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점의 서사, 그 무거운 꿈틀거림
최은묵(시인)
자극이 고통으로 바뀌는 짧은 순간 시인의 감각은 섬세하게 예민해진다. 외적요인이 내적갈등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시각화를 이루는 방식은 다양하다. 이때 시인은 보이지 않는 감각을 문자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박정옥 시인의 두 번째 시집 『lettering』에는 기호마다 통증이 가득하다. 문자가 통점을 지니는 순간 그것들은 시공간의 제약 없이 꿈틀거린다. 시인의 내면을 거쳐 새로운 명(命)을 지닌다는 것은 “애칭만큼 닳고 통증만큼 닮은/ 창문을”(「lettering」)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창문’은 타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세상을 관조하며 느낀 통증을 공유하려는 통로인 셈이다. 이 시집을 꿈틀거림으로 가득한 창문이라 말한다면, 박정옥 시인은 그곳을 통해 살아있음을 알리려는 사물의 몸짓을 띄우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창문’은 수록된 편편마다 다른 모양과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박정옥의 첫 번째 시집 『거대한 울음』이 자아의 갈등에서 파생된 통증을 뼈대로 이루고 있다면, 두 번째 시집은 타자의 울음에 기꺼이 가슴을 펼치려는 확장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외연을 넓히려는 시선은 보편적 공감을 담보한다. 독성을 지닌 협죽도에 크로아티아 내전의 잔상을 담은 「꽃의 안감」이나, 함평군 손불떡집 모녀의 의수를 들여다보는 「그 동네 이름이 아프다」 등 여러 시편에서 시인의 서사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시선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온 구체적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그것은 시적대상을 체화시키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발생한 자극이 어느 순간 동질의 통증으로 감지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잔금이 많아 그런지
생각이 자꾸 갓길로 미끄러지네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라지고 얇아지고 늘어지는 손
사방연속무늬 손바닥이
마음 길이라며
풀을 뽑다가도 문득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문득
손과 무관하게 자주 발목을 접질러서
문득 문득 낮달을 쳐다볼 때
조금은 서럽고 누추한
슬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싶었네
실업의 터널에서 오래 뒹굴다
잡풀 많은 갓길로 가지 않으려 했으나
갓길은 갓 생겨난 길 같기도 하여
꾀꾀로 뛰어 봐도 그 바닥
주저앉고 난 뒤에야 넓이를 볼 수 있었던
바닥, 그 팔딱이는 급소를 찔러보면
허투루 내민 빈손이 자주 부어올라
차라리 구체적인 손바닥을 앓았으면 했네
-「수상한 손금」전문
사유는 기다린다고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시인은 “손금”을 통해 삶의 여정을 비유하면서 굵고 선명한 손금이 아니라 “잔금”에 눈길을 둔다. 순간순간 선택과 결정의 과정을 반복하는 삶에서 “잔금”이 지닌 상징은 지독한 고민의 흔적이다. “사방연속무늬 손바닥”에서 “마음 길”을 찾은 까닭이 미끄러진 자아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만은 아니었을 테니, “갓길”로 명명된 세상에서 새롭게 얻어낸 감각은 “주저앉고 난 뒤에야 넓이를 볼 수 있었던” 타자의 통증일 것이다. 이때 감지한 통증은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다. 다시 말해 통증은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몸의 언어다. 굵거나 가늘게 패인 삶의 흔적이 무수한 손바닥. 그런 손을 보여주거나 내민다는 건 손바닥에 담긴 ‘바닥’의 의미를 감지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박정옥 시인이 생각의 바닥을 더듬어 깨우친 질감을 ‘레터링’하고자 낮게 깔린 언어를 고른 것은 필연으로 보아도 마땅하다.
