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를 보내며
박경선
밤나무를 보내며
박경선
고령으로 가면서 오늘 작업 할 생각을 하니. 고령 집을 처음 사러 갈 때의 설렘이 추억으로 되살아났다. 넓은 정원을 32그루의 소나무와 24그루의 단풍나무가 둘러싸고 서 있어 숲속 동화나라로 온 듯 환상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수백 년 된 듯한 수령의 소나무와 십수 년 된 듯한 거실 앞의 장대 키로 서 있는 밤나무가 제일 눈에 띄었다.
‘야, 우리가 원했던 꿈의 궁전 같은 곳이야!’
남편은 집 구조를 둘러볼 생각은 아예 잊은 채, 정원에 서 있는 갖가지 유실수와 텃밭을 둘러보느라 마치, 나무를 사러 온 사람 같았다. 나는 나대로 정신이 없었다. 나지막한 지붕이 덮여있는 흙집 거실 문을 열었을 때 기다랗게 두 줄로 놓인 탁자가 눈길을 끌며 마음을 사로잡았다.
‘숲속 집, 이 넓은 거실이면 화선지나 캔버스를 마음껏 펼치고 그림 작업하기에 딱 맞아!’
경북 일대를 토요일마다 도시락 사서 다니며, 남편 퇴임 후, 거처할 집을 구하러 다니며 본 집 중에서 거실이 제일 넓은 집이라 다른 것은 둘러볼 생각을 아예 하지도 못했다.
남편 퇴임이 2014년 8월이라 한 달 앞두고 그 집을 샀다. 그 집에서 퇴임식을 하며 방명록을 써 모았고, 올해로 꼭 십 년 되는 동안 5권의 방명록에 1,280명이 다녀간 기록이 깃든 집이다. 남편의 퇴임식 날도 8월 28일 여름이었다. 한여름 뙤약볕에도 넓은 정원에 천막을 치고 딱 백 명(퇴임 학교에서 그해에 함께 했던 선생님들)만 초대해서 밤나무가 늘어뜨린 그늘에 앉아서 퇴임식을 했다. 그때 찍은 사진 중에 밤나무 가지가 그림처럼 휘어진 나무 아래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이 제일 멋있어 보이고, 그때 리마인드 웨딩 식을 하듯 차려입은 우리 부부가 그 그늘에서 찍은 사진이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 그 정원 거실 앞에 서 있는 키다리 밤나무를 베러 간다. 밤나무를 베어 버려야겠다고 남편이 마음먹은 것은 5년 전부터다. 밤송이가 마당에 떨어져 사람이 맞으면 다쳐 죽는다는 이유를 첫째 이유로 내세웠다. 집안에 밤나무는 심지 않는다는 이유까지 끌어들였다.그러자 나는 김대수 교육장님이 오셨을 때 ‘집안에 밤나무를 심으면 안 되나요?’ 물었다.
“왜요? 밤나무가 얼마나 좋아요. 저기 저 무궁화도 자르지 마세요. 위로 자꾸 올라가 자라도록 두세요.”
나무에 대한 책만 해도 22권을 쓴 나무 박사 말씀이라 남편도 달리 반박하지 않고 참더니, 서울 사는 형님 내외가 오신 날 두 형제가 마음먹고 밤나무 한쪽을 잘라버렸다. 이유인즉슨 밤나무가 거실 집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집 쪽으로 넘어가면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거였다. ‘기어이 한쪽을 쳐버렸구먼!’ 그러고도 남편은 한쪽만 남은 밤나무를 볼 때마다 마저 베어버려야 된다고 궁기렁거렸다. 가만히 보니 남편 마음속에는 해마다 밤송이를 떨어뜨려 주는 귀한 밤나무가 성에 차지 않았다. 잔 밤만 열린다고 궁시렁거리기도 하고, 밤나무 가지가 떨어뜨리는 낙엽들이 강아지 서너 마리가 헤집고 다닌 흔적처럼 일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많은 낙엽을 나서서 쓰윽쓰윽 쓸어버릴 능력도 못 된다. 남편이 나무 관리하고 텃밭 채소 키우는 동안, 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채소 다듬어 돌아오는 일만 해도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박경선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버스를 대절해서 찾아오는 초등학생, 인근 중학교 전교생, 어린이날 등에는 굿네이버스 심리 센터에 심리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학생들도 1박 2일로 다녀가고, 교대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대학원생들까지 초대하고, 무슨 출판기념회, 승진 축하식, 무슨 기념일 축하식 등 이벤트를 즐겨 해왔으니 정원 일은 오직 남편만의 몫이었다. 그래도 나는 초대 손님들이 행복하게 지내다 가는 일에만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다리를 다쳐 시골집에 왔을 때 남편의 일거리가 눈에 보였다. 그래도 밤나무가 있어야 집이 더 멋있어 보이고, 사람들이 놀러 와도 여름에 밤나무 밑에서 즐길 수 있다며 반대만 해왔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내가 엎어져 팔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어 시골집에 왔을 때 남편의 고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동안 남편이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집을 관리해 왔는가? 그리고 남편도 언제나 지금처럼 건강하게 힘을 쓰며 살 수 있으랴?’ 나무보다 남편의 건강을 지키는 게 현명한 선택이리라. 그래서 남편이 나무를 베어버려야지 할 때마다 묵인해 왔다. 오늘은 아들이 쉬는 날이라 함께 고령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와 아들은 창고로 달려가 전기톱을 찾더니 밤나무로 달려갔다.
‘아, 나무야 미안하다!’
나는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나무가 우리랑 함께 살았던 흔적을 손전화기에 담아두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나무도 쉽게 호락호락 베어질 나무가 아니었다. 그동안 얼마나 굵었는지, 사람으로 치자면 천하장사의 몸짓처럼, 굵고 힘이 꽉 찬 몸통 둘레였다.
‘나무야, 그동안 고마웠다. 잘 가시게!’
성호를 그으며 나무의 혼을 보냈다. 나무는 날카로운 톱날을 몇 번이나 물리쳐내며 몸을 비틀어 반항하는 듯하더니 차차 그루터기가 베어지며 마당에 몸을 눕혔다. 그런데 그 한 그루의 몸에 지녔던 나뭇가지들이 마당 한 가운데를 모두 덮었다.
“어, 여기 새집도 지어두었네!”
남편도 미안해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겨울이라 비둘기가 살다 날아간 빈 둥지라서 다행이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은 추운 날씨라 남편과 아들은 나무 치우기에 열중이었다. 나는 들깨를 털다가 달려가서 잔가지들을 치우는데 거들었다. 아직 오른쪽 팔을 잘 쓸 수 없어 무거운 나무토막 하나도 들 수 없었다. 그래도 아들이 거들어주니 얼마나 든든한가? 12시 반에 시작해서 4시에 밤나무 한 그루를 잘라 땔감으로 이리저리 흩어 쌓았다. ‘나무꾼이 산 위에서 나무를 할 때’라는 노래가 있지만, 우리는 이 집을 사고부터 한 번도 산에 나무하러 가지 않았다. 겨울을 이 집에서 지내는 일이 별로 없다 보니 땔감으로만 쌓아두고 지낸다. ‘저 나무토막 하나하나에도 우리와 같이 살던 추억이 담겨 있는데….’
눈이 내리기 전에 우리는 고령 집을 나와 대구로 왔다. 밤나무랑 즐겁게 놀기보다, ‘노쇠한 남편 돌아보기’에 눈뜰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2024. 11. 30.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