앞에 서 있는 여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하루의 추억처럼 그 이름은 나에게 닿기도 전에 길을 잃는다. 내가 여러분에게 고백하는 사실은 내 삶의 손 안에 있지 않다. 그 사실이 내 삶을 제 손안에 들고 있다. 혼자서 제가 다다. 그리고 그게 나다.
나는 한참을 아주 짧은 곡조를 찾아 헤맸다. 살롱 그늘에 있던 한 피아노의 줄 위에 얻어터진 채 있는 나를 상상한다. 그 다음, 하계를 표현한 한 사진을 보다 눈을 돌려 바다처럼 한계가 지어진 곳을 상상한다.
이 투명하고 자유로운 주름 속에서 모든 바다가 넘실대며 웃는다. 어린아이 손안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작은 피조물처럼, 나는 이 빛나는 음들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팔랑거리는 나비를 본다. 내가 자신에 도취되어 헛것을 본 건지 나비가 내게 날아온 그 세계에 내가 정말 가까이 다가간 건지 잘 모르겠다.
한 남자를 병신으로 만든 사고가 그 자의 근본까지 건드리지는 않는다. 하던 대로 하지 못하니까 치명적일 뿐이다. 육체적 불운은 엄연히 부패하게 될 것만 부패시킨다. 이렇게 불구가 되어 침대에 던져진 이후 내 삶이 너를 향해 드디어 오는 것을 보았지? 내가 당한 사고 그 이상으로 내가 무엇을 더 구현하겠어? 나는 재앙의 무대 위에 올려 진 십자가가 되었어. 불구가 되기 전에는 넌 네 인생이 없었어. 삶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삶의 사랑을 받는다고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 아닌가? 여자한테 집착하는 것도 여자가 나를 잃으면 죽고 싶어 할 것이라고 믿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나는 삶을 내 허상으로 사랑했다.
[8]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침묵으로 뒤덮였고, 그림자의 진행도 빨라졌다. 나는 잃어버린 거울을 다시 보았다 대지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던 안개를 다시 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시냇물은 커다란 은빛 소리를 내며 꽃 무더기를 휩쓸어갔다. 흔들리는 그녀의 푸른 눈빛 속에 이슬 같은 금발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그림자는 또 다른 여인이었다. 나는 그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말들은 낯선 노래였다. 수의(壽衣)였다. 그녀는 저쪽에서 창백한, 벗은 몸으로 나에게 웃음 지었다. 우윳빛 거울에 비친 하늘의 이미지 같았다.
겨울 해저물녘 마지막 햇살들이 살처럼 차갑고 창백한 공기의 움직임 위로 일렁이는 백합들처럼 일어났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건물 외벽 종려나무의 커다란 이파리들이 흔들렸고, 램프 불빛이 살짝 흔들렸다. 혼자인 나는 추웠고, 정적이 나를 짓눌렀다. 램프 불빛에도 내 방은 어둑한데, 아침부터 파리에서 도착한 관목의 시커먼 잎새들이 가만히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 두 물살 사이에서 색이 피어나는 것만 같은 식물을 보고 있으니 나에게 나무를 보내준 그 여자에게 너무나 서툴게 인사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괜히 울적했다.
[9]
환영. 그는 당초부터 환영이다. 그의 삶이 그에게 이 진실을 그려줄 것이다. 이 부정적 존재를 부인하는 사실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실재가 된다. 슬픔에 밀려 극장 맨 뒷좌석에 앉아 있던 그가 나를 보았다. 거의 다 외워버린 그 극에서 미친 왕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나를 말이다.
입구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을까? 내 연기가 만족스럽지 못해 나는 거짓된 갈채를 피했다. 내 명성을 만들어낸 오해들이 더욱 가증스러웠다. 그가 나를 부른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10]
정신적 길에서 나는 한 발을 크게 내디뎠다. 고통에 매혹되고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고통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더 이상 자신을 비난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제 그만 사악해지자 마음먹을 수 있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다.
[12]
도를 넘은 사랑, 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모델 같은 잡스러움 없는 고독, 자기 생긴 대로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너무나 달콤한 무책임의 세계 속으로 놀라지 말고 들어가라.
제2부 어둠 속의 벌
[1]
내가 영국으로 떠날 때 부모님은 아브르까지 배웅 나오셨다. 카페 테라스에 우리 셋은 앉아 있었고, 한 순회 악사가 만돌린을 문지르고 있었다. 악사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움직였으나 노래를 하지도 않았고 연주를 하지도 않았다. 나만, 바로 옆에 있는 나만 그것을 눈치 챘다. 차도 위를 구르는 차들에서 슬픈 가락이 울려 퍼졌다. 손님들은 고개를 숙이고 마치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이 꿈이라도 되듯 넋을 잃고 듣고 있었다. 악사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옆자리를 뜨기 전 나를 보고 웃었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다니며 손을 내밀던 그는 내가 멀리서 돈을 보여주자 고개를 저었다. . 그리고 붐비는 네거리 속으로 사라지기 전, 내 쪽으로 악기를 들어 흔들었다. 마치 그 악기를 내게 선사하겠다는 듯이, 아니 자기 악기를 가져갈 테면 가져가보라는 듯이.
내가 살았던 사우샘프턴 빌라는 조림 지구에 세워져 있다. 도시는 바다와 한참 떨어져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차를 타고 종점 바로 못 미처 정거장에서 내려 긴 도로를 한참 걸어야 했다. 도로 바로 옆은 곧 건물들이 들어설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전차에는 나 혼자, 아니 거의 운전수와 나만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 아무도 내리지 않는 곳을 가기 위해 그가 계속해서 봉사를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특이한 장소는 나를 매혹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흥미를 끌었다. 전차에 달린 번쩍이는 게시판에서 Holy rood라는 정거장 이름을 읽었는데 아는 건 형용사뿐이었지만 이상하게 영어 단어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해도 좋았다. 지난 주 내가 리처드Ⅲ를 읽을 때도 그랬다. 마지막 전차를 타고 한참을 걸어 집에 돌아오는 밤, 길을 걸으며 거리에 작별인사를 하듯 길 이름을 중얼거렸고 매일 아침 그 길을 탐사하겠다고 헛되이 다짐했다. 그 신비한 이름은 내 안에 깊이 울려 퍼지더니 거리를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홀리루드. 성 십자가.
키 크고 가녀린. 그러나 배는 볼록 튀어나온 주인아줌마 조하니퍼 부인은 붉게 물든 것 같은, 아니 분가루 뿌려진 것 같은 얼굴에 무사마귀가 많았고 나팔꽃처럼 꽉 다물린 입술에는 늘 작은 미소가 봉긋했다.
매일 아침 그녀 위로 살짝 일찍, 살짝 더 찬란한 여름 햇살이 떠올랐다. 부인은 내가 먹고 자기 위해서만 집에 돌아온다고 다정하게 날 나무랐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식사가 식탁에 정성스레 차려 있었다. 음식은 식었지만 식탁 위에는 어디서나 보곤 하던 분홍빛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 뒤로는 활 모양의 내닫이창이 나 있었다. 내가 그 집에 체류하는 내내 램프는 새벽 전에는 꺼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아, 이제 프랑스로 돌아가는군요. 오, 조에. 하이필드 크레센트의 부엉이들과 박쥐들이 너무 슬퍼하겠어요.” 이어 부인은 내 떠남에 대해 친절하게 책망했고 옆 빌라에 내가 좋아할 만한 젊은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은데 만나보지도 않고 영국을 떠나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이따금 나는 꿈속에서 완전하게 탐사하지 못한 영국 도시로 들어갔다. 골목길이 나타났고 처음 본 집들에 이끌려 하염없이 들어갔다. 헌데 조금 있다 보면 마치 내가 이미 그 집들을 알기라도 하듯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낯설지만 환대하는 거리의 포석 사이로 풀이 빠져나와 있다.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면 나는 풀이 내게 감추고 있는 장소들을 묘사할 수 있다. 깨어나면 꿈은 반쯤 지워지지만 그 부드러움은 남고 내 삶은 오로지 노력의 대가로서만 찾아진다. 마치 내가 내 집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내 가슴속에 내 잠든 꿈의 무게를 놓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목소리 없는 음악가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영국에서의 내 체류를 이야기한다. 내가 보는 것들을 가지고 말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보는 것에서는 침묵이 삶이다.