웃을 일 없는 집에서
불을 끄고 누웠는데
웃음소리가 났다
창문에서 요란하게 났다
창에 붙은 은행잎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푸른 물이 들도록 웃음을 비벼댄다
바람이 되기 알맞은 웃음이 산발을 한다
지나는 취객이 횡설수설 오줌을 누는지
가로등이 시큼한 냄새로 웃는다
은행 알에서 냄새 난다고 지랄하며 웃는다
어제 떨어진 웃음도 배꼽이 빠졌다
이 밤은 나무가 웃기에 알맞다
-「웃음을 쏟았다」전문
눕는다는 건 가장 낮아지려는 몸짓이다. “불을 끄고” 누우면 서사가 꿈틀거리는 “창문”을 느낄 수 있다. 너머의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 앞에 선다. 유리창에 반영된 이미지는 대칭을 이룬 자아다. ‘객관적인 나’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나’를 지닌 이미지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공간에서 독특한 화자가 되어 꿈틀거린다. 그때 시인은 데칼코마니 같은 또 하나의 자아를 통해 내적 감각을 끌어올릴 수 있다.
“웃을 일 없는 집”은 거대한 울타리를 지닌 화자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낸 배경이다. 창문에 등장한 “웃음”은 삶의 역설적인 단편이다. 웃음은 바깥의 것이고 안쪽은 어둠의 공간이다.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만드는 창문은 시인이 다른 세계와 만나는 지점을 상징하며, 이때 외부에서 발생한 “웃음”에 반응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내면의 결핍을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와 세계의 경계를 온몸으로 감지한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들었던 “은행잎”, “취객”, “가로등”, “나무” 같이 시적 공간에서의 “웃음”은 통증을 공유하기 위해 반드시 “창문”을 지나야만 하는 당위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캄캄한 입 속에서 급히 튀어 나온 말은 어둠입니다. 이목구비 또렷한 어둠 또한 고립입니다. 햇빛 차단된 식물성 몸짓으로 던지는 절벽입니다.
입 속은 그러니까 말이 도배된 엄숙한 방으로 어제도 오늘도 그제도 추상적이게 네, 모난 방에 갇혀 도착을 모르고 간략한 일생이 되려합니다. 서사가 되려합니다.
벽지처럼 서 있던 어떤 것은 불씨처럼 살아나 말과 말 사이 모방을 본뜨는 벽보가 되려합니다. 누구에게 얼굴이 되려합니다. 목소리를 끄려합니다. 그리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말의 뒤에 숨어 박수를 칩니다.
박수를 받고 튀어버립니다.
-「말 방」전문
「웃음을 쏟았다」에서 “나무가 웃기에 알맞”은 “밤”은 시적대상과 밀접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시인만의 영역이고, 이곳에서 만난 사물은 시인의 감각을 거쳐 형상을 지닌다. 그러니 「말 방」에서 만난 “어둠”은 시어(詩語)가 되기 이전 모든 감각을 지닌 처음의 문자이며, 그중에서 무엇이 “벽보”가 되고 “얼굴”이 되는지 주시할 필요가 있다. “급히 튀어 나온 말”은 “서사”를 이루지 못한 “일생”일 것이다. 시인은 문자가 되지 못한 소리가 생명력이 짧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유를 품지 못한 채 “어둠”에 머무는 소리는 뿌리 없는 식물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방”이 밀폐된 세계라 할지라도 시인이 온몸의 감각을 이용해 저쪽의 세계로 건널 수 있는 ‘창문’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얼마의 밝기에서 또 어디쯤의 높이에서 만난 소리가 뿌리를 내리고 자생할 수 있는지, 시인이 찾아낸 사물들을 시집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달에게도 뿌리가 있다는 거다
저 강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걸 보면
마디 하나로 닿을 수 있는 이름인 걸 보면
평생 바닥에서
기는 걸 보면
-「달뿌리풀」전문
바닥은 바닥의 몸짓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다. “달뿌리풀”은 ‘달리다’와 ‘뿌리’ 그리고 ‘풀’을 합친 이름으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이것은 “뿌리”로 “강물”이라는 세상을 “단단히 붙잡고”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을 치환한 이미지이며, 그런 대부분의 삶은 “바닥”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본문에서는 “풀” 대신 “강물”에 비친 “달”을 차용해 바닥의 몸짓을 그려내고 있다. 이런 변주가 사물에 얹은 시인의 상상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 “달”과 “풀”은 일체된 심상을 지니며 그때 시인이 어루만진 사물은 생명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창문’ 너머 세계의 어느 지점에서 공통의 통증이 발생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물론 통증은 “티셔츠처럼 나눠 입을 수 없는”(「lettering」) 감각이다. 그렇더라도 각자 지닌 고유한 통증은 “바닥”의 문자로 더듬어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삶이 지닌 이미지는 독립적이며 “어디에도 없는 풍경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사스레피」)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통증에 다가서는 방식이 계층과 상관없이 진솔한 몸짓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철학을 보여준다.
