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곳은 안녕하신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듯 하지만 기억 속에서 다소 멀어진 인천의 공간들이 있다. 넓은 공간을 쓱~ 한 번에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점을 다시 걸어보고자 한다. 걷다 보면 점(點)은 선(線)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모이면 다시 넓은 면(面)을 싹~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인천, 걸어서 쓱~싹~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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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은 광복 75주년이었고 다가오는 8월 29일은 한일병탄 110주년이다. ‘일제 36년’은 우리에게 잊힌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는 오늘의 이야기이다.
인천에는 일제강점기를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존재한다. 그중의 하나가 방공호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제국주의시대 일본의 침탈과 강제 노역의 증거로,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기억유산’이다.
▲일제의 침략, 수탈 등의 품고 있는 방공호
제국주의 시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고 영구 점령하기 위해 한반도 각지에 수많은 군사시설을 건설하였다. 1930년대 일제는 ‘방공법’(1937.4.1.제정)에 따라 공습대피시설을 건설할 것을 법제화하고 도심지, 군사기지 주변에 갱도를 뚫어 방공호로 활용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며 수많은 갱도를 뚫어 최후 방어 진지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 곳곳에서 발견되는 방공호 시설 역시 이 당시에 건설된 것으로, 당시 많은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맥아더 동상 아래 방공호 입구
인천 지역에 현존하는 방공호 몇 군데를 탐방해 내부를 살펴봤다. 방공호는 일본인들, 특히 어느 정도 지위에 있던 이들 많이 살던 동네에 존재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 발밑에 방공호가 있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뒤편 공영주차장 내 방공호 출입문이 나 있다. 천정이 아치형으로 된 이 방공호의 규모는 높이와 폭이 각각 약 2m이다.
현재 도달할 수 있는 길이는 10m로, 그 이상의 내부는 시멘트로 막아 놓아 진입할 수 없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6.25 전쟁 중에는 인민군들이 폭약 저장소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중구청에서 공원 관리를 위한 장비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6.25 전쟁 중의 맥아더 동상 아래 방공호 모습
중구청 뒤쪽에 위치한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옛 시장 관사)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업가 코노 다케노스케(河野竹之助)의 저택으로 알려져 있다.
정원 끝 석축 아래에 ㄷ자 형태의 작은 석실형 방공호 1개와 역사자료관 건물 뒤편 석축 아래 ㄷ자형 입구를 갖춘 방공호로 추정되는 시설 1개 등 모두 2개의 방공호가 있다.
이 방공호는 사람보다 ‘유물’을 보호했다. 6.25 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옛 세창양행 사택에 있던 시립박물관의 유물을 급히 옮겨와 잠시 보관했다. 문화재급 유물 19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빌려온 55점 등 유물 200여 점이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의 시립박물관의 수장고와 전시실 등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인천시역사자료관의 정원 쪽 방공호
1908년 신흥동과 경동 싸리재를 연결하는 신작로가 생겼다. 길을 내면서 쌓은 석축은 일명 ‘긴담모퉁이길’로 불린다. 그 주변에는 일본인 관료들과 사업가들의 저택이 몰려있었다.
긴담모퉁이길 석축 아래에 방공호가 있는데 이는 그들을 위한 방공호로 추정된다. 방공호 입구는 아치형으로 입구 주위는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있으며 현재 철문으로 닫혀 있다.
▲신흥동 긴담모퉁이길 방공호 입구
이 방공호는 언덕 너머 1884년 개교한 일본인 학교인 아사히 소학교(현 신흥초등학교)와 길게 연결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학교 쪽 방공호 입구의 존재는 현재 아파트 건립과 우거진 잡풀 등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오래전 본관 신축 건설 때 교무실 아래로 방공호가 연결돼 있는 통로를 발견했다는 증언도 있다. 비상시 교무실에서 바로 방공호로 피신하게 돼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긴담모퉁이길’ 방공호 내부
중구청의 협조를 얻어 긴담모퉁이길 방공호의 내부를 살펴봤다. 입구에서부터 약간 내리막으로 된 통로를 50여 m 가량 가다보면 왼쪽으로 길이 꺾인다. 곳곳에 곡괭이로 일일이 판 흔적이 보인다.
밖의 온도는 30도를 넘는데 안은 들어갈수록 서늘해졌다. 냉기가 돋을 정도였다. 전체 길이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곳부터 바닥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 중간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 저쪽 끝은 아마도 신흥초 운동장과 연결돼 있을 것이다.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신흥초교 쪽 방공호
현재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는 인천신사(仁川神社)가 있었다. 학교 남쪽은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낭떠러지였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1890년 6월 신사를 건립했다.
학교 아래 동네에 커다란 방공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옛 신사를 떠받쳤던 거대한 암석을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게 방공호를 뚫었다. 유사시 궁사나 승려들 그리고 참배객들이 급히 피신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가정집 마당 한켠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여전히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인천여상 아래의 주택에 있는 방공호
이밖에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쪽 절벽 방공호, 인천기상대 입구, 항동 올림포스호텔 주변 선구점 내부, 중구노인복지관 마당 옆, 미림극장 건너편 가게 등 10여 개의 방공호가 있다.
현재 인천 지역 내 방공호 중 일반 주택 내에 있는 방공호는 도심지 재개발로 현황 파악 등 조사되지 않은 채 입구의 함몰 또는 통째로 매몰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흔적들을 지워버리면 일제의 침략, 학살, 수탈 등 어두운 역사 증거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글· 사진 유동현 인천시립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