내가 조금씩 쓰게 될 것이 꿈결의 언어 같기를, 그러다 우릴 깨우는.
감은 눈이 포착한 것만을 우리는 읽는다.
생각은 그 생각으로써 내가 환각에 빠질 수 있을 때만 진실이다.
하늘의 새, 내 그림자 아래 그 깃털은 불의 색을 띤다. 그 아래 폐허가 된 도시는 깨진 유리와 날 선 쇠붙이들로 둘러싸여 있다. 몸을 어찌할 바 모르는 새는 노래를 하고, 태양을 향해 비상한다. 제 그림자를 떠난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나의 사유일 수 없는 것은 이미지이거나 거의 내 존재의 전조로 보인다.
고원 한가운데 성벽 빛깔 풀 아래 샘 하나가 이 흔들리는 식탁보에 물을 댄다. 나는 성토(盛土)가 헐리고 물이 나무 아래로 바람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투명한 물은 하늘만큼이나 고요하다. 그 잔물결은 속눈썹 달린 거울이다. 내가 그 유사함을 느낀 건 내가 온통 자유의 순간일 때다.
해거름, 관목들 속 호랑가시나무는 무겁고 붉은 야생 열매를 달고 있는데, 사과알 만한 크기에 저 높은 곳 음영 속 둥근 열매는 아직도 파랗고 새들의 주둥이가 닿기에는 높기도 하다. 그것은 여왕들의 식물.
내 손가락은 물 진주들과 장난을 치고, 건들땐 너무 부드러워 인상을 쓰며 잠에서 깨어난다. 꿈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피부가 따끔거린다. 자지 않으면서 자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꿈속에서 누가 내게 준 흰 포도알에는 수수께끼 문구로 장식된 접시 위에서 내가 보았던 검은 사향포도 송이의 그 미묘한 맛은 없었다.
조금 전 가슴 위에 큼직한 하양 염소가 올라 앉아 있는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그 짐승의 자리에 올리브 열매들처럼 붉고, 굵은, 물 많은 열매 피라미드 더미가 올라 앉아 있는 것 같더니 소나무 바늘들이 찌르르 내려오면서 땅위를 굴러간다.
[2]
서로를 알기 위해서 10년, 서로에게 속기 위해서 10년, 원통한 20년. 마침내 당신은 당신을 밝혀줄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당신에게 말했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린다는 건 그 진실의 반은 가리고 알리는 거지.”
-세 개의 거울
손 하나가 나타나 내 덧창을 연다. 겨울의 긴 태양이 들어와 램프들 빛을 벗겨내고 벽에 걸린 옛 그림에 제 색을 입힌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이 그림을 잘 모른다. 붉고, 푸르고, 부챗살 주름 드레스를 입은 하얀 살결의 여인들. 그림은 높은 천장의 어두운 방 벽에 걸려 있고 액자틀에 그림자가 달려 있다. 이 실내는 약간 가울어진 거울 속으로 보는 방 같다.
[3]
솔직하게 말하고 싶을 때. 인간들은 자신이 하는 말에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일을 첨가하였다. 그들이 그들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백했다. 거기서 얻을 진실은 많이 없다. 인간의 실존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능력에 의해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인간이 하는 생각은 생산된 창조물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보완에 불과하다. 과거처럼 현재에도 생각은 외양의 물을 뺀다. 언어 때문에 그것을 미리 실현한다.
그 이튿날 나는 깊이 생각하며 전율했다. 내 몸과 나는 한갓 흙 부스러기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은혜로운 것이라는데, 내 부서진 몸 앞에서 삶은 벽에 불과하다. 그 어떤 것도 의미에 날개를 달아주지 않는다. 내 몸에서는 어떤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내 안에서는 시작되지 않는다. 내가 증명하게 될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에서 시작되어 더 순수한 것을 띤 것 위로 비상한다. 삶은 삶이라는 고유의 이름이다. 하지만 내 생각 속에서는 삶은 환영일 뿐이며 내 고통 속에서, 내 사랑 속에서만 삶은 삶이 된다. 그걸 누가 알까?
[4]
난폭하고, 걸핏하면 싸우기 좋아하는 그는 자신을 잘 안다. 그러면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것 같다. 훔치고, 목을 조르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게 온갖 수를 짜내야 했을 것이다.
[5]
내 삶이 사랑의 짐이 될 때, 내 삶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을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내 행복은 그 사건들에 비해 낯설다. 내 심장 속에 들어가는 데 그 사건들이 쓰였다. 나는 이런 시련을 겪어내지 않았다. 나 없이는 이런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 시련 자체다. 나는 내 인간적 허약함으로 내 시련을 강화했다.
방구석, 그늘 속, 전구 불빛이 채 닿지 않는 곳에 큰 거울이 서 있다. 빛으로 번들거리는 거울 속에서 나는 가구들과 옆방에 놓인 꽃다발을 본다. 사랑의 블랑슈가 옷을 벗으며 왔다 갔다 한다. 살아 있는 밝은 빛, 시선이 모두 몰리는, 소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녀가 밝히고 다니는 그림자. 이 침묵 속에서 보니 더욱 아름답고, 눈으로는 지켜지지 않는 얼굴, 일종의 우월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6]
내일 또 전쟁. 황량한 공포. 알려지지 않은 형상 아래 재앙을 다시 보는 두려움. 나, 상처투성이로 되돌아온 그날 그곳 재앙. 나는 강물들의 밤 노래는 더는 참지 못했다. 노래는 행복한 세계의 소리가 되기를 멈추었다. 바람마저 오늘 저녁은 신음하는 나무들에게만 말을 건다. 숨 쉬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부여하기 원한다. 숨 쉬지 않는 것의 삶에 동화되기를 원한다.
나는 내 정신적 건강을 다음과 같은 신념 위에 세웠다. 내 주변에서 보는 것들이 행복의 보증이라는 신념. 이런 감정들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내 삶을 거기서 길어내고 있는 나에게조차. 나도 모르는 새, 내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기쁨 속에서 나는 흥취 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내 피가 획득한 것이다. 나는 의식의 몫이었고 어떤 것의 의인화된 동의였다. 그것이 생이 준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자유의 경험을 소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강할 수 없었던 열락.
[7]
넌 너무나 미래와 행운을 추정하였지. 너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시간은 출발 즉시 죽었어. 그리고 넌, 널 따라오던 그림자들의 힘에 휘말려 넘어졌어. 하지만 예상치 않았던 구조로 넌 살아났고 네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네 힘으로 되살아났지. 널 구할 수 있는 것은 너 자신뿐이기 때문에 모든 게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의 사실이 대열에서 나왔다. 너는 마치 그 사실보다 덜 살아 있나 싶어 덜덜 떤다. 너의 모든 존재가 널 판단하기 위해 하나의 사건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걸 받아들이는 대신 네 인생을 창조하는 기회는 없을까? 넌 네 승리로 고통 받고, 네 오만으로 분발하여 부족한 날들을 따라 거닐라. 하지만 너는 무엇이냐? 아니면 넌 무엇을 떠났느냐? 네 고통은 네 뒤로 넘어 떨어지지 않았느냐?
