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의 기도론(祈禱論), 기독교강요 3권 20장 18 (1559년 라틴어 최종 판 직역본, 박문재 옮김, PP.600-602)18. 그리스도의 중보(仲保)가 없이는 하나님께 효과적(效果的)인 기도(祈禱)를 드릴 수 없음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자기가 승천(昇天)하신 후에는 자기의 중재(仲裁)를 피난처(避難處)로 삼으라고 명령하시는 때의 상황을 세심하게 주시해야 한다. 주님은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6)라고 말씀하신다.실로 처음부터 누구든지 중보자(仲保者)의 은혜(恩惠)가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에서 성소(聖所)에 들어가는 제사장만이 홀로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들을 그의 어깨에 메고 그것들과 동일(同一)한 수(數)의 보석들을 그의 흉패에 부착하게 하셨고(출 28:9-21),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성전의 뜰에 서 있었고 그곳에서 제사장이 기도할 때 자기들의 소원들을 함께 아뢰었다. 진정 제사(祭祀)조차도 기도를 인증하고 확정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러므로 저 율법의 예표적(豫表的)인 의식(儀式)들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나아갈 수 없으므로 중보자(仲保者)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는 우리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그의 어깨 위에 우리를 메시며, 우리를 그의 가슴에 부착시켜 안으시며, 우리의 기도가 그의 인격 안에서 응답되도록 하신다. 나아가 말씀된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그가 뿌린 피로 정결하게 되며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더러움을 비워 버릴 수 없다. 우리가 보듯이, 성도들은 무엇을 얻고자 갈망하였을 때 그들의 소망을 희생제물에 두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소원에 대한 재가(裁可)가 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네 모든 소제(素祭)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燔祭)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3). 이러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중재(仲裁)에 의한 용서하심으로써 경건한 자들의 소원들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추론하게 된다.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이 자기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하게 될새로운 시간을 지정하시는가? 이는 오늘날 새로운 은혜(恩惠)가 더욱 빛나고 있고, 그것이 우리 가운데 더욱 고귀(高貴)하게 여겨지게끔 권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같은 뜻에서 그는 바로 앞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요 16:24)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중보자(仲保者)의 직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유대인은 이 기초 원리에 대한 가르침을 잘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승천(昇天) 그 자체로 이전보다 더욱 확실한 교회의 수호자(守護者)가 되실 것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기가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이 겪을 슬픔을, 범상치 않은 유익을 베푸시는 가운데 위로(慰勞)하시려고대언자(代言者)의 직무(職務)를 자기의 일로 맡으시고, 그들에게 지금까지 결여되었던 으뜸가는 은총(恩寵)을 부여하여 그들이 그것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며, 그의 보호(保護)에 의지(依支)해 그들은 더욱 자유롭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러므로 사도(使徒)는 그의 새로운 길이 그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히 10:20). 우리의 것으로 지정된 헤아릴 수 없는 이 은총(恩寵)을 이른바 우리가 두 팔로 끌어안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악함은 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어질 것이다.서명범정리
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