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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가 주먹만하다.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이다.
얼굴만 보면 "음~ "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키는 약 2.5M, 2개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다.
몸에는 각각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글자가 써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實相寺 입구에는 조선 영조 1년(1725년) 건립된 석장승 2기가 서 있다. 그들은 실상사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이기도 했지만, 실상사 앞에 있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역할도 한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원에는 석장승이 유독히 많이 있다. 석장승뿐만 아니라 나무로 된 장승들도 상당하다.
실상사는 동으로는 지리산 천왕봉과 마주하고,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별풍처럼 둘러싸인 채 쳔년의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개의 사찰들이 산중에 자리하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을 끼고 있는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고, 실상사가 건립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촌락이 형성된 것이라 한다.
지난 5월의 봄날, 지리산둘레길 남원 인월~금계 구간을 걷다가 시간을 내어 실상사에 들렸다. 석장승과 대면 후 다리를 건너 실상사로 들어가니, 길에 서있던 장승들이 제각기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실상사는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 이 창건했다고 한다. 실상사는 신라때 세워진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세워진 절이다.
실상(實相) 이란〈중론 中論>에선 '진실인 것의 모습'(tattvasya lakaam) 또는 '존재의 본질'(法性 dharmat)을 〈법화경 法華經〉서품에서는 '존재의 본성'(dharmasvabhva)을 의미한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山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발췌: 실상사 홈페이지(http://www.silsangsa.or.kr/bbs]
<9산선문 계보 및 위치>
도의와 홍척은 비슷한 시기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 지장의 선법을 전해 받았고, 도의가 먼저 귀국했지만 홍척이 최초로 산문을 열었다. 그 산문이 바로 실상산문이다. 수철이 실상산문 제2조이다.
[발췌: 다음백과 '불교의 모든것-선종의 전래와 9산선문의 형성]
[전각 배치도]
실상사는 그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많은 문화재(국보 1점, 문화재 11점)를 보유하고 있다. 이 문화재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며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사진 발췌: 실상사 홈페이지]
실상사는 무척 소박하다. 평지에 있다 보니 조금은 낯선 느낌도 들지만, 조금 머물러 있다 보면 의외로 편안하게 된다. 우선 공간이 넓고 건물과 건물 사이가 여유가 있다. 단청도 요란하지 않다.
실상사에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고 얼핏 들은 바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사진속의 석탑이 그것인가" 하고 헷갈려 한다. 국보 삼층석탑은 실상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부속암자 '백장암'에 있다.
실상사는 처음 창건된 이후로 두번이나 전소되는 비운을 겪었다. 중건되기 전의 실상사 건물 잔해들을 발굴하여 한곳에 석탑처럼 쌓아 놓았다. 비록 다 깨어진 파편들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아픔과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야말로 그 자체가 역사의 파편인 셈이다.
범종각도 소박하다. 구산선문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외형만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실상사는 깊이 깊이 들여다 보고 읽어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절이다. 그냥 지나치는 시선으로는 그 안에 담긴 깊은 숨결들을 알 수 없다. "아는만큼 보이고, 들여다 보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제대로 적용하는 곳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위해 준비한 연등들도 소박하다. 주변의 풍경을 전혀 해치지 않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탑과 전각들의 한 부분같다.
명부전이다. 전면 세칸인데, 칸칸의 규모가 작아 전체적으로 소담스럽다.
보통의 사찰에서 칠성각은 전각들 뒤편, 지형적으로는 대체로 높은 쪽에 자리하는데 실상사 칠성각은 한쪽에 소박하게 위치하고 있다.
실상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건물안은 별다른 특이한 구성은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소리, 개구리 합창소리 등 순수한 자연의 소리와 절간에서 나는 소리들을 모아 믹스한 것이다. 집중해서 한참을 듣다 보면 그 소리에 빠져들게 된다. 느낌이 무척 좋다. 대충 듣고 "뭐~이런것이구나"라고 하지 말고, 몇분 동안이라도 집중해서 들어보기를 권한다.
