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의 꿈 외 4편
조온윤
눈 내리는 설산 위에
조난된 꿈에서
옆에 작은 눈사람을 하나 만들었다
이 소슬한 꿈의 고도로부터
바깥의 빛과 소음이 나를 깨워주길
기다리는 동안
눈사람과 말 섞으며
춥고 외로운 시간을 견뎠다
창을 깨며 구조대가 찾아오듯
환한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다가도
설산 위에 그대로 두고 와버린
눈사람이 떠올랐다
만년설로 지어져 영원히 녹지 않을
그러므로 영원히 홀로 있을
그 사람을
우뚝하게 솟아 있던 꿈속의 설경은
현실의 온기를 쬐는 순간
줄줄 흘러내리고 말겠지만
손을 호호 불어가며 둥그렇게 뭉쳤던
사람의 모양은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만년의 친구가 되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다시 외로운 산에 오를 나를
언젠가 다시 곁이 필요할 나를
술래의 등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개가 있었다
개는
돌아보는 순간 시야에서 달아나는
제 꼬리를 쫓으며
한참을
제자리에서 빙빙 빙빙 돌았다
개가 잡고 싶어 하던 꼬리는
지쳐 포기하는 순간에라야 사라졌는데
정말로 사라진 건 아니고 그저
개의 엉덩이에 그대로 달려 있을 뿐이었다
잡을 수 없는 꼬리의 존재를
개가 느끼듯이
언뜻 고갤 돌리는 주변시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의 뒷모습이 비쳤을 때도
등을 밀고 싶었던 것 같다
너 아무도 곁에 없대도 서 있지만 말고 원하는 곳으로
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등에 손을 얹어주고 싶어서
오래도록
자꾸만 도망치는 뒷모습을 찾았던 것 같다
혼자 하는 술래잡기처럼
제자리에서
빙빙 빙빙
공전 소설
아침에 걸어갔던 길을 저녁에 걸어오는 동안
베이지색 코트를 입는 유행이 지나가고
스스로 멈추고 움직이는 자동차가 발명되고
세상에 남은 마지막 서점이 문을 닫고
펼친 책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이 남극해에 떨어지고
개구리목의 또 한 종이 멸절하고
도로교통법이 개정되고
건널목에 서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수명 연장에 관한 새로운 논문이 발표되고
건강한 청년들이 부대로 징집되고
세기말을 기억하는 한 세대가 저물고
무수한 사건들이 나를 둘러싸고 원을 도는
어지러운 삶을 사는 동안
거리에는 온통 적색경보가 울리고
수변목의 돌연변이종이 연안에서 발견되고
누군가가 이런 순간들을 떠올리며 소설을 쓰고
여느 날처럼 아홉시의 뉴스가 끝나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또 다른 소식들이 저편에서 몰려오고
문 두드리기
그 얘기 들었어?
툭하면 자리에서 안 보이던 그 친구
어느 날에 완전히 사라졌다는 얘기
자꾸만 흩날리는 몸을 벗고
자꾸만 상해가는 마음을 벗고
이상한 소문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는데
잠깐만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나와서 얘기를 좀 하자고
문을 두드려봐도
더는 열리지 않았지
이제는 우리가 싱겁게 나누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잖아
자꾸만 잊어버리고 마는 그 이름을
서로에게 되묻지만 말고
우리 그만 돌려주자
몸도 마음도
아무것도 갖지 않고 사라진
문 너머의 친구에게
그 애가 좋아하던
이십세기 소년의 마지막 권을
가사 없는 음악만 흘러나오던 이어폰을
이해할 수 없는 은유들이
비밀 정원처럼 무성하던 습작의 노트를
그 애는 보기보다 강하니까
쉽게 울지도 않으니까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을 테지만
웃기고
한심하지
이런 얘기를 나누고 돌아오면
우리는 조금
안심이 되었던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야기 속에서 정말로
함께 있던 것 같으니까 말이야
어디서든 네가 웃고 있길
좋아하던 만화책의 난만한 그림체처럼
노트 속에 감춰두었던 환한 목소리처럼
문을 두드리면 대답이 들려오길
네게서 빌려온 부끄러움은 아직
꺼낸 적 없는 내 이야기 속에
잘 간직하고 있어
태풍이 지나가고
머리칼에도 얼굴이 베일 것처럼
바깥엔 태풍이 분다
때로는 동물과 식물로
때로는 산불과 테러로 태풍은
매번 이름도 표정도 바꿔가면서
손을 뻗으면 만져질까?
공중에 손가락을 빗살처럼 꽂아
하염없이 빗겨준다면
사납던 시간은 부드러워질까?
겨울옷 뜨개질하듯
시간의 긴 생머리를 땋아준다면
아이의 어깨에 걸려 있는
줄줄이 소시지 같은 모양으로
세상이 다시 사랑스러워지기를
개인정보 및 약력
이름: 조온윤(曺溫潤)
약력: 1993년 광주 출생. 201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햇볕 쬐기』 『자꾸만 꿈만 꾸자』, 동인시집 『우리는 같은 통점이 된다』가 있다. 공통점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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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온윤의 만년의 꿈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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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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