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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중보기도
32: 15-35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7.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22. 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31.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34.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35.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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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고 있는 출애굽기서의 마지막 부분은 온통 성막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출애굽기서가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25장부터 40장까지가 다 성막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이런 성막 이야기의 한 중간에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와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범하였습니까?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오래동안 보이지 않자 술렁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아론에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거기에 절하고 음식을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뛰놀게 됩니다. 산에서 내려오던 모세는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새겨두신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여기에 빠진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중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생명을 내어놓은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되지요. 물론 하나님의 뒷모습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난후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두 번째 두 돌판에 새긴 계명을 받고 됩니다.
성막 이야기 한 가운데 나오는 오늘 이스라엘의 범죄사건과 모세의 중보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사건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크게 세가지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첫 번째 우리는 먼저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요?
본문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움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지 40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모세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그들에겐 큰 문제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까지 지도자 모세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물론 강요는 아니었지만 애굽에서 탈출한 것도, 광야를 지나 시내산까지 오게 된 것도 그리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모세에 의해 되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가 없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모세가 오래동안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이제 누가 우리를 가나안까지 인도할 것인가? 라는 두려움과 염려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보이지 않자 곧 바로 세상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40일을 기다리지 못했을까요? 왜 이렇게 빨리 세상으로 향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었다면 모세가 없는 이 40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참으로 중요한 준비 기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모세가 없는 40일 동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모든 일, 모든 생각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몰랐습니다. 그들에겐 여전히 애굽의 근성, 자기 살길을 먼저 생각하는 노예근성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에 늘 민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믿었지만 조그마한 어려움만 생겨도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모세가 40일동안 보이지 않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가 언제까지 앉아있겠느냐 우리도 살길을 찾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송아지 우상 ‘하토르’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너희늘 애굽에서 낸 너희 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사건을 통해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한가지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언제든지 세상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것은 아주 미묘한 덫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주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따먹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말합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12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10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잘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를 절망케 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아래에서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산아래로 내려오면서 백성들이 소리치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모세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손에 든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적어주신 두 돌판이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왜 모세는 두 돌판을 깨드렸을까요? 물론 화가 나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보고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더 이상 언약의 두 돌판이 필요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말씀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누가 부패한 사람입니까? 누가 문제입니까?
뇌물을 받고 정치판을 더럽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 진짜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가장 큰 문제의 사람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두 돌판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깨뜨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바뀌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가슴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내 삶의 위로와 힘이 되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의해 바뀌어지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입니까? 말씀에 의해 바뀌어지는 사람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말씀앞에 세우는 일을 잘 못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부흥회에 참석을 했더니 그 부흥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주일날 교회를 오면서 세가지 물건 중에 하나를 들고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삽이요. 두 번째는 정구채요, 세 번째는 망태라는 것입니다. 삽을 든 교인은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은 어느 집사가 들어야 될 말이요, 저것은 어느 집사가 들어야 될 말씀이요... 이렇게 삽질한다는 것입니다. 정구채를 든 교인은 말씀이 선포되면 되받아칩니다. 목사님이나 잘하세요. 세 번째 망태를 든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담아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잘 담아 그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누가 소망이 있습니까? 지금은 좀 모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신의 비추며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누가 소망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안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는 적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결국 넘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영적으로 제일 곤고한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하는 설교가 시원챦게 들렸습니다. 저는 구약성서신학을 전공했습니다. 목사님의 성경강해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결국 말씀을 잘 듣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영적으로 볼 때 그 때가 바로 저에겐 위기였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두 번째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할 때 그들에 대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셨던지 본문7-8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 이상 ‘내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 백성’이라고 모세에게 말합니다. 9절에서는 ‘이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다 진멸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변화되지 않고 목이 곧은 그 백성들이 이제는 지겹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고는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뿌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법에 의하면 재를 물에 타서 먹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참으로 의로운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지었다면 그 물이 저주의 물이 되어서 몸을 썩게 했습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그들이 섬기는 금송아지 우상이 오히려 그들에게 저주거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론을 불러 책망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모세는 지도자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면 전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믿음의 지도자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지도자의 믿음이 흔들리면 백성들은 방자해지고 원수 마귀는 조롱합니다. 사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모든 백성들이 돌을 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기어이 이룰 사람이라면 아론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통역을 잘하는 사람은 자기 사상, 자기 목적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아론이 아주 바보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 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 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참 우습지요. 아론은 이렇게 약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의 분노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백성들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그러자 레위지파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칼을 차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치게했습니다. 그날에 삼천명이 죽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이 모습속에서 민수기에 나오는 비느하스를 생각하게 합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광야를 지나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사람들의 유혹에 빠져 바알브올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알의 제사에 참여하고 모압여인들과 음행하는 죄를 범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염병이 진에 임하고 그날 이만 사천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눈치없는 한 사람이 모세와 회중들이 보는 앞에서 모앞 여인들 데리고 자기 장막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을 본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그들을 따라 들어가서 그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게 됩니다. 살인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 비느하스의 행동을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염병이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비느하스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비느하스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창세기를 보면 레위지파도 저주 받은 지파였습니다. 세겜에서의 사건 때문에 시므온 지파와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두 아들을 저주 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야곱의 저주로 나중에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사라집니다. 레우지파도 그런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우상숭배의 죄와 싸우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레위지파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지파, 하나님의 성막을 섬기는 지파게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죄에 대해 분노한 레위지파는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의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죄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물론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죄 자체를 하나님은 용납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
세 번째 우리는 본문에서 모세의 중보기도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이 일후에 다시 하나님앞에 올라갑니다. 무엇하러 시내산에 다시 올라 갔습니까? 죄를 회개하기 위해섭니다.
30절에 보면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 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눈물로 중보기도를 합니다.
본문 31-32절은 보십시다.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의 중보기도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란 말 그대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중보기도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중보기도자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중보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에게 축복하기를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의 근원이란 축복의 통로입니다. 또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왕같은 제사장이 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2:9) 제사장의 역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중보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보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딤전2:1-2에서 기도의 종류를 말하면서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중보기도자로 하나님앞에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실 계획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찾았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 50명이 있으면..., 45인이 있으면..., 결국 의인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땅에 살고 있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가슴에 품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실 때 롯의 가족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억했기 때문이지요.
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중보기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듣고 이스라엘의 멸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가 이스라엘을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할 시기,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시기에는 이런 중보기도자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겔22:30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안타깝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을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모세 시대나 에스겔 선지자 시대가 동일한 우상숭배의 죄가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모세 때에는 하나님께서 진노로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고 에스겔 선지자 시대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에 임한 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그것은 중보기도자 문제입니다. 모세시대에는 모세가 중보기도자가 되었지만 유다가 바벨론 멸망당할 시기에는 이스라엘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읽은 본문 32절을 보면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대강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영혼을 바칠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앞에 중보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앞에 중보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이 기도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이 기도를 거절하는 것 같습니다.
3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각오도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 죄많은 인간들은 중보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중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의 모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구원받는 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바칠 각오를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말하는 것이 요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낸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바로 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한 중보기도를 하려면 모세처럼 해야 합니다.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안에 이런 중보기도자가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에 대한 분노, 그리고 죄에서 인간을 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바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