자기 사는 것을 들여다보는 여자들은 도청 소재지를 떠났다. 달에 대해 약간 오만한 여자들은 피부를 태양에 드러내며 높은 산으로, 해변으로 갔다. 나는 여름의 불타는 황금빛 우유를 마신다. 푸른 찬기가 지배하는 내 방. 나는 여름 가장 더운 달들의 맥 속에 숨어 있다.
[8]
내가 기침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내 방에 그녀가 잘 때 쓰던 어린이 침대를 옮겨다놓게 했다. 그녀는 커다란 푸른 두 눈이었으나 그림자는 그 푸른빛을 지우고 두 큰 검은 꽃을 피게 했다.
[10]
기근과 공포를 매장했다. 소총을 파냈다. 기관총 차량 사이를 다녔다. 아주 작은 손 하나가 사기 포탄 속에 네 개의 글라디올러스를 심었고, 포탄 입구로 내가 이해하지 못한 신호를 보냈다. 첫날 저녁, 분홍 글라디올러스는 꽃잎을 벌렸고 보이지 않는 가면 사이로 나를 폴리치넬라 인형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양 글라디올러스가 투구에 씌워져 있었고 내게는 꼭대기 장식만 나타났다. 그림의 검은 바탕 쪽으로 몸을 숙인 두 붉은 글라디올러스, 하나는 전선에서 낚시를 하고, 다른 하나는 가는 고사리 이파리 사이로 그늘 속에 숨어 잇는 한 중국인을 지켜본다.
대략 자정이다. 내 벌어진 입술과 노트들 한 더미 속에서 놀라 나는 잠이 깼다. 이 기이한 잠에 소스라치듯 놀라 나는 내 주변으로 눈을 던졌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현존처럼 공간을 짓누르는 불안을 흔들어 재우지 못했다. 곤두선, 긴장 된, 밤,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마치 나를 짓눌렀던 침묵이 낯선 세계 t고에서 생긴 듯, 불가해하게 우박이 쏟아지는 것도 같고, 베일에 가린 듯도 햇다. 나는 내 인상을 번역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들은 말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혹은 나 스스로 입 다물기 원했는지도, 그 생각들이 목소리를 띠면서 날 두 번째로 그 잠 속으로 침잠시킬까봐, 나를 가두고 잇던 고요는 죽음의 고요와 나무 흡사해 끔찍하게도 느리면서도 불쑥 스치듯 튀며 거셌다.
[11]
나의 간호사는 나를 옷 입혔다. 나는 방 거울 속의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았다. 머리통은 벗겨져 있고, 머리카락은 귀를 덮고 길게 늘어져 내 얼굴은 더욱 수척해 보였다. 내가 수도승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또 어릿광대로도 보인다. 분을 듬뿍 바른 하양 벌이 내 이마 위에 키스를 하며 그 애매함을 없애버린다.
불운이라 생각해요? 한 친구가 내게 묻는다. 나는 이 불행을 배우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내 영혼에 그것을 바라는 것처럼 보여서요. 나는 내 최선의 세계를 계속해서 건설하고 있어요. 폐허 자체인 세계를 희망하는 일이죠.
나는 내 존재에 허우적대느라 빌린 것으로만 사는 자다. 내 죽음을 기다리며 힘들게 살아가도록 선고된 자다. 현기증이 난다. 한순간 나를 지탱하고 있는 생의 모든 이미지들을 보면서 활기를 잃고, 헐떡이는 내 호흡의 두터운 물 아래 힘겨워하면서도 미친 듯이 그 이미지들에 날 동화시키려 애쓴다. 왜냐하면 그 이미지들이 완벽해야 내 무가치가 부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고통을 증대하여 나를 성장시켜야 할 필요. 나는 격리된 부재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다. 그것은 나한테는 도망치다. 그리고 잡다, 이다, 시간에 의해, 내가 생긴 공간에 의해 내 발아래서 영원히 파일 심연을 파는 일일 것이다.
[12]
글의 가치는 그 글이 무효화하는 책들의 중요성으로 정의된다. 내 문장들이 인간들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말들인 만큼 나는 그것들을 한 개인에게서 빌리는데, 가령 나는 나의 주의 주장 속에 있다고 말하는 그런 개인이다.
새들을 위해, 귀뚜라미들을 위해, 수다쟁이들을 위해, 병아리들을 위해, 장님들을 위해 말하라. 그러나 작가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귀뚜라미들의 울음으로, 새들의 깃털로 언어를 만들라.
새벽이 되기 조금 전, 나는 잠이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에게 죽음을 예고했다. 내 잠은 흔들렸다. 나는 그림자를 꿈꾸었다. 낮은 창 위에 강철처럼 밝은 자정이 천천히 열린다. 그러나 그것은 야수들이 두려워하는 밤이었고 고양이들은 놀라 귀를 쫑긋하고 피했다.
나는 새벽을 알리는 납빛 푸름 속에서 깨어났다. 밖은 아직도 어두운데 나무들은 제 겨울 실루엣을 슬슬 벗고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타종 소리가 미친 시계 소리처럼 울렸다. 내 계산은 길을 잃었다. 새벽은 내 눈 위 눈가리개처럼 무거웠다. 나는 날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계의 여신은 나를 떠나야만 했다. 너무 슬프다. 그녀를 눈으로 좇기 위해 나는 내 덧창을 밀었다. 그녀의 갈색 모피, 염색 펠트 모자만 보인다. 이 요란한 옷들의 부동의 색 앞에서 내 심장은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오기 전 그녀 머리 위에 썼던 그 붉은 모자 아래서 울었다. 색 속에 사는 것들 모두 땅 밑에 산다. 그녀는 무엇의 포로인가? 그녀는 내게 말하곤 했다. “하연 제비가 닫힌 방에서 살았어요. 당신이 창문을 열 때, 그림자 속에서 일어나는 건 하얀 제비예요. 태양을 만나러 광선처럼 날아가요.”
곧 밤이다. 들어라. 어둠 속에 윙윙. 어둠 속의 벌.
[14]
내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일단은 깊이 잠이 들었다. 생기라곤 없는 내 눈길은 떴을 뿐 내 몸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눈 위에서 헛돌았다. 불편하게 앞에 있는 벽난로 위에 돌 조각 천사들이 마주 보고 있고, 난 극서들을 멍하니 보고 있다. 널판자 벽 위에 붙어 있는 털실 꽃송이들도, 누르스름한 램프가 저 후미진 곳에 있고, 거기서 나오는 검은 불길들이 내 협소한 수평선을 덮어버린다. 내 몸은 목소리들이 가득 들어찬 진흙 구덩이 같은 것에 처박혀 있다. 라디오가 떠든다. wsjtjs이 빠져 있는데도, 아주 큰 소리로 떠든다. 아까부터 듣고 있었던 것도 같고, 갑자기 크게 들린 것도 같다. 소리가 퍼지면서 아주 크게 확대되는 것도 같다. 손 하나가 내 손안에 있다. 놀랄 것 없다. 사건이라 해도 내 손과 관련된 일 정도일 테니까. 내가 사는 곳 어디서나 생이 있다. 그리고 내가, 형체를 띤 어떤 동요가 내 입술위에 키스한다.