텃밭 가꾼다고
쇠똥 한 무더기 부려놓고
오며가며 바라만 보다
소 눈 같은 어둠 한 구덩 퍼내고
온통 노란 밭이 된 시간에 빠져있다
네가 오는 시간은 납작한 바깥
현기증 나는 꽃다지
쇠냉이 꽃이라 밀쳐놨던
네 꽃말이 무관심이었다고
그런 시간이었다고
-「납작한 시간」전문
박정옥 시인이 「납작한 시간」에서 보여준 “꽃다지”는 꽃이 지닌 겉모습의 수사와 달리 내면적 고립감에 번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즉, 시인은 바닥 낮은 곳에서 꽃을 피우는 “꽃다지”를 통해 계층과 신분에 따른 “무관심”과 차별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을 품기 위해 몸을 낮춰 “납작한” 세계에 들어가는 시도는 앞서 보여준 시인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박정옥 시집 『lettering』은 바닥의 삶에서 찾고자 하는 낮은 곳의 언어이며 동시에 바닥과 맞닿은 삶의 통각을 섬세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서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언어는 무겁게 살아있다. 바닥에 가까운 것들의 호흡을 매만질 줄 안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큰 힘이다. 이런 모습은 시인이 첫 번째 시집 『거대한 울음』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가만 등을 쓰다듬으면 미열이 만져진 것도 같아/ 몇 굽이 생애가 목덜미주름에서 흐느끼는 걸 안다”(「소를 보러 갔다」)라는 고백처럼 시인이 시적 대상에 다가서는 방식이 내면의 울림에 근간을 두고 있음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딸이 며칠 머물다 떠나고
이름을 눈에 두고 간 아이를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멀리
100년을 훌쩍 넘긴 사람들 이름이 생각났다
내리내리 잃고 간신이 붙잡은 아이,
붙들이付乭이는 잘도 컸다 던가
기다리다 또 딸이라 또봉선, 둘째 이모다
삼신할미 두루 둘러서 주시지
둘레, 우리엄마, 셋째다
엄마 밑으로 아들 셋을 보았더랬다
그래서 터 잘 팔았다고 호적은 斗利
친구네 가계도 名作으로 수두룩하다
딸은 그만! 외쳐도 막순이, 말련이 생겼다며
딸딸이에 그만 도분나서 도분이,
이름이라도 아들처럼 불러나 보자 말남이
그래 그런지 급하게
재 넘다 길에서 낳았다는 아들, 질덕이
당연히 아들은 건강해야지, 건가
순하게 잠도 잘 자고 잠분
그리고
측간에서 볼일보다 낳은 분례는
기름지게 땅을 거두었다 했다
세상에 별의별 이름 다 있다지만
별의 별 사람들은 스스로 발광 않는 긴 꼬리 유성
백년이나 멀어져 그만치서 빛났다
-「별이름」전문
타자에게로 방향을 옮기려는 시도는 서사를 확장시키는 동시에 보편적 울림을 이끌어낸다. 「별이름」은 사물이 지닌 속성을 이용해 여러 방향에서 갈등을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이름”에 숨겨진 사회적 갈등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도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새로운 기호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때 이름은 하나의 세계로 존재하며 이름에 내재된 의미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는 이런 사실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느낌에 다가서는 일이다. “100년을 훌쩍 넘긴 사람들 이름” 중에서 시인이 호명한 것은 저마다 어떤 통증을 지닌 이름들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고 웃어넘기기엔 이름에 담긴 뒷이야기가 차라리 처절하다. 이면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똑바로 부딪치면 묵직한 설움에 부딪쳐 그만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통증과 통증은 세월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는 한숨 같은 멈춤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것들이 틈에서 삐져나와 하나의 이름으로 굳어진다. “붙들이”, “봉선”, “둘레”, “막순이”, “말련이”, “도분이”, “질덕이”, “건가”, “잠분”, “분례” 같은 사람들의 세계는 이름만큼이나 낮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을 이루고 대를 잇는 동안 누군가에겐 가장 소중한 언어였을 것이다. “스스로 발광 않는” “별의 별” 이름들을 외면하지 않고 “백년이나 멀어져” 빛을 얹고자 하는 시인의 자세는 그들의 이름보다 더 낮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자매는 무너진 성벽 아래서 분홍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꽃말은 위험, 그리고 강한 독성을 지녔대요
