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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나, 혹은 진실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
이형권(문학평론가)
사람아/ 여린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저 광활한 우주가 있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있어 흔들리는 것이니// 흔들리는 사람아—이돈형, 「공복」에서
1. 나는 진실의 ’새끼‘다
이 시집에는 세상살이의 이런저런 사연을 지닌 “나”가 자주 등장한다. 고독한 나, 슬픈 나, 무료한 나, 고단한 나, 비루한 나, 결핍된 나, 떠도는 나, 그리고 사랑하는 나, 사랑받는 나, 이별의 나. 초월의 나, 반어적인 나, 반항하는 나. 역설적인 나, 풍자적인 나, 펀(pun) 하는 나, 대긍정의 나 등 수많은 “나”가 북적이고 있다. 이들은 고루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상실했던, 진실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선 “나”의 다양한 모습이다. 진실한 자아의 상실은 현대 사회의 비정한 물신주의, 도구적 인간관계, 사랑의 부재, 획일화된 가치관, 자기 정체성의 혼란, SNS 시대의 디지털 빈곤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 자아 상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게 하는 심각한 문제인데, 이 시집의 시편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면서 자아를 성찰하고 세상을 비판하는 자세를 취한다. “나”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우주도 없는 셈이고, “나”를 상실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상실한 것과 같으니, “나”를 찾아가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고 소중한 일이다. 따라서, 내 안에 존재하는 진실한 “나”를 탐구하는 이돈형의 시적 여정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시에 등장하는 “나”는 보통 화자라고 부르는데, 그는 시인과는 꼭 같지는 않아도 시인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나”는 시인을 대신하여 시인의 시적 진술을 주도하면서 시상을 전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만, 화자를 지칭하는 퍼소나(persona)라는 말에는 시 속의 “나”와 시인의 인위적 거리 혹은 미적 거리가 함의되어 있다. 시인은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지나치게 주관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 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술을 하고자 하는 셈이다. 가령 김소월 시의 여성 화자만 보아도 시에 등장하는 나가 실제 시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달래꽃」의 화자는 애이불비(哀而不悲)라는 우리 민족의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정서를 표상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나”는 시인 자신과 온전히 동일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시의 화자인 “나”를 현실의 이돈형과 최대한 일치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 방식은 시적 진솔성 혹은 심리적 핍진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나는 사람 새끼다
새끼라는 말이 좋아맞아 죽어도 나는 새끼였으면 좋겠다 저 새끼보다는 이 새끼였으면 좋겠다
이 새끼는
눈앞에 서 있는 새끼라서
당장 한 대 줘 터질 수 있는 새끼라서 좋다
맞아도 좋으니 지금은 이 새끼에게 젖을 달라
조상 젖을 빨아 본 적 없어 세상 젖이라도 빨겠다는데 주는 놈이 없다 그러니 맞아 터져도 좋다 빨게만 해 다오
젖 좀 달라면 대뜸 나오는 말이 이 새끼가! 였다
맞다
이 새끼
굶어 죽는 새끼보다 맞아 죽는 새끼가 낫고 맞아 죽는 새끼보다 얻어 처먹는 새끼가 낫다고 목 놓아 외치는 이 새끼
아직 젖 같은 세상을 다 빨아 보지 못한
이 새끼
이돈형 맞다(「이돈형」 전문)
이 시는 시인의 실제 이름을 제목으로 취한 특이한 사례이다. 언어로 그린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 자신에 관한 편견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가 직핍하게 다가온다. 부조리한 세상과 어떠한 불화도 감내하면서 진실한 삶의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을 “이 새끼”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의 첫 구절을 “나는 사람 새끼다”라고 시작하여 “이 새끼/ 이돈형 맞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새끼”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말이 지닌 함의는 이중적이다. 즉 욕설로서의 “새끼”와 새 생명으로서의 “새끼”라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 있다. 전자는 세상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폭력과 편견이고, 후자는 시인이 고집스럽게 견지하고자 하는 삶의 진실에 해당한다. 시인의 목표는 전자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통해 후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끼”는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과 싸우면서 진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시인 자신의 초상이다.