내 가슴 바로 옆에 사진기 하나가 펼쳐져 있고, 난 그 세부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서툰 동작으로 고장 내려 한다. 내가 꿈꾸고 있어 다행이다. 아주 어린 아이처럼 내가 여리면서도 사악해진 것 같다. 지금 그 애의 맨장딴지를 잡고 있는 건가? 이젠 아주 단단하고 건장한 손 하나가 내 손을 누르고 있다. 난 그 손을 잡는다. 놓는다. 웃옷 아래로 손을 넣어 지독히 마르고, 짧고, 뼈만 앙상한 팔을 한번 만져본다. 내 가슴 위에 버려진 스웨드 가죽 장갑, 내 눈길 닿는 저 높은 곳에서 내 생각은 다시 생성되고 있다. 눈 덮인 장미나무 가지에 광선 하나가 달려 있다. 내 팔의 용도란 이미 뻔한데. 가지는 여전히 공중에 매달려 있다.
정신이 돌아왔는데도, 내 사지는 내 사지 속에서 자고 있는 듯했고, 내 손가락들은 내 손가락들 속에서 자고 있는 듯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신기한 일처럼 보인다.
매일 내가 잠이 드는 방과 같은 방에, 약간 더 큰가? 하여튼 세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 침대에서는 간호사가 자고, 또 하나에서는 몹시 젊은 아가씨가 나처럼 다른 두 침대 가운데 하나에 누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슴푸레한 빛이 방을 감싼다. 시선 저 안쪽에서 마음의 길을 찾았는지 빛이 살랑살랑 일렁인다.
[15]
시계종이 울린다. 나의 우체부가 간수 같은 고압적인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온다. 웃으며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하얀 벌을 바로 앞에 세우고. 그리고 앉더니 어슴푸레한 내 방을 마치 제 손수건 꺼내보듯 바라본다. 우리가 만나는, 듣는, 여자들은, 남자들은, 날 속에 담겨 있지 않다. 그들이 날을 담고 있다. 그들은 이미 내 눈 속에서 날을 창조했다. 마치 그들이 내 추억 속에 그 날을 움트게 한 것처럼.
그것은 진실이다. 내 모든 힘을 다해 알고 구현하지 않을 수 없는 진실. 마치 내가 시간들에 대해서는 자유를 거부하길 원했던 것처럼. 자유는 내 고통 때문에 나에게서 물러났다. 하루를 불구로 만들려고 그 끔찍한 유혹이 내게 온 것인가. 마치 내가 나 자신을 불구로 만든 것처럼.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침묵으로 그것을 망가뜨린 것처럼. 하루하루가 내 가슴에서부터 떨리는 겸손한 작품이 될 때 나도 비로소 그들의 작품이 된다. 나는 존재에 대한 내 직감을 분산하고 싶다. 그래서 그 직감을 내 시선 한 가운데로 갖다놓는다. 나는 태양 속에서 날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날을 그 근원에서 볼 것이다. 우리들 그림자 사이에서 날을 일깨우는 물체들 속에서 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가 아니라 외양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태양을 찾아서는 안 된다. 꽃 한 송이에서, 조약돌 하나에서 찾아야 한다. 태양이 막 거기에서 부화했다. 우리는 우리 예술을 이렇게 정의할 것이다. 완전히 실제라고 느껴지지 않는 피조물의 리얼리즘. 오 너는 네 위대한 길 위에서 이 달몰이를 하는 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를 보잘것없는 출신에서 꺼내왔고, 다 알수조차 없는 너무 큰 사랑을 그에게 불어넣어주었고, 그리고 그를 네 가슴 속에 담았다. 너의 선한 것들로 그는 감히 가득 차리라. 그리고 그 선한 것들로 일어서리라. 그를 밝혀주고, 그를 성장시켜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는 자신을 태양의 형제로 생각하게 될 것이며, 삶은 별들의 길을 통해 그에게 온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가 쉽게 시간의 무게를 짊어지도록 너는 그에게 그들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16]
내 아픈 방은 어느 잘 모르는 집의 일층으로 통한다. 빛은 반쯤 가려진 창문을 통해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길가로 바로 난 문을 통해서도 들어왔다. 거기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행인들은 다 탄 재 위를 신발 안창 삼아 걸어갔다.
이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내 간호사가 겨우 보였는데, 곧 날 단장시키는 행사를 하려한다. 난 손짓으로 그녀가 하려는 일을 멈추게 했고, 덧창을 닫으면 붉은 새 한 마리를 가두는 것임을 시사한다. 새는 제비의 비상을 흉내 내듯 포도 위를 왔다 갔다 했으나 날개는 퍼덕거리지 못한다. 투덜거리지 않고, 그녀는 덧창을 연다. 흉상을 숙인, 심장처럼 작고 붉은 이 새를 나는 본다. 새는 영리하게 덧문들 사이로 쏟아지는 광선을 따라간다. 밖으로 나가려는 건지 방긋이 열린 문틈 쪽으로 서두르지 않고 걸어간다. 새가 태양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꿩의 크기만 해 진다. 하얗고 검은 깃털은 무슨 영구차 같다. 자유의 문턱에서 멈춘다. 멎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나는 그 새를 방금 들어온 내 누이에게 보여준다. 누이 앞에는 뭔가 뒤집어쓴 것 같은 뚱뚱한 사내가 있다. 그러나 또 난쟁이처럼 날렵하고 민첩하다. 이 벌먹꾼은 쓰러뜨릴 전나무를 찾고 있다.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더니 마치 내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하녀에게, 내 누이에게 그녀들이 날 잠들게 하면 자기는 다시 올 것이라고 선언한다. 꿈에서 나와 나는 다시 내 잠든 눈 속에서 내 시선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운전대를 나에게 맡긴 두 검은 사내의 포로가 된 채 밤에 자동차를 몰았다. 나는 좁은 길을 파고들었다. 차는 격렬하게 요동치고 덜그덕거리다 이내 폭신한 모랫길로 들어섰다. 아주 가까이에 연못이 잇는지, 우리는 마침내 끈적끈적한 바람 속에 와 있었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거품이 이는 투명한 물이 벌써부터 보여 더 두려워졌다. 날 지키는 자들이 그 절대적 무기력에서 나오지 않으면 차는 그 속으로 처박힐 터였다. 이 음산한 동행자들과 운명을 나눠야 하는 게 내 운명인 나는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던 위험만을 상상하고 있었다. 끝까지 나를 따라오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이 이 놀이를 e아장 그만두었으면 하는 희망도 나는 감히 갖지 못하였다. 내가 빠질까봐 두려워했던 곳에서 그들은 정신이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완벽하게 깬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야에 우선은 익숙한 사물들이 흐릿하게 겹쳐 보이더니 한 작은 피조물이, 그러니까, 벗은, 한 여인이, 내 오른손 옆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빛나는 금발 말총들이 그녀의 머리 뒤에서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검지만 가볍게 움직여도 그 머리칼을 스칠 수 잇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는, 극도의 노력을 다해야 만질 수 있었다. 내 팔은 반몽반각성 상태의 무기력 속에서 납봉된 듯 꼼짝도 안 했다. ~~~그녀를 눈으로 포착하기 위한 노력과 나를 더 깨우려는 노력은 내 눈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환영을 거둬가버렸고 나는 완전히 후벼파였다.
저녁이다. 브람스의 곡이 파문을 타고 흐른다. 겨울 색들이 그림들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나를 지키는 자가 내 침대로 다가왔다. 한 창백한 소녀가 제 목소리와 그 미소에 대한 추억을 찿선 언어의 가장 어려운 단어처럼 벌어진 그 입술을 달고 다닌다.
나는 죽음인 것인가? 내 목소리에서 영원성을 발견하지 못하니 말이다. 나는 내 여자 친구들의 여성적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너무 졸아들어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경이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퀴처럼 활짝 펴진 한 마리 공작 깃털 앞의 작은 벌레처럼 내가 아무것도 안니 것 같다. 그 부리의 위협, 나를 둘러싸ㅣ고 있는 것을 그려라. 내게 더 이상 남아 있는 것이 없을 때까지, 내 사랑이 그림자에 불과하도록 운명은 내게서 모든 것을 가져갔다.
