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요한복음 3장 12-15절
3:12 εἰ τὰ ἐπίγεια εἶπον ὑμῖν καὶ οὐ πιστεύετε πῶς ἐὰν εἴπω ὑμῖν τὰ ἐπουράνια πιστεύσετε
3:13 καὶ οὐδεὶς ἀναβέβηκε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εἰ μὴ ὁ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καταβάς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ὁ ὢν ἐν τῷ οὐρανῷ⧽
3:14 καὶ καθὼς Μωϋσῆς ὕψωσεν τὸν ὄφιν ἐν τῇ ἐρήμῳ οὕτως ὑψωθῆναι 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3:15 ἵνα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ἐν αὐτῷ ἔχῃ ζωὴν αἰώνιον
* 묵상할 내용:
"땅의 일과 하늘의 일"(‘구원’, ‘영생’, ‘천국’ 오류)
- 땅으로부터의 구원과 하늘로부터의 구원
- 땅으로부터의 영생과 하늘로부터의 영생
- 땅으로부터의 천국과 하늘로부터의 천국
주님은 끊임없이 말씀을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니고데모를 향하여 분노하신다.(요 3:11) 지금 니고데모가 행하고 있는 땅의 일, 사람을 만족시키며 그 대가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는 일은 비록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신을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결코 하늘의 일, 신의 뜻을 이루는 일, 신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요 3:12) 유대인의 선생으로 여겨지는 존재들, 종교 지도자라고 여겨지는 존재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은 결코 하늘과 연결된 일이 아니라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런 설명을 기록한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든 뱀’(요 3:14) 이야기를 빌미로 주님에 대한 ‘대속’적 의미를 삽입한다. 주님은 끊임없이‘위로부터’(ἄνωθεν, 요3:3, 3:7)의 일을 각자가 행해야 함을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요한복음은 신을 원망한 백성들이 단순히 뱀을 바라보며 병 낫기를 바라던 이스라엘로 회기 시킨 것이다.
(민 21:5-8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뱀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은 3:15에서 주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는 주님을 뱀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기 병이 낫기 위해 단지 뱀을 바라보는 것처럼 주님을 바라보면 된다는 구조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는 주님이 위로부터의 일, 신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있는 니고데모를 향해서 하신 책망을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주님의 말씀을 폐기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본래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 ‘영생’, ‘천국’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구원’은 죄를 짓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피안의 세상을 대표하는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결코 병이 낫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신과의 단절된 삶에서 신의 뜻에 복종하는 본래 피조물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위로부터’의 삶을 살게 됨으로써 세속적 ‘땅의 삶’, 욕망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과 신을 이용하는 삶을 중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영생’(ζωὴ αἰώνιός) 또한 ‘신의 명령’ 자체이며(요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것에 복종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피안의 세상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르치고 기록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확고한 교리로 만들었으며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맹종하면서 여전히 믿고 있다. 이것은 망상이다.
‘영생’이라는 말은 본래 ‘하늘로부터, 신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삶의 방식(ζωὴ)’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에 ‘영원하다’(αἰώνιος)라는 형용사를 붙이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신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삶은 영원한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세상에서 인간에게 영원할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도 사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삶’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에는 주님의 뜻을 따랐던 사람이든 아니든 영원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는다고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다. 영원히 살게 된다. 단지 그것이 어느 편에서인지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영생’이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신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사는 삶인지 아닌지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구조에서 ‘천국’은 결코 죽음 이후에 가는 곳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3차원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한된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시간과 공간이 통합되는 공간, 사람들에게는 이 우주와 저 우주라고 구별되지만 그러한 구별이 의미가 없는 차원의 천국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신의 뜻과 나라를 방해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범죄이며 사탄의 짓거리인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으로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진 악마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 피안의 천국을 가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욕망은 신의 나라를 파괴하려고 하는 ‘천국을 향한 사탄의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