시인은 “맞아도 좋으니 지금은 이 새끼에게 젖을 달라”고 한다. 이때 “젖”은 “새끼”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는 생명의 원천이다. “새끼”의 “젖”을 향한 절규는, 거짓된 아비의 폭력으로 인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진실을 얻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새끼”는 또한 기득권에 편승하면서 적당히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조상의 젖을 빨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과거의 속화된 전통이나 기성세대에 빚을 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젖 좀 달라면 대뜸 나오는 말이 이 새끼가! 였다”라는 시구에는, 진실을 요구하는 시인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냉대와 폭력이 함의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마저도 기꺼이 수용한다. “맞다 이 새끼”라고 하면서 세상의 어떠한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진실과 자존을 굳건히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고루하고 거짓된 세상의 욕을 “얻어 처먹는 새끼가 낫다”라는 시적 역설에 도달한 것이다.
2. 나는 고독하다, 고로 존재한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서 진실을 찾아가는 “나”, 즉 “이돈형”이 시인으로 탄생하는 일차적인 방식은 고독 속에서 상실된 자아나 비루한 삶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자아 상실의 핵심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랑의 결핍이다. 이때 사랑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하거나 잡스러운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 가치와 윤리를 넘어서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그가 자주 사랑 노래를 부르지만, 그 노래에는 언제나 떠나간 사랑 혹은 결핍된 사랑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세속의 상식적 사랑을 뛰어넘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사랑 이야기가 항상 세상의 상식을 전복하거나 역설하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오늘의 날씨는 비
비로 먼 곳을 바라볼 수 없는 나는 한 사람에게로 떨어져 온종일 쏟아지는 것에 대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있는 먼 나라에게
그 먼 나라의 모든 안녕에게 두 손 번쩍 들고
몸 구석구석 퍼진 야윔만 데리고 나왔으니 부디 나무라지 마시길
거제입니다
7월의 거제는 보랏빛 수국이 한창이고 쏟아지는 것들은 여전히 내게서 달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모퉁이를 돌다가 내게 들킨 수국이 당신을 닮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습니다만 수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은 하루가 짧고
혼자 그리워해야 할 사람은 남은 생으로도 모자라
걸었습니다 쏟아질 것들이 다 쏟아져 이 비에 쓸려간다 해도 먼 나라의 한 사람이 나를 굽어봐
보랏빛 애탐이 한창입니다
왜 하필이란 말에는 꼭 내가 들어 있을까요(「혼자 놀아 미안한데 그래도 오늘은 내가 기억해 주길 바라는 한 사람을 그리워해야 하니까 이해 요망」 전문)
이 시는 “비”와 “수국”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비”는 단순히 “오늘 날씨”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나”가 겪는 슬픔과 눈물,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볼 수 없게 하는” 단절감을 상징한다.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나”가 “한 사람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비”는 이별의 상징으로서, “나”는 “비”에 갇혀 사랑하는 “한 사람”과 단절될 수밖에 없게 한다. “한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지닌 존재, 사랑하는 그 사람이 지금 있는 곳은 “먼 나라”이다. 그는 당장 만날 수 없는, 아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시인은 그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7월의 거제”로 떠나온 것이다. 그곳에는 마침 “당신을 닮”은 “보랏빛 수국”이 피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국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이 지닌 비극적 운명이다. 언제나 “먼 나라”에만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은 “나”를 외면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리움에 지친 “나”는 몸과 마음의 “야윔”과 “애탐”만 키운다.