협죽도 라고도 하죠
꽃은 안감 겉감처럼 두 개의 이름과 의미를 가졌다
그날도 세 번째 그 언덕을 오르내렸다
남아있는 총탄 자국과 충돌하는 풍경
이 도시 어디서나 여백을 채우고 있는 꽃
숙소에서 가까운 리바거리를 걸었다
낡삭은 목재 유리문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옥양목에 그려진 꼬레아 풍의 꽃무늬를
복사꽃으로 읽을 뻔 했다
자다르에서 스플릿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내내 꽃의 안감을 읽어 내는 중인데
창을 통과한 네모나고 화사한 햇볕은
평생 묻어둔 꽃의 시간으로 넘겨졌을까
그 시간 그곳을 지나지 않았다면
옥양목을 떠도는 꽃에 대한 시차는
또 달랐을 것인가!
유도화,
네가 이룬 꽃말은 어딘가를 통과하려고
꽃의 안감을 걸어서 다 걸어서
마른 꽃이 되는 슬픔을 건너는 중이다
마른 꽃은 치명적인 독성으로 과묵하고
발칸의 폐허에서 미어지도록 찬란했다
-「꽃의 안감」전문
“이 땅은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는 그 할비들 말을 믿는다”(「마다가스카르에 가면」)라는 고백처럼 시인에게 쉼이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위로하는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런 교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느끼는 삶의 근원적 논제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라 불리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이 담고 있는 역사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게다가 크로아티아 도시 곳곳에는 전쟁의 상흔들이 선명하다. 건물 벽의 총탄자국들은 아름다움 이면의 통증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말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도처의 언어들은 비명보다 무겁다. 도시를 채우고 있는 “협죽도”가 제 몸 안쪽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통증의 시간에 접근하는 방식이야말로 박정옥 시인이 지닌 시적 무게일 것이다.
겉의 화려함 안쪽에 치명적 독성을 지닌 “협죽도”는 크로아티아의 역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가지를 잘라 어항에 넣으면 5분 만에 물고기가 죽을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니고도 겉으로는 아름다운 협죽도. 시인은 협죽도라는 꽃을 통해 ‘안’과 ‘겉’이 다른 크로아티아로 상징되는 이 세상을 예리한 감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꽃의 안감”은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래 된 팽나무를 읽었다
나의 상상을 이해하려는 잎은 상형문자로 활판되었다
오독에 따라 내면이 되어 가는 문자
포구나무라고도 불리는 열매를 씹어 먹다
세월을 받치고 있는 단단한 줄거리를 헤집고
나무의 습지 쪽으로 발목을 넣어본다
이름이 젖어 있다
어두운 수피에 대고 너희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름은 서늘한 목덜미로 나를 꿴다
그 해 누가 목을 매었듯이
잘못 배달된 편지가 있었다
페이지는 납작 엎드린 채였다
마을을 돌고 훌쭉해진 배낭을 멘 우체부
윷판을 벌렸던 마을사람들이 권한 잔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 수원리 거창난민 학살과
경남 거제군 신현면 수월리 거제 포로수용소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는 편지
기다린다... 꾹꾹 눌러 쓴 활판을 기억은 분홍으로 제본 해두었던 것
주석이 필요했지만 대청마루에 던져진 편지는 불쏘시개가 되고
그 나무 여태 젖어 있었는지
새들은 제 그림자에 놀라 나무의 여백으로 날아오른다
거목은 습윤성 분홍으로 감수자 없는 책으로 남았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미안한 독후감이었다
-「그 해 읽은 책」전문
‘거창양민학살사건’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지리산 일대에서 ‘통비분자’라는 혐의로 한국군이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고, ‘거제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1952년 5월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포로들이 일으킨 일련의 소요로 무력 진압되면서 끝난 사건이다.