인간의 사고는 고유한 형태 없이 남기를 원한다. 인간의 사고는 단어들과 맞바꿔지면서 흔해빠진 초상화가 된다. 마치 한 남자가 자기 밭을 파고 그 치른 값을 호주머니에 넣고 정작 자신은 나무와 길들을 혼합했다 해체했다 하는 영사기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갇히는 식이다. 그 영사기는 멀리서 보이는 풍경만 보여줄 뿐이다. 그가 자기 땅에 있었다면 그 풍경의 비밀을 꿰뚫었을 텐데. 단어는 세계의 기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의 거대함에 깨어나지만 정작 세계에는 그 거대함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 치명적 고통의 회복기 상태가 있다. 늘 내 존재는 무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날 혼자 가만히 있게 놔뒀는데, 그것이 내게 왔다. 자신을 알리지 않고 나를 통과했다. 소란스러운 오열을 거쳐 내 안에 무언가 차올라 마침내 조용한 저 높은 곳에 이른다. 거기서 내 기억은 더 이상 내 존재를 따라가지 못한다. 시인들의 노래는, 언젠가, 과거 그랬던 모든 것에 대한 책임자인 이 노쇠한 존재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말은 그 약속에 불과하다. 그 말은 가끔 영원한 침묵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고야 만다.
내 삶은 정신 앞에서, 계시가 되는 정신 앞에서 사라지게 될 r서이다. 내 영혼의 특징이 아닌 사실은 거기서 양산되지 않는다.
내 삶을 정화하기, 그리고 내 가슴속에 있는 것을 더는 식별하지 않기 위해 내 삶에 눈을 뜨기, 그래, 그것밖에 없다. 모든 고독은 노력을 대가로 한 것이다. 눈물이라는 특별한 선물과 함께 고독을 받아들이거나 침묵과 침묵을 통한 비상으로써만 얻어지는 고독을 누리겠다.
[17]
너는 이미지를, 그토록 무겁게 네 삶을 흡수하곤 했던 현실 그 유일한 이미지를 흡수한다. 넌 그것을 네 안에다 영혼의 크기에 따라 놓는다. 영혼은 빛에 깨어나고. 그 영혼의 내벽으로 삶의 정화된 것만을 보거나, 만들거나, 다시 찾아낸다. 그렇게 빛은 우리 안에 있고, 그 깊이 안에, 그 정수 안에 있다. 영혼은 만년설과 접근할 수 없는 정상을 지니고 있다. 우리 눈은 대지의 잠과 지하 태양의 중력과 돌이킬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매 순간 성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관여하는 행위가 허깨비 같은 행위에 불과해도 해라. 네 영혼 안에서 본질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해라. 비밀 속에서 작용하는 것만이 실제이다. 네가 하는 것은 그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림자 속에 샘을 따라. 이 사실들에 샘을 파라. 여기서는 빛이 호흡으로만 포착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고통이 나를 감금하는 집이다. 날은 격자창 유리 다른 편에서는 슬프다. 나와 함께 나를 그 허약함의 바닥부터 지키는 불행한 자들. 거긴 힘이 무서운 곳이다. 패배한 자들의 저택. 그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목소리가 말한다. 그것은 기묘하고 낯선 추억들의 창백한 세계, 잊힌 남자처럼 그곳으로 들어간다.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상상한다. 장음절일 때만 이해되고 , 그래야 더는 잊히지 않는 식이다. 우리는 영혼이 있다. 그러하니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물체가 그 이미지를 초월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 이름을 녹여 무한한 가능성의 원천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하니 너의 숙소, 너의 가구, 너의 친구들은 네 재산이며 동시에 상상 세계로 가는 열쇠이다.
누가 나를 침대에 혼자 두었다. 불구인 나는 거기서 꼼짝도 못한다. 한 허름한 여자가 커튼을 벌리며, 애원하는 머리를 나를 향해 밀고 온다. 내 옆에 침대 휘장처럼 늘여뜨려진 알코브 안으로 제 흉상을 들이민다. 관능적으로 온몸을 숙이고 들어오면서 점점 더 품위를 떨어뜨리는 구걸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헐떡이며 내 얼굴에 대고 속삭인다. “목에 벌이 있어!” 급기야 날 짓물러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혼자 싸우고 있던 나는 마침내 내 침대 시트 속에서 깨어난다. 정오다.
[18]
나는 꿈의 주권적 고독을 더 참을 수 있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자유도 이 고독이 끝남과 동시에 끝날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깨어나는 순간 날 가두고 있는 불안을 내 온 감각으로 탐험했다. 불안은 근원적 두려움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불안은 이 공포 자체였다. 스스로 가라앉기 위해 나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최선을 다해, 이 본능적 공포를 분석했다. 떠나버린 꿈의 어떤 막막함이 이 공포 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상처 주고,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반면, 나는 날의 비참한 의무에 나를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상실한 모든 공간에 대해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를 파고드는 전형적 불안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그 안에 아직 자유의 느낌은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곧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우리들의 환영의 먹이로 다가온다. 음산힌 빛은 최초의 생각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의 신념을 흔들리게 만든다. 자유에 진력이 난 피조물은 볼썽사나운 안신의 평탄대로를 걷고, 최초의 생각은 기능을 멈춘다. 그건 자신과 싸워 실행해야 하는 두려움 속에서 형성된 것 아니었다.
나는 알고 말았다. 불현듯 어느 날, 깨어남이 진짜 추락이라는 것을, 그러나 무감각한 추락이다. 왜냐하면 영혼과 의식은 거기 같은 쇠락 속에 함께 끌려 가 있으므로, 저 낮게 떨어지지 않도록 함께 부유하고, 각성된 삶이라는 공동의 구멍에, 지하 감옥에 우리들의 모든 열망을 하나로 모은다. 나는 이해했다. 내 의식적 시선이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것을, 빛은 비스듬하게 들어와서 떨어진다. 마치 나선처럼, 사슬처럼 이어진 사실들처럼, 공간이 나를 구제하지 못하면, 내 나쁜 점을 해결해주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나와 조화롭지 못하다.
제3부. 하얀 제비
[1]
나는 사물과 사실들을 내 펜대가 그것들을 보듯 보고 싶다. 내가 내 눈을 그 펜대에 빌려준다면 가능할 것처럼 말이다. 장 뒤뷔페가 그린 그림처럼 쓰고 싶다. 나는 괜히 구비하려 시도한 만년필을 서투르게 조작한다. 그의 손 뒤에서 한 남자가 비웃고 있다. 자기 형체를 감추고, 나는 피스톤 조작에 전념한다. 위험하고 푸른, 알코올이 함유된 불길 따위에 휩싸여야 잉크를 빨아들이는 피스톤. 유리병이 녹는 것을 보면서도 기구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머리를 들어야 했다. 문방구 주인은 그에게서 여러 굵은 펜들을 압수하겠다고 주장하는 무시무시한 조사관과 언쟁한다. 조사관은 그 펜들을 파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 자신의 논박을 버린다. 즉시 나는 그 상인이 아름다운 보랏빛 펜대를 내게 파는 것을 거부했음을, 그리고 이 귀여운 물건을 증정 받은 주교에 대해 질투를 내비쳤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미라와 유사한, 나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이 권위적 조사관은 경찰에 복종하고 경찰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나를 떠나지 않은 이 책과 내가 내 도구들을 닦을 때 써서 더러워진 물병 하나를 경찰에게 제출할 것이다.