그런데, 시인은 결구 부분에서 “왜 하필이란 말에는 꼭 내가 들어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야윔”과 “애탐”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그 진정한 실체는 부재하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자각한다. 운명이란 현실의 논리를 넘어선 초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인간의 처지와 관련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나”의 그리움은 유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열망에 속한다. “나”는 그 사랑을 위해 그 순수한 그리움을 위해 “비”가 “쏟아지는” 장소인 “거제”로 온 것이다. 이 자발적 고독의 공간에서 “나”는 “수국”을 닮은 단 “한 사람”을 생생하게 떠올리면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나”는 불완전한 사랑의 경험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 운명의 주인공 혹은 낭만적 아이러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고독은 진정한 사랑의 결핍과 함께 타인과의 단절감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 현대인의 단절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과학 문명과 물질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스스로 고립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을 때는 세태 비판이 되지만, “나” 자신에게서 찾을 때는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된다. 이돈형 시인은 주로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
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서움도 아닌 달고 맵고 신맛이 어우러진 양념에 설핏설핏 물드는 면발
면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낌없어
송골송골 땀방울 꽤나 맺히게 하려는지 얼맵게 뒤섞여지면 젓가락 끝부터 혀에 갖다 대게 된다
살과 살을 비벼도 타들지 못하고 사람에게 맨 마음 비벼 봐도 비벼지지 않을 때가 많아
비빔국수를 한 젓가락 휘휘 감아 돌리는 동안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비빔국수」 전문)
이 시는 “비빔국수”라는 일상적인 음식을 소재로 한다. 물론 이 시의 목적은 음식 자체의 맛이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비빔국수”를 매개로 현대인이 겪는 소통의 부재와 그로 인한 근원적 고독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의 전반부는 “비빔국수”에 대한 예찬과 “섞임”의 과정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에 집중한다. 시인은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라고 하면서 그 매력의 근원을 “비빔”과 “섞임”에서 찾는다. “비빔국수”의 “면발”을 보면서 “달고 맵고 신맛이 어우러진 양념에 설핏설핏 물드는”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흰 면”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종의 재료들—“상추”, “오이”, “메추리알”, “양념”—과 어우러지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 매력은 “면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낌없이” 신뢰할 만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 시는 물론 음식으로서의 “비빔국수” 자체를 초점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 시의 핵심은 “살과 살을 비벼도 타들지 못하고 사람에게 맨 마음 비벼 봐도 비벼지지 않을 때가 많아”라는 부분이다. 이 구절은 요즈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단절감을 문제 삼고 있다. “비빔국수”는 다양한 재료들이 쉽게 섞여 조화를 이루지만, 인간들은 저 잘난 맛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현대인은 대부분 “살과 살을 비비는” 육체적 접촉은 있으나, 마음과 마음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타들지 못하고”) 살아간다. 진솔한 “맨 마음”으로 다가가면서 소통을 시도해 봐도(“비벼 봐도”) 어우러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나”는 깊은 단절감과 부러움을 느낀다 “비빔국수를 한 젓가락 휘휘 감아 돌리는 동안/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 시는 가장 일상적인 소재인 음식을 통해 심오한 인간 문제를 탐구하는 솜씨가 마뜩하다. 시상의 결은 다르지만, 생활 공동체의 “고담하고 소박한” 전통을 노래한 백석의 「국수」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고독한 존재로서 “나”는 다른 시편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가령“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3일 내내병실의 안색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혼자 아팠다”(「3인실」 부분)라고 고백한다. “병실” 생활을 하면서 삶의 고독을 체감한다. “한 사나흘 아파보니 사람 안에 사람 없이 지낸다는 게 얼마나 모진 일인가를 알겠다”(「일 없다」 부분)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고독의 원인은, “도망치듯/ 찢겨지듯 사람이 밀려난다”(「바람이 불어서 흔들린 것이 아니라 너를 보내고 돌아와」 부분)에 드러나듯이, “너”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또한 “나”가 느끼는 자아 상실감도 고독의 원인이다. 가령 “나는 뿔뿔이 흩어졌다(「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영원을 새끼 치는 동물인 양 영원히 뿜어져 나오는 울음을 가진 동물인 양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너희의 울음까지 모두 울어줄 테니 다 내게로 오라, 두 팔 벌리고 막 태어난 신의 새카만 새끼 흉내를 내다 일어서는 내 멸망의 그림자에 밟힌 순간부터」 전문)라고 말할 때의 “나”가 그렇다. “나”는 “내 멸망의 그림자에 밟힌 순간부터” 자아를 상실하고 말았던 셈이다. 이때 “나”에서 비롯된 고독은 “너”의 부재와 맞물리면서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3. 어리연꽃이 피어 있는 헤테로토피아
“나”는 고독과 단절의 원인인 사랑의 결핍, 타자와의 단절, 자아 상실 등을 극복하기 위해 자아의 근원을 탐색한다. “나”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자신의정체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나”가 자신의 기원을 찾아보기 위해 우선 관심을 보이는 것은 태어나기 이전에 꾸는 꿈인 태몽이다. 태몽은 전통적으로 혈연적 계보와 운명, 성격 등 한 개인의 삶이라는 전체 서사의 복선 구실을 한다. 태몽에 등장하는 상징물이나 그와 관련된 서사는 그 주인공이 겪게 될 삶의 역정과 운명을 함축적으로 예시해 준다. 그래서 태몽의 상징과 서사는 그 주인공이 자기의 삶에 대한 정체성과 자긍심을 부여하는 장치가 된다.
