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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계신 하나님
이사야 45장 5-7, 15절
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숨어 계시다는. . .
오래전 우리 교회 교역자와 직원들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기업에서 하는 혁신 Process라는 개념을 함께 공부하고, 교회 사역에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강사로 오신 분은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고 모 기업의 상무로 있는 분입니다. 명문대학을 나와 잘 나가는 기업에서 일하며 승승장구 하던 때, 하나님은 이분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나가 그렇듯이 인생의 고비를 만나면서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는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순간 보이지 않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참 의미 있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보통 3번의 기회를 만나게 된다고 하는데, 이분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기회가 있습니다. 단지 그 기회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기는 순간 보이지 않던 길이 보입니다.”
‘숨어 계시다’는 말은 계시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강의를 하던 이 집사님의 말 중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떤 기업의 사람들도 리더가 이야기하는 것 중의 30%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택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잘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지루해하고 곧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자신이 감명을 받았다고 느끼는 책들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혁신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혁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에게 혁신이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감싸는 자신의 생각이 없어지지 않으면 이러한 혁신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Living Bible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Truly, O God of Israel, Savior, you work in strange, mysterious ways"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이상합니다. ‘신비한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신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내가 행하지 못하는 방식, 또는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행할 때 우리는 신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신비한 방식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신비한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며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방식 앞에 내가 순종하고 인정할 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시편 14편 1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상한 방법으로, 아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시는 하나님”,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내가 하나님 품 안에서야 비로소 안식을 찾았노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품에 들기 전에는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평안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문제는 우리의 미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것, 우리 인생에 대한 모호성이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듭니다. 우리 인간이 근원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죽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함께 걷던 어린아이의 눈에 부모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아이가 불안하여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인생에 대하여 불안해합니다. 과연 내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인지에 대해 말입니다.
<찬양-Heel Grabber>
제가 요즘 ‘관점’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의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아니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들어왔던 세상의 상식이 하나님의 관점을 깨닫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수없이 내 뱉었던 세상적인 언어들이 숨어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아십니까?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숨어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5-7절은 왜 우리가 숨어계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숨어계신 하나님의 특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1.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6절에서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즉,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이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은 1900년대 초에 중국의 선교사가 세계 기독교 회의에서 고백한 말입니다.
“나는 그곳에 하나님을 전하려고 갔으나 하나님은 이미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변론하며 설교하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22절~ 23절에 보니까,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 바울이 선교자로서 가진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역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I am the LORD”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lords"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the Lord”가 되십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을 기억하십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많은 신이, 영적인 세력이 있지만, 그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 존귀하신 분,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선언의 말씀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어는 곳이나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규정이나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에서 분명해집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고 안 믿고가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선교학을 공부하다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진보교단의 목사님이 한번은 인도네시아의 선교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복음을 받아들인 부족들이었는데,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가 없는 곳입니다. 그들은 목사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이 와서는 안수를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진보교단의 이성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억지로 손을 얹어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병자가 낫는 것입니다. 무척 당황한 목사님은 그곳을 떠나 더 깊은 산속으로 다른 부족을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도 기도를 받으러 오는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마지못해 손을 얹어 기도했는데 병자들이 낫는 것입니다. 선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 목사님은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믿지 못해도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기도를 받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저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아기를 가지기를 소원하던 젊은 부부가 기도를 받고 아이를 가졌다는 감사의 고백도 듣고, 불교의 집안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몸이 너무 아파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때 기적같이 고쳐주셨다는 고백을 듣기도 합니다.
얼마 전 환자들을 심방하며 이렇게 권면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육체적인 질병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드러내도록 하십시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숨어계신 하나님을 고통 가운데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숨어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잘 알고 지내는 친구 중에 어떤 회사의 중역이었던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새 직장을 얻어 옮기게 되었습니다. 꽤 높은 직책인 데다가 친구가 무척 좋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하기까지 몇 달을 현 직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당연히 대충 직장 생활을 하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남은 기간을 너무나 열심히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올 직장에 그렇게 잘 보일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남은 기간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상해 이유를 물어 보았답니다. 그 친구의 대답입니다.