이 책은 <우파니샤드> 영어판이다. 누가 서문을 뜯어갔는지 훼손으로 이 작품은 못 쓰게 되었다. 조사관은 자비로움과 공평성으로 내 외침과 눈물을 받아주었다.
[2]
붉은 혹은 발그레한 혹은 푸른색 속에서 꽃들은 가벼운 깊이를 피운다. 빛이 반쯤 벗겨져 들어온다.
[3]
내 삶이 비상하기를. 나의 바깥에서, 물리적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의식 속에서 그 비상을 움켜잡기를.
[4]
세계는 세계 속에서보다 내 속에서 더 크다. 그러나 나는 내 가슴 속에서 펼쳐지는 현실로부터 몰려나왔다. 나는 내게 나타나기 위해 축소된 우주의 한 부분이다. 그런 것이 나의 자유다. 나는 거기 기꺼이 난파한다. 만일 육체가 영혼의 먹이가 아니라면 그것은 영혼의 감옥이며, 죽음이다. 나는 피조물이 우리를 위해 무엇이 될 것인지 감추고 있는 곳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잡았던 모든 것을 다 부수어버릴 만큼 꼭 껴안고 싶었다. 내 시선의 바닥까지 만지고 싶었다. 내가 보는 것 속에서 내 눈을 만지고 싶었다. 내가 듣던 것 t고에서 내 귀를 만지고 싶었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잊게 하는 육체.
[5]
나는 그늘 속에서 내 우편물을 연다. 필체를 알아보기에는 내 위로 쏟아지는 빛이 충분치 않다. 내가 통지서 위에서 이 어린아이의 이름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이름만 남기고 간 자들을 위한 특별 돋움체로 정성스레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 태양의 이 금요일은 내가 배운 죽음에 의해 살해되었다. 날은 그 신선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자기 뒤에 이미 날아갈 준비가 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넌 네 아이의 죽음으로 우는구나. 나는 기쁨 속에서 자랐는데 왜 고통 속에서 늙어가야 하나? 너는 말한다. 따라서 너로선 이 존재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만이 관건인 거야. 언젠가 이 존재를 포기해야 하니 말이야.
오히려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겠지? 날들을 살며 힘들어하는 나를 보느니. 날들이 내게서 곧 떨어져 나간다는 경고를 듣느니. 내 삶이 너보다 더 사실적이지. 삶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삶을 납득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네 의식이 삶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런 삶의 너를 거부하지 마. 그럼 지는 거야. 그냥 불행한 인간이 되어버려. 완벽하게. 빛나게 네 불행을 구현해버려.
투시력을 가지고 태어난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사실들은 나와 공조해. 사실들은 나를 도와 나에게 접근하게 하지. 내 시련 속에서 나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지. 내가 왕관을 쓸 만한 자가 되려면 먼저 왕관을 쓴 거인과 싸우기를 희망했어야지.
우린 불행 앞에서 연약하지만 늘 새 잎 같아. 불행이 어두운 가슴 저 밑바닥에 있었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의 미래가 생긴 거야. 처음에는 감추고 있었지만 말이야. 모든 피조물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원해. ~~~수확물 위에 우박이 내린다. 네 수확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넌 그게 너에게만 도달해야 한다고 부르짖는구나. 마치 살아 있는 너를 알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려 야생 귀리를 재배하는 것처럼.
[6]
독서에 열중하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늙은 인간은 머리를 들지 않고는 이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내 침대에서 뽑혀 나오고 싶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선다.
의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젠 더 잘 이해한다. 내 의무는? 우선은 고통을 초월하는 것이다. 나는 정말 그 고통으로부터 내 심장을 구했다. 내 생명을 진흙탕 속에서 주웠다. 삶은 광선처럼 분명한 것이 되었다. 나는 내 과업을 본다. 내 과오는 내가 소유한 것이 내게 속한다고 믿은 것이다. 나라는 것은 거울 속에 나타난 대로다. 내가 보는 그대로다. 정말 그것만이 실재다. 만져보려고 갖은 애를 써보지만 만지면 거울에 비친 상일뿐이다. 죽음은 내 안에 있다. 만일 내가 죽음과 혼인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음은 그냥 나를 데려가리라. 내가 보이는 물체 하나를 만질 때, 죽음은 그 물체를 보도록 내 시선을 손에 피신시킨다.
[8]
비석 위를 비추는 달빛 속 비둘기 구구구 소리. 그 앞에 호수가, 좀 더 멀리 바다가, 키잡이가 달 모는 자의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대는 선원의 맑은 눈이 있다. 춤추는 마을, 종소리. 밤이다. 인간이라면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솔;l를 내지르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이제 막 알았다. 그의 외침이 바다 소리와 함께, 저 광막한 하늘 뒤에 감춰진 달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고통스럽게 반짝이는 바다 위 돛대의 불에 덴 바람 같은 독수리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그는 아직 자신의 울음을 모른다. 그 울음을 내밷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이제 막 알았다.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에 비로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 그의 전 생애는 사랑하던 w아소들, 그 현실 자체였다. 거기에는 노래밖에 없었다. 죽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자신의 별을 알아낸 그 불행한 자를 소환해야 할까? 그가 만질 수 있는 것은 환영 같은 존재라는 것도 그는 안다. 인간들의 언어 속에 있으니 불행하나 태어나는 공포는 사라지지 않나. 그의 목소리는 호흡일 뿐이다. 네 사랑을 위한, 너를 위한 심장일 뿐이다.
꿈 위로 내려오는 침묵을 두려워하라. 그러나 커다란 은빛 날개들을 조심하라. 그건 목소리의 하프.
나는 당신에게 달 모는 자. 그러니까 달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달을 지배하는 이 승리의 사내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그의 행복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를 이해했다는 것은 아니어도. 그런데 정신적 평온과 관련하여 의구심이 들었다. 안개처럼 모호한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는 것이, 인간 자체의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 행복임을 나는 잘 안다. 그가 자신을 환영이라 여기면 가령, 그가<어린 시절의 아픔>을 썼을 때, 그리고 이 책을<분홍 손가락 사이의 그림자>라고 햇을 수도 있었을 때, 이런 확신은 그에게 먼저 온 직감을 확인해 주는 건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떤 사실들이 지나가면서 남기는 흔적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러면 육신 자체의 지속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가 아니라 그의 상처가 문제였다. 그게 더 실재였다. 그의 상처가 그에게 남긴 몇몇 불편함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삶은 그와 흡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9]
나는 시디신 색들 위에서 눈을 뜬다. 나는 푸른 짚, 푸른 라피야 야자수 잎을 눈으로 만진다. 네가 느끼는 것은 모두 네 모든 것을 다 집중할 때다. 극도의 예민함, 너와 함께 사는 모든 것은 네 영혼 속에 모아지는 것에 예민할 것이다. 그것은 기도 자체를 빨아들이기 위해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는 일이다. 빛을 스스로 발하는 형(形). 그게 생이다. 그림자 속에서 나를 보기 위해 나를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가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내 눈이 발견하는 것 속에서 나를 찾는다고나 할까. 내 눈이 태양에서 끌어당긴 아름다운 것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고나 할까. 저녁이다. 닫힌 덧창 위 열린 틈으로 창백하고 차가운 태양이 안뜰에서부터 완성되지 않은 노래와 함께 들어온다.