내 태몽은 캄캄한 동굴 속에서 한 송이 어리연꽃을 안은 거라 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날 낳으시고
당신은 그렇게 날 남기시어
빗방울 떨어지고
두 손 그러모으며 떨어지는것만 보고 있습니다
반쯤 진 하루가 떨어지고별안간이떨어지고당신은 그리움을 떨어뜨리고있어 나는 빗방울만 들여다봅니다
어린 날 울다 잠들듯 잠에서 막 깬 빗방울이 잠깐의 꿈을 털어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둠을 입으로 후후 불어내며 당신이 나를 바라보듯
나는 온 그리움을 태워 낸 흰 빛깔로 첨벙첨벙 수면 위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눈물겨운 일들은 어떻게든 끝을 보고 만다는 것을 실감하며 내가 아직 어려서 눈물 떨구어도 당신은 분명 나를 안을 겁니다
그게 내 태몽이었으니까요
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태몽”을 누가 꾸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문맥상으로는 “당신” 즉 어머니가 꾼 것으로 보인다. “나”는 자신의 “태몽”이 “캄캄한 동굴 속에서 한 송이 어리연꽃을 안은 거”였다고 말한다. “나”의 “태몽” 즉 존재의 연원은 “캄캄한” 카오스의 상태에서 나타난 “어리연꽃”같이 순수하고 청초한 생명이었다고 한다. “당신은 그렇게 날 낳으시고/ 당신은 그렇게 날 남기시어” 비로소 “나”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떨어지는 “빗방울”은 새 생명의 시작과 출발을 의미하고, “당신”은 “나”를 이 땅에 존재 근거는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이다. “당신”이 “그리움을 떨어뜨리고”, “어둠을 입으로 후후 불어내”는 것은 “나”를 향한 이타적인 모성애의 표현이다. 또한 “빗방울”이 “꿈을 털어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순수한 자연과 “나”의 동질성을 표현한다. 이때 “나는 온 그리움을 태워 낸 흰 빛깔로 첨벙첨벙 수면 위를 건너기 시작”했다고 노래한다. 태몽 속에서 “나”는 새 생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나”의 태몽이 “그리움을 태워 낸 흰 빛깔”이라는 것이다. 꽃이 “흰 빛깔”이라는 것은 “나”가 “어머니”의 소망 혹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생명력을 간직하고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직 아려서 눈물 떨구어도 당신을 분명 나를 안을 거”라는 확신도, “나”라는 새 생명의 잉태가 어머니의 무한한 포용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해 준다. 이처럼 순수한 자연의 원리에 따라 새 생명을 향한 어머니의 근원적 그리움과 이타적 모성애로 이루어진 “나”의 기원은 흠잡을 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시의 결구에서 “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말은 “나” 자기의 삶에 대한 자긍심의 발로인 동시에 모든 생명의 기원은 무결점의 순수 속에서 가능하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물론 태몽 이후의 삶은 전적으로 “나”의 몫일 테지만, 이 깨달음으로 “나”는 자신의 기원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고독과 슬픔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고독의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이제 치유의 장소를 찾아 나선다. 현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일상과는 거리가 있는 장소가 필요한데, 프랑스 철학자 푸코(M. Foucault)는 이러한 장소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말했다. 헤테로토피아는 사회 질서 밖의 현실 공간으로서 일상적 삶에 대한 심미적, 사회적 차원에서 비판, 성찰을 유인하는 곳이다. 아래의 시에 등장하는 “삼탄역”은 “나”에게 헤테로토피아의 일종이다. 그곳은 시의 공간적 배경을 넘어 현실을 성찰하고 비판하면서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소이다.