“조엘, 나도 새 회사로 옮길 때까지 좀 쉴 생각이었다네. 그런데 회사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들아, 네가 최선을 다해 이 회사를 섬기지 않으면 새 회사에서도 잘 할 수 없단다.’ 그래서 내가 이 회사에서 받은 모든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네.”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보스가 누구인지를 안 것입니다.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곳에서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도 동일하게 인도하시리라는 신앙 말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러나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숨어계신 하나님을 가리는 자들 때문에,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오해할까봐 겁이 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으로 인하여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지루한 하나님으로 인식될까봐 얼마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며, 바로 이곳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감추어진 하나님,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2. 숨어계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7절)”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하나님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반쪽자리 신앙의 모습들, 아니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는 빛과 어둠을 판단하고, 평안과 환난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쪽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평안하고 빛 가운데 있을 때는 감사의 고백을 하지만, 환난 날에 하나님을 고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고백록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 하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가졌던 최대의 고민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무에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이 세상이 악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느냐는 것입니다. 왜 악인들이 번성하며, 의인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신앙인들과 지혜자들이 고민하는 내용이 아닙니까?
제가 만났던 어떤 사람은 신앙을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신실하게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새벽예배를 갔다 오면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착한 어머니를 왜 하나님께서 암에서 구원하여 주시지 못하느냐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떠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이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해도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악인들이 멸망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기까지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세계 열방을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가슴에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양-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교회의 공사를 하면서 담당 장로님들과 관계된 많은 사람의 관심이 교회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들을 내어 놓습니다. 우리가 교회가 깨끗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더러워지면 바꾸거나 갈면 됩니다. 그러나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들, 해야 하는 일들이 멈춰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생명, 나에게 주어진 축복의 공간들이 늘 깨끗하고 안전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중요한 공간과 세계와 평안함을 깨뜨려서라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가져가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쓰러짐과 아픔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귀하게 바꾸어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왜 그런 일이 하필이면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일어나야 합니까?”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과 아픔으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또 다른 하나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주관되고 있음을 말입니다.
신앙이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악한 일들과 아픔을 통해서도 선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관점을 꺾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
남편이 죽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의 차를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편의 죽음을 가지어 사실화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여름휴가 때 첫 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그녀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 주었다.
파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다시 원망스러웠다. 아들을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왜 교회에 가지 않느냐?”
산을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 정이 넘치는 햇살같이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어여쁜 아들을 주셨는데도?“
“네, 그래도 원망스러워요”
그녀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해지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리고 갔다. 꽃밭에는 장미와 달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 등이 활짝 피어있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얘야,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마라”
<찬양-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내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 삶에 닿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에 감사가 있고, 삶의 긍정이 있게 됩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얼마나 힘이 드는지 우리 아이가 기저귀 신세만 벗어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때가 되면, 우리 아이가 학교만 가면 편하고 행복해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는 순간부터 부모의 염려와 걱정이 시작됩니다. 제발 학교만 졸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되고 평안해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만 해결되면 좋겠다는 생각들이 일생동안 계속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한, 아무리 행복한 일도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을 할 때까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 저에게 말씀하시고 보여 주실 거예요!”가 아니라 “내가 지금 너의 삶에 직접 개입하여 역사하는 것을 느끼고 고백해 보지 않으렴.”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많은 일이 나를 혼란케 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떠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숨어계신 하나님이 나의 삶에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하,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구나!”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숨어계신 하나님이 실존하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최상의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영역을 벗어나 하나님의 관점의 산에서 여러분의 모든 문제와 현제의 모든 일을 바라보십시오.
숨어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곳에는 늘 사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절대 사단 마귀가 공존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단은 설 곳을 잃고 머리를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실존하시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담대하게 고백하고 선언하십시오. 사단의 존재가 떠나가게 됩니다.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 했던 사단의 세력이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간 사단은 우리를 공격할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