두 사건은 내용은 다르지만 공통점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대표하는 큰 사건이라는 점이다. 시인은 이런 역사적 통증을 “팽나무”라는 사물을 통해 언급한다. 현대사의 커다란 상처는 국토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때론 왜곡된 사실로 “오독”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세월을 받치고 있는 단단한 줄거리를 헤집고/ 나무의 습지 쪽으로 발목을 넣어”보아야 할 때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언술은 담담하면서도 먹먹하다.
노거수(老巨樹)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팽나무를 통해 시인이 읽고자 했던 것은 전쟁을 고스란히 지닌 나무의 내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목”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살아있는 증표이며 “책”이다. 치유되지 않은 역사는 여전히 현재다. 진행 중인 통증은 언제 어떤 비명으로 쏟아질지 알 수 없다. 젖은 침묵이 더 큰 비명이라는 시인의 내적 고백은 또다시 비명을 “오독”하는 일이 없기 바라는 미안함을 담기에 충분하다.
요즘 부쩍 돌담이 시끄럽다
안팎의 위치에 따라
남북으로 대치되는 돌담
조금씩 허물리는 담을 사이에 두고
말이 자라나는 겹겹의 입술이
돌담 사이 쑤셔 박혀 있다
쑤셔 박힌 말은 한줌 빗물에도
스프링처럼 튕겨나간다
저것은 풍자를 위한 계절의 과녁
푸름의 중심을 겨냥하여
곧이곧대로 넘어가려는 것과
허공에 창문을 가늠하는 것과
서로의 세계를 누르는 압력과
바람의 수평과
그러나 할 말이 많은
저 많은 청개구리들
파랗게 질리도록
돌담을 갈구어
비가 오면
정말
어쩌려고!
-「담쟁이를 넘을 수 없나」전문
“담”은 무엇과 무엇의 경계다. 경계는 긴장을 품고 있다. “돌담이 시끄”러운 까닭은 돌담 사이에 “말이 자라나는 겹겹의 입술” 때문이다. 몸이 없이 “입술”만 존재하는 것들의 소란은 불분명하다. 늘 그랬듯이 세상은 자신만의 말만 뱉을 뿐이다. 그럼에도 “담”이 조금씩 허물어진다는 건 의미 있다. 무엇과 무엇의 경계는 ‘안’과 ‘밖’의 속성을 지닌 크로아티아의 협죽도이고,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분단이고, 잔금이 많은 손바닥이다. 결국 “돌담”은 바닥에서부터 쌓아올린 인위적인 나눔이다. 하지만 “돌담”은 완벽하게 막히지 않고 성긴 상태여서 “바람”의 왕래가 자유롭다.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 이념과 이념 그리고 아직도 분단 상태인 남한과 북한의 이미지까지 연결 지어 읽어도 무리가 없다.
박정옥 시인이 만든 ‘창문’ 너머의 세계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 다양함은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커다란 주제를 지향한다. 이때 “청개구리”는 동질의 가치에 반대하는, 다시 말해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목소리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제는 어루만지는 것을 넘어 통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옮겨가야 할 때이다.
시집 『lettering』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통점’은 “묵은 밭에서 수크령을 뽑”은 자리에 생긴 “커다란 구덩이”(「구덩이」)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몸이 기억하는 반응은 슬픔보다 빠르고 정확”(「나를 멈춰주세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의 세계를 건너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시인에게 고통은 도전이며 방향이다. 모든 자극이 통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통점’을 극대화 시킨 삶이 시인의 걸음이라 할 때, 박정옥 시인은 이것을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고 있음을 이번 시집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걸음에 타자는 동반자다. 손과 손을 맞대는 것은 바닥과 바닥이 만나는 일이다. 그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시를 쓰는 동력일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어루만질 줄 아는 힘은 결코 높은 곳에서 얻을 수 없고 통점에서 꺼낸 언어는 묵직하다.
“등을 대 준다는 건/ 서로 어긋나 있어도/ 지긋이 믿는다는 거/ 어떤 무게가 와도/ 그 너머를 견뎌내겠다는 거”(「등대」)라는 말처럼 한동안 ‘통점’은 박정옥 시인이 타자와 만나는 지표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