충주에 가면 애기 손만한 삼탄역이 있다
마음의 바깥이 그리워지는 날 있으면 삼탄역에 가보시라 털레털레 빈손을 흔들며 삼탄역에 가보시라
몰려왔다 몰려가는 것들이 없으니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가며 새소리에 옮겨 다니는 나무그림자를 봐가며
가보시라
말 못할 말이 있거든 슬금슬금 흘려가며 망할 것이 있거든 슬금슬금 버려가며 사람의 뒤편이 일거든 그건 슬금슬금 주워가며
도착하면
사람이나 기차는 기다리시지 마시라
역 앞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 햇빛에 글이나 써보시라
노란 우체통은 빠른우편이니 천등산 도깨비에게 보낼 글을 써보시고 빨간 우체통은 느린 우편이니 받으면 눈물부터 흘릴 사람에게 써보시라
무얼 먼저 부쳐야 할지는 그대의 선택이니 나에게 물어보지 마시라
나는 여기서 도깨비랑 며칠 더 놀다 갈 테니(「삼탄역」 전문)
이 시에서 “삼탄역”은 일상적 삶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치유의 공간이다. “애기 손만한” 작고 소박한 역, “몰려왔다 몰려가는 것들이 없”는 고요한 역, 그곳은 외부의 시끄러움이 없어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탈속의 장소이다. “미움의 바깥이 그리워지는 날”은 마음의 안이 심란하고 각박한 날을 의미할 터, 그런 날에 “삼탄역 가보시라”는 것은 그곳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서 “슬금슬금” “말 못할 말”은 “흘려가며”, 버릴 것은 “버려가며”, 얻을 것은 “주워가며” 지내라고 한다. 이 권유는 타인을 향한 것인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다. 이때 “슬금슬금”이라는 말의 반복은 무슨 일이든 호들갑을 떨지 말고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사람이나 기차는 기다리시지 마시라”는 것도,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기대를 접고 유유자적하라는 뜻이다. 이 권유는 “삼탄역”에서는 세속적인 습속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 대신에, “간이의자에 앉아 햇빛에 글이나 써보시라”고 하는 것은, 진지한 글쓰기와 소통을 통해 성찰과 치유를 모색하라는 의미이다.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란 우체통”과 “빨간 우체통”은 타인과 소통을 상징한다. “노란 우체통”은 현실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인 “천등산 도깨비”에게, “빨간 우체통”은 슬픔의 존재인 “받으면 눈물부터 흘릴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넣는 곳이다. 이 “우체통”들은 “삼탄역”이 현실에서 자유로운 장소이자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장소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어느 곳에 먼저 편지를 넣을지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은 “삼탄역”이 주체적 자아를 회복하는 장소라는 의미이다. 이는 “삼탄역”의 아주 중요한 역할이다. 마지막 시구에서 “나는 여기서 도깨비랑 며칠 더 놀다 갈 것”이라는 것은, “나” 역시 “그대”처럼 자유롭고 정화된 내면을 지닌 주체로 머물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삼탄역”은 “나”를 포함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회적 규범, 삶의 상처, 현실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장소이다. 다시 말해 “삼탄역”은 실제 현실에 존재하지만, 일상과는 이질적이거나 반대되는 장소로서의 헤테로토피아이다.
4. 강 같은 슬픔과 한 몸으로 살고지고
“나”의 도드라진 감정 가운데 하나는 슬픔이다. 삶의 슬픔은 보통 부정적인 감정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돈형의 시에서는 다르다, 슬픔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삶의 근본적 의미와 마주하게 하는 감정이다. 슬픔은 또한 윤리적 자기 성찰을 촉진하면서 타자와의 공존, 배려의 마음을 북돋아 준다. “나”는 슬픔을 경험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포용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도덕적 성숙과 연대의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는다.
손톱만 한 슬픔을 앉혀놓고 바르게 살자 타이르는데 해맑게 웃는다
떠들어봐야 제 입만 아플 거라는 듯 슬픔이 방바닥에 슬픔은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라고 써놓고 빤히 올려다봐
웃어줄까 울어줄까
주위를 둘러봐도 혼자인 것은 없고 어쩌다 혼자라고 우기는 것은 거짓말처럼 제 몸에 무료만 칭칭 감고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업어 키운 슬픔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는 듯 눈 흘기는 저 능청에
나는 배알 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되어 슬픔 없는 곳을 찾다가
이 악물고 온 이 삶이 슬픔 없었으면 김빠진 사이다나 앙꼬 없는 찐빵처럼 밍밍했을 것 같아
내게 강 같은 슬픔에게 손가락 걸며
오늘부터 일심동체!(「내게 강 같은 슬픔」 전문)
이 시는 “슬픔”을 거부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 재인식하면서 그 역설적 가치를 노래한다. 그 출발은 “슬픔”을 “손톱만 한” 작고 귀여운 존재로 의인화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감정으로 여겨지는 “슬픔”을 작고 귀여운 대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작은 “슬픔”에게 “바르게 살자”고 타이르지만, “슬픔”은 오히려 “해맑게 웃”으며 “나”보다 더 깊은 통찰적 인식에 이른다. 즉 “슬픔은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라고 강변하면서 “주위를 둘러봐도 혼자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사실 “슬픔”은 사람과의 깊은 공감과 연대를 위한 소중한 매개 역할을 한다. “슬픔”을 함께 나눈 사람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보다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나”가 오히려 “슬픔”에게 삶의 지혜를 얻는 이러한 의인적, 역설적 관계의 설정은 이 시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소이다.