신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하지만 인간에 대해 어떻게 그리 감히 말할까? 거대한 존재감 속에서 보는 인간은 우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일단 나타나기는 하지만 거기 늘 암유되어 있던 주체의 본성 속에서 주체가 갖는 동사의 의미를 심화하여 그 위대함을 본 것이다. 인간은 그렇다, 라는 확언 속에서 나는 인간을 이젠 보지 않는다. 우리 존재는 아는 자와는 다른 세계 속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 라고 알고 잇지만 나는 내 존재를 이미지로만 안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나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니까 내 지워진 기억의 사실 속에서, 그러나 그 정확성은 내가 증명해줄 수 있는. 나는 생을 믿기 위해 진실을 고안해야 했다.
인간은 이미지일 뿐 표현된 게 아니다. 나는 미래란 나를 위해서만 실제적이었던 행위들 속에 숨겨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당장 내 일기를 여행가방 안에 숨겼다. 한 여자 친구가 와서 그것을 찾아냈다.
인식(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의 자리에 의식(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 반드시 있다. 인식한다, 라는 자리에 의식한다, 라는 것을 놓기. 거기에 모든 상상력을 써야 한다. 반면 인식한다, 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떠한가를 보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한 고통을 부정한 경험에서만 느낀다. 부정한 것이 그를 관통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러면서 정의가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 내부에 막막한 위대함이 생긴다.
[10]-全文-
그렇게 나는 달몰이를 하는 자를 찾아 모험했다. 인간은 하나의 똑같은 기획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내 구실을 미끼로 불러들이기 위해 나는 구실들을 벼리었다. 그것은 우선 내가 내 심장에서 뜯어낸 책 한 권을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이어 새로운 문장의 경영을 위해 시련의 장을 여는 일이었다. 결국, 매우 짧은 장들로 된 한 권의 책을 쓰고자 하는 마음과 여행처럼 그것을 읽는 일이었다.
나는 스승의 토가 밑에 비천한 자의 검은 작업복을 입는다. 누군가가 강단에 나를 앉혔다. 전임자는 죽었고, 나는 그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만일 내가 이 소식을 공개하면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수리의 모든 길은 내가 제자들을 모았던 교실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전동차와 자동차의 소음에 귀가 먹먹해진 그들은 말해지지 않은 것만 듣는다. 내가 스스로를 현자라 해도 되는 건지. 나는 책들을 뒤적거린다. 그리고 그들은 노트를 g나다. 그들의 공책을 점검하면서 나는 여기저기서 배운다. 하나의 생각을, 하나의 문장을 익힌다. 나는 진보한다. 내게 단언을, 확언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 닥친다. 마치, 곧장 차 한 대가 멈춘 것처럼, 통행의 굉음이 작아진다. 어느 날, 나는 그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ㄴ느 바닷가에서 내 수업을 복기하며 나는 산책을 한다. 곧 폭풍이 몰려올 것 같다. 파도 소리가 커진다. 내 어린아이 같은 목소릴르 덮는다. 나는 안다. 침묵 속으로 그것이 나를 데려다 줄 것을. 그리고 거기서 그것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내 왼쪽 팔 아래다 장밋빛 종이 표지의 작은 책들을 끼운다. 내 야행 가방이 되어줄.
네 죽음으로 죽어야만 했던 저 멀리 있는 한 형제가, 그런데 나처럼 방향을 튼다. 그리고 나처럼 그의 책에 눈을 내리깐다. 해안가에 면한 동네, 우리의 운명은 같은 것. 그러나 지평선의 카오스가 지속되는 만큼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것인 우리의 근심 아래 분리된 우리 생각을 놓는다. 전에 나는 생이 아니었던 한 진리에 의해 본성들의 차이가 격화되었다고 썼다. ■
[계열 21. 사건에 대하여]
사건은 납득되어야만 하는 것,
원해져야만 하는 것.
일어난 것 안에서 표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의미의 논리)
구체적으로 혹은 시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가리켜 스토아적이라 명명하는 일이 가끔은 망ㅅ러여진다. 어떤 상처와의 매우 사적인 관계를 지시하는 데 있어 어떤 핛러명은 너무 이론적이거나 너무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어서다. 그런데 학설은 어디서 연유한느가? 사색해볼 만한 일화들이 많아 모범적인 자극이 되는 상처 혹은 생생한 아포리즘의 학설 같은 것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게 있다면 조에 부스케를 스토아주의자라 불러야 마땅하다. 조에 부스케는 그의 몸에 깊이 파인 상처를 절대 순수 사건과도 같은 영원한 진실 안에서 파악한다. 사건들이 우리 안에서 실행되니, 사건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를 열망하며,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기에 이른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 이런 의지에 도달하기, 그래서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게 하기,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의 거의 주요한 동인이 되기, 표면도 만들고 안감도 만드는 ‘오페라퇴르(Operateur)가 되기, 즉 공정 수행자가 되기, 그래야 사건이 내 안에서 성찰되고, 재발견되고, 무형적이면서도 초감각적으로 느껴지므로. 그러면 사건이 스스로 중성적 광채를 발한다. 그것은 보편적이냐 특수하냐, 집단적이냐 개인적이냐, 즉 소위 세계 시민 되기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의 문제, 즉 인칭이 따로 없고, 개체나 개인으로 되기 그 이전이 되는 차원이다. “모든 것이 내 삶의 사건들 속에 이미 있었다. 내가 그 사건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도 전에 산다는 것은 그 사건들에 걸맞은 나를 만들어가는 나를 지켜보는 일이다. 마치 나로부터 나온 것만이 최고의, 완벽한 사건이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겪을 만 한 자가 되기. 일어난 것을 부당한 것으로,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가령 항상 다른 누군가의 잘못으로 여기기)우리 상처는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사건을 못 받아들여 분개하는, 사적인 분노밖에 안 된다. 이보다 더 나쁜 의지는 없다. 정말 비도덕적인 것은 도덕적 개념을 항상 들먹이는 것이다 옳다느니 옳지 않다느니.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그렇다면 사건을 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쟁이 오면, 전쟁을 받아들인다는 건가? 상처가 생기면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건가? 죽음이 오면 죽음을? 체념이 분개의 한 모습일 수는 있다. 실제로 그런 모습을 많이 띈다. 만일 사건을 원한다면 우선 사건에서 영원한 진실을 끌어내야 한다. 영원한 진실이란, 스스로의 화력으로 타는 불길 같은 것으로. 이런 원함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는가 하면, 전쟁이 반대되어지면서 전쟁이 일으켜지고, 상처가, 온통 상처투성이 같은 생생한 흔적을 남기면서 상처가 되고, 모든 죽음들에 대한 반발로 도리어 죽음을 강렬하게 원하게 되는 일이다. 의지적 직관 혹은 위대한 전환, 부스케가 말한다. “나는 의지의 실패라 할 죽음에 대한 감상적 취향을 의지의 피날레라 할 죽음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었다.” 취향에서 열망으로. 여기서 의지의 변화 말고는 어떤 것도 바뀐 게 없다. 말하자면 온몸으로 도약하듯, 체질적 의지를 정신적 의지로까지 바꾸는 것이다. 이제 일어난 것만이 아니라 일어난 것 속의 어쩐 것, 일어난 것에 순응하기 위해 생기는 어떤 그 모든 것까지 다 우너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힘들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일종의 순응 법칙을 잘 따르는 일이다. 아모르 파티(Amore fati: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오로지 자유로운 인간의 투지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모든 사건 안에는 내 불행이 있으나 내 불행을 다 말려버릴 섬광과 광채 또한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교하게 의도되어, 사건은 가장 조여진 뾰족한 끝 위에서, 작업이 수행되는 중인 예리한 날 위에서 행해진다. 정지 상태에서도 만들어지는 발생효과 혹은 무염수태 효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건의 섬광과 광채, 그것이 사건의 감각이자 의미이다. 사건은 일어난 것, 즉 사고(accident)가 아니라 일어난 것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신호를 보내며 우리를 기다리는 순수 체험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세 가지 선결사항이 있다. 사건은 납득되어야 하는 것, 원해져야 하는 것, 일어난 것 안에서 표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스케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냥 불행한 인간이 되어버려. 완벽하게 네 불행을 구현해버려.” 누구도 이보다 더 잘 말할 수가 없다. 누구도 이보다 더 잘 말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감당해낼 만한 자가 되기 그래서 그것을 원하기. 거기서 사건을 끌어내기, 자기 사건들의 ‘자식’이 되기. 그렇게 다시 태어남으로써 탄생을 다시 만들기. 육체적 탄생과는 절연하기. 자기 작품들의 자식이 아니라, 사건들의 자식이 되기. 왜냐하면 작품은 스스로, 아니 사건의 자식에 의해서만 생산되므로.