극락전(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이다. 한적한 곳에 있고 담장이 따로 쳐있다. 얼핏 보면 전각이 아니라 어느 유생이 본채와 떨어진 곳에 따로 지은 별채 같은 느낌이 든다. 주변의 자연스럽게 자란 풀들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간문 앞에 조그마한 불상들이 기와장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사찰 체험을 온 사람들이 만든 것들인 듯 한데, 순박하기 그지 없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그마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마음이 천진난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영원사靈源寺에 있던 건물을 옮겨 온것이라 한다. 밀집모자 두개가 문 좌우에 얌전하게 걸려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극락전은 그 이름을 닮아서인지 편안한 느낌이 든다.
전각 안 부처님과 후불탱화도 오래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가. 화려하게 꾸며진 어느 전각과 부처님 상보다 더 친근하고 편하다. 내가 촌놈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실상선문 제2조였던 수철화상의 능가보월탑으로 통일신라때 건립된 것이며, 보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로 통일신라때 건립된 것이며,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실상사는 천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아픔과 수난을 겪은 경험이 있다. 원터 공간에는 세월호를 기억하는 리본 조형물이 있어, 실상사의 세상의 아픔을 바라보는 자비와 공감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 건물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1883년 사찰을 사사로이 빼앗으려고 했던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남은 건물로, 꽃무늬 문창살은 단청도 선명하고 아름답다.
전각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후 그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저녁 공양 시간이 지난 즈음, 노스님 한분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밖으로 나오셨다. 원터가 있는 곳을 산책삼아 거니셨고, 한참 후에는 다른 스님 한분이 담소를 하면서 같이 걸었다. 평생을 수행에 전념하시고, 생노병사의 길을 자연스럽게 가고 있는 그 뒷모습에서 경건함과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았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발췌: 실상사 홈페이지]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사찰문을 나섰다. 다른 석장승 하나가 다소곳이 묵례를 하며 배웅을 했다.
백장암에 있는 국보 삼층석탑을 보려고 다음날 아직 지리산 봉우리에 해가 비치기 전 이른 시간에 백장암에 올랐다. 백장암은 실상사에서 남원 인월 방향 국도로 3킬로미터 정도 가다가 매동마을에서 우측 산길로 1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다지 험하지는 않고, 주변 산세가 아름다워 차가 아닌 도보로 올라가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처음 바라본 백장암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이 뭔가 장중한 느낌(한자음을 다르다)을 주고, 아직 햇빛이 비치지 않은 새벽의 깊은 색감이 묵직한 표정으로 드러나 보였다.
백장암의 산신각은 여느 사찰의 그것처럼 약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삼층석탑을 보고 싶어 이 시간에 백장암에 올라왔지만, 석탑 못지 않은 이른 아침 지리산과 산사의 그윽한 분위기를 만끽하느라 오히려 석탑은 나중에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1층 탑신 각 면에는 사천왕상과 신장상 2구씩을, 2층 탑신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2구씩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3층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이 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믿겨지지 않을만큼 아직도 전체 조각들이 선명하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1층 면의 사천왕상과 신장상을 들여다 본 것이다.
삼층석탑 앞에 있는 석등은 보물 제4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상륜부는 도난을 당해 형체를 알수 없고, 양련 윗부분에 난간을 조각해 놓았다.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여러개의 나무 홈통을 연결하여 아래로 흐르게 하고 있는데, 그 길이가 상당해 눈길을 끌었다.
불교라는 종교적 의미를 떠나 실상사는 천년고찰로 상당한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동쪽으로 보이는 천왕봉 등 지리산을 품고 있어 분위기가 편안하다. 수많은 세월동안 겪은 수난과 아픔을 온 몸으로 버틴 사찰답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 좋은 곳이다. 무엇보다 평지에 자리하고 있어 접근성이 무척 뛰어나다.
실상사는 '최초'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깊이 들여다 보고 제대로 알고 가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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