시의 뒷부분에서, “나”는 “슬픔”의 능청스러움에 못 이겨 “슬픔 없는 곳”을 찾아 떠나가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다. “나”는 생각을 바꾸어 “슬픔”의 소중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다. “이 악물고 온 이 삶이 슬픔 없었으면 김빠진 사이다나 앙꼬 없는 찐빵처럼 밍밍했을 것 같아”라고 한다. 마지막 시구에서는 “내게 강 같은 슬픔”이라고 하면서 “슬픔”이 “강”물과 같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한다. 미국의 흑인영가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슬픔”이 평화만큼이나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슬픔”과 “일심동체”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사실 그렇다.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수용하고 극복해 가느냐의 문제이다.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선명해지고, 자아의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슬픔”이 도피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완성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나”는 또한 삶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비움의 지혜를 생각한다. 비움은 기존의 자기 정체성, 사회적 역할, 외부로 향하던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노자가 도덕경 48장에서 진정한 도(道)는 날마다 비워내는 것(爲道日損)이라고 말했듯이, 비움은 정신적으로 높은 삶을 살아내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비움은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한 조건이자 모든 창조의 바탕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나”는 이러한 비움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깊이 인식하고 자유롭고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
숨소리가 들려
한바탕 쏟아져 아무것도 없는 가을의 무심 아래 숨소리가 들려
한 사람이 흘리고 간 가을을 찾아 가을아, 가을아 불러보다가 내가 다녀온 가을과 내게 남아있는 가을을 꼽아보다가 어리석은 일 같아 거둬들인다
온 적 없으니 간 적 없다는 가을의 말에 무릎 탁 치며 잠시 왔다 가는 게 나라서 올려다 본 하늘이 더 파래져
가을 심장 정중앙에 천국에는 없는 몇 개의 기도를 올려놓고 멀찍이 떨어져 죽음보다 더 캄캄한 사랑이나 해볼까 싶어지는데
아침부터 쓸쓸해 죽겠어, 쓸쓸해 죽겠어를 흥얼거리다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쓸쓸해와 뜨거운 정사를 나누겠다고
그리워질 것들을 모조리 버리고 있다
나를 낳은 나와 내가 낳은 나와
이 죽일 놈의 나 같은(「가을은 당부가 비어있는 곳을 찾아 군데군데 사람을 흘리고 나는 지상의 한 귀퉁이에서 여기가 쓸쓸함의 천국이라고 박수를 쳐대며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쓸어버리는데」 전문)
이 시의 “나”는 “가을”을 배경으로 인생의 쓸쓸함을 느끼면서 비움의 역설적 의미를 깨닫는다. 첫 행에서 “한바탕 쏟아져 아무것도 없는 가을의 무심 아래 숨소리가 들려”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떨어져 내리는 조락의 계절에도 생명과 사랑의 “숨소리”는 살아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흘리고 간 가을”은 어디론가 떠나간 사랑의 공허한 흔적이다. “한 사람”을 부르듯 “가을아” 하고 불러보다가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온 적이 없으니 간 적이 없다는 가을의 말”은 사랑과 이별이 결국은 모두 “나”에 달여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이 떠나갔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그와 “나”와의 상대적인 사건이니, 결국 “나”로부터 일어난 일이다. 이 사랑의 서사에서 이별의 주인공은 “한 사람”이하는 타인이 아니라 결국 “나”(“왔다 가는 게 나”)인 것이다.