[Review]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저서 <생의 수레바퀴>에서 노년에 이른 사람들의 임종에 이르는 다섯 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론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정의 단계에서 결국에는 수용하게 되는 이 단계는 비단 노년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예기치 못한 불행에도 적용된다.
이 책의 저자 ‘조에 부스케’는 스무 살에 세계 1차 대전에 자원입대하였다가 독일군이 쏜 총알에 척추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고 평생 집 침실에서 누워 지내며 후유증에 시달렸다. 마약과 자살을 기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자신의 불행을 새로운 차원에서 수용하게 되었고, 여러 예술인과 교류하며 시인, 작가로서의 삶을 살다가 1950년, 쉰세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에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닥친 불행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를 여러 단문 형태로 담겨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이 현상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으면서 불행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이해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서의 욥이 떠올랐다. 욥은 어느 날 갑자기 까닭 없는 고난을 겪고 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번뇌의 시간을 거친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친구들이 위로하는 말이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고난(죽음도 마찬가지)은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스스로 이해(깨달음)되어야 하고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질 들뢰즈’는 서평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건은 납득되어야만 하는 것, 원해져야만 하는 것, 일어난 것 안에서 표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의미의 논리)-
“우린 불행 앞에서 연약하지만, 늘 새잎 같아. 불행이 어두운 가슴 저 밑바닥에 있었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의 미래가 생긴 거야. 처음에는 감추고 있었지만 말이야.”(본문). 결국 고난은 납득이 될 때 새로운 출발의 길이 열린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까닭 모르는 불행, 혼란스러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본문)
“스무 살에, 나는 포탄을 맞았다. 내 몸은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는 우선은 내 몸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내 불구가 현실이 되면서, 나는 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매일 아침 불안에 잠을 깬 나는 난파당한 자의 공포를 느꼈다. 매일 찾아오는 시련이 나 태어난 그 흐릿한 날을 되불러 냈다.”
“장교는 주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에게 모르핀을 놓으려는 거였다. 마치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갈 것처럼 그들은 신중했다. 젊은 아가씨의 머릿수건에는 십자가 핀이 꽂혀 있었다.”
“불운이라 생각해요? 한 친구가 내게 묻는다. 나는 이 불행을 배우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내 영혼에 그것을 바라는 것처럼 보여서요. 나는 내 최선의 세계를 계속해서 건설하고 있어요. 폐허 자체인 세계를 희망하는 일이죠.”
“나는 태양 속에서 날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날을 그 근원에서 볼 것이다. 우리들 그림자 사이에서 날을 일깨우는 물체들 속에서 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가 아니라 외양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태양을 찾아서는 안 된다. 꽃 한 송이에서, 조약돌 하나에서 찾아야 한다. 태양이 막 거기에서 부화했다. 우리는 우리 예술을 이렇게 정의할 것이다. 완전히 실제라고 느껴지지 않는 피조물의 리얼리즘. 오, 너는 네 위대한 길 위에서 이 달몰이를 하는 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를 보잘것없는 출신에서 꺼내왔고, 다 알 수조차 없는 너무 큰 사랑을 그에게 불어넣어주었고, 그리고 그를 네 가슴 속에 담았다. 너의 선한 것들로 그는 감히 가득 차리라. 그리고 그 선한 것들로 일어서리라. 그를 밝혀주고, 그를 성장시켜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는 자신을 태양의 형제로 생각하게 될 것이며, 삶은 별들의 길을 통해 그에게 온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가 쉽게 시간의 무게를 짊어지도록 너는 그에게 그들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한 남자를 병신으로 만든 사고가 그 자의 근본까지 건드리지는 않는다. 하던 대로 하지 못하니까 치명적일 뿐이다. 육체적 불운은 엄연히 부패하게 될 것만 부패시킨다. 이렇게 불구가 되어 침대에 던져진 이후 내 삶이 너를 향해 드디어 오는 것을 보았지? 내가 당한 사고 그 이상으로 내가 무엇을 더 구현하겠어? 나는 재앙의 무대 위에 올려 진 십자가가 되었어. 불구가 되기 전에는 넌 네 인생이 없었어. 삶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삶의 사랑을 받는다고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 아닌가? 여자한테 집착하는 것도 여자가 나를 잃으면 죽고 싶어 할 것이라고 믿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나는 삶을 내 허상으로 사랑했다”
“나는 알고 말았다. 불현듯 어느 날, 깨어남이 진짜 추락이라는 것을, 그러나 무감각한 추락이다. 왜냐하면 영혼과 의식은 거기 같은 쇠락 속에 함께 끌려 가 있으므로, 저 낮게 떨어지지 않도록 함께 부유하고, 각성된 삶이라는 공동의 구멍에, 지하 감옥에 우리들의 모든 열망을 하나로 모은다. 나는 이해했다. 내 의식적 시선이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것을, 빛은 비스듬하게 들어와서 떨어진다. 마치 나선처럼, 사슬처럼 이어진 사실들처럼, 공간이 나를 구제하지 못하면, 내 나쁜 점을 해결해주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나와 조화롭지 못하다.”
“우린 불행 앞에서 연약하지만 늘 새 잎 같아. 불행이 어두운 가슴 저 밑바닥에 있었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의 미래가 생긴 거야. 처음에는 감추고 있었지만 말이야.”
“나는 꿈의 주권적 고독을 더 참을 수 있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자유도 이 고독이 끝남과 동시에 끝날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깨어나는 순간 날 가두고 있는 불안을 내 온 감각으로 탐험했다. 불안은 근원적 두려움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불안은 이 공포 자체였다. 스스로 가라앉기 위해 나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최선을 다해, 이 본능적 공포를 분석했다. 떠나버린 꿈의 어떤 막막함이 이 공포 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상처 주고,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반면, 나는 날의 비참한 의무에 나를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상실한 모든 공간에 대해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로 우리를 파고드는 전형적 불안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그 안에 아직 자유의 느낌은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곧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우리들의 환영의 먹이로 다가온다. 음산힌 빛은 최초의 생각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의 신념을 흔들리게 만든다. 자유에 진력이 난 피조물은 볼썽사나운 안신의 평탄대로를 걷고, 최초의 생각은 기능을 멈춘다. 그건 자신과 싸워 실행해야 하는 두려움 속에서 형성된 것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는 고유한 형태 없이 남기를 원한다. 인간의 사고는 단어들과 맞바꿔지면서 흔해빠진 초상화가 된다. 마치 한 남자가 자기 밭을 파고 그 치른 값을 호주머니에 넣고 정작 자신은 나무와 길들을 혼합했다 해체했다 하는 영사기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갇히는 식이다. 그 영사기는 멀리서 보이는 풍경만 보여줄 뿐이다. 그가 자기 땅에 있었다면 그 풍경의 비밀을 꿰뚫었을 텐데. 단어는 세계의 기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의 거대함에 깨어나지만 정작 세계에는 그 거대함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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