모두가 “나”의 탓이라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인식은 “죽음보다 더 캄캄한 사랑”을 소망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결핍을 보상받고 싶은 소망일 뿐, 현실은 “한 사람”이 떠나간 뒤에 찾아온 “쓸쓸해”라는 정서가 지배한다. 중요한 것은 “나”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쓸쓸해와 뜨거운 정사를 나누겠다”라는 마음이다. 자발적인 고독 속에서 모든 욕망을 떨쳐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리워질 것들을 모조리 버리고 있다”라는 것도 사랑의 욕망과 미련을 비움으로써 자기 존재의 실감을 느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과거의 “나”를 버림으로써 오늘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인데, 시의 제목에서처럼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를 쓸어버리”는 과정을 통해 자기 갱신에 도달한 셈이다. “나를 낳은 나와 내가 낳은 나와 이 죽일 놈의 나 같은” 자아 분열, 자기혐오를 벗어나 진정한 자기애로 나가는 것이다. 이때 “나”에게는 다시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리연꽃” 시절로 돌아갈 가능성이 활짝 열린다.
5. 그래서 나는 ’꼴통‘이다
그렇다, “나”는 현실적 자아에 관한 깊은 탐구와 성찰을 통해 진실하고 새로운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의 주인공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일은 시가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가장 주관적 문학 양식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직핍하게 탐구하는 데 매우 유용한 언어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자아를 탐구하고 성찰하는 방법으로는 역설적 인식이 빈도 높게 활용되고 있다. “나”는 자신의 삶을 고독, 슬픔, 소외, 단절 등으로 인식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깨달아서 자유롭고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기 위한 일이다. 이 역설적 인식은 가식적인 “나”를 넘어서 진실한 “나”로 나아가는 통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과정을 이미 「이돈형」이라는 시에서 보았거니와, 아래의 시는 그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역설을 통해 세상의 편견에 맞서 진실을 찾으려는 성향은 비슷하지만, “나”의 존재 의미보다는 삶의 실천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늘 꼴통, 꼴통 하고 불렀다
…(중략)…
덕분에 나는 죽여줬고 죽여줌에 죽여줌을 더하다 끝내는 나를 죽이게 되었으니 진짜 꼴통이 되었으니
꼴통만큼 진정성 있는 말이 어디 있을까
한다면 하는
하겠다면 하는
하지 말래도 기어코 하는
오늘도 나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보란 듯이 꼴통짓에 몰두하고 있다
참 좋은 말이다
꼴통,(「꼴통」 전문)
이 시의 첫 문장에서 시인은 “아버지는 어린 나를 늘 꼴통”이라고 호명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의 논리에서 “꼴통”은 머리가 나쁘고 생각이 얕은 사람 혹은 고집이 세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러한 의미를 넘어선다. “나”는 “아버지” 혹은 세상의 편견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꼴통”을 “한다면 하는/ 하겠다면 하는/ 하지 말래도 기어코 하는” 사람이라고 재정의한다. “나”에 의해 다시 정의된 “꼴통”은 의지가 강하고 실행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획득한다. 현실의 용법으로는 천한 말이었던 “꼴통”이, 이제는 “참 좋은 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 의미의 반전을 통해 “나”는 자기에게 주어진 세상의 편견을 물리치고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킨다. 시인의 임무 가운데 하나인 창의적 언어를 통해 새로운 존재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나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보란 듯이 꼴통짓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이다.
내 안의 진실한 “나”를 찾는 일은 관습에 얽매인 현실의 자아를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끝내는 나를 죽이게 되었으니 진짜 꼴통이 되었으니”라는 시구는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내가 “나를 죽이는” 일은 갑각류의 탈피 과정과 유사하다. 탈피는 기존의 낡은 껍질을 버림으로써 새로운 몸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죽이는” 일은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시인에게 “나”는 곧 언어와 동일시된다. 이때 “나”는 낡은 언어를 갱신하여 자아를 갱신하고, 자아를 갱신하여 세계를 갱신하는 창조자의 반열에 오른다. “꼴통” 혹은 “새끼”라는 역설적 자기 명명, 이것은 거짓을 죽여야 진실이 살아나는, 낡은 언어를 죽여야 새로운 시가 태어나는 묘법이다. 이 묘법은, 이 글의 제사(題詞)에서 보았듯이 “광활한 우주” 혹은 온 세상과 한 몸이 되어 자유로운 상상을 실천하는 “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 이돈형은 “참 좋은, 꼴통 새끼”가 맞다.
---애지 봄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