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중국이 전쟁에 돌입하였다. 開戰 2일째, 중국군 500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4일째 포로가 1억을 돌파하였다. 다음 날 중국이 일본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래도 전쟁을 계속하겠는가'.>(우스개)
한국전에서도 실증되었지만 중국의 가장 큰 무기는 인구이다. 필자는 지난 1주일간 홋카이도에서 이를 實感하였다. 春節(음력 설날) 휴일을 맞은 중국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관광을 오는 바람에 공항, 기차, 열차, 음식점, 상점, 호텔과 여관은 붐볐다.
홋카이도의 지역신문 무로란(室蘭)민보 2월18일자 칼럼은 이렇게 전한다. <삿포로에서는 국내 비즈니스맨들이 (중국 관광객 때문에) 숙소를 잡지 못하여 고생을 한다. 운 좋게 숙소를 잡아도 숙박요금은 배 이상 올랐다. 전차, 비행기 안이 소란스럽다. 목소리가 높고 말은 빨라 기관총을 쏘는 듯이 쏟아내는 바람에 듣는 이들은 '귀울림'이 생길 정도이다. 후쿠오카에선 爆買 대행업이 생겼다고 한다. 즐거워하는 것은 정부. 訪日 관광객수가 늘어 여행 收支(수지)는 반세기만에 대흑자가 된다.> 지난 일요일, 尙美會 여행단은 홋카이도의 아바시리에서 쿠시로로 가는 기차를 탔다. 奧地를 달리는 기차가 2량이었다. 기관사 한 명이 운영하는 이른바 원맨카였다. 우리는 두 번째 객차에 탔다. 한 40분을 달리더니 시골역에 멈추었다. 驛 구내로 달려가 간식거리를 찾고 있는데 남아 있던 단원이 달려와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2량을 1량으로 줄이라는데 두 번째 객차에 탔던 이들에게 모두 1량으로 옮겨 타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역부터 종착역까지는 한 량으로 운행한다는 설명이었다.
사전 예고 방송도 없었다. 거의가 중국 및 한국 관광객이니 짐이 많았다. 이들이 한 객차로 모여 드니 출입문 닫기도 어려웠다.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객차 내 통로는 물론이고 꽁무니의 여유 공간에까지 촘촘히 들어섰다. 피난 열차 같았다. 한 노인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니 잠이 왔던 모양이다. 필자도 근 세 시간을 서서 갔다.
우리는 7일간 통용되는 JR 패스를 1인당 약 40만 원에 사서 갔는데, 자리 예약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1등석, 지정석엔 몇 사람만, 나머지는 자유석 객차에 앉아야 했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통로에 서 있어야 한다. 어제 도야에서 南치도세 역으로 오는 기차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여 자유석 통로에 끼여서 1시간 20분을 견뎠다.
한 일본인은 '일본에 일본 사람이 없다'는 농담을 했다. 이렇게 중국 관광객이 많이 모이니 일본의 자랑인 친절한 서비스도 불가능해졌다. 친절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도저히 관리할 수 없는 인파가 몰리면 앞에 예로 든 시골기차처럼 되는 것이다.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과 일본을 찾은 중국인들은 행동이 좀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목소리이다. 한국에선 목소리가 높은데 일본에선 작아진다. 조용한 분위기에 압도된 때문인 듯하다. 조용하던 일본인도 한국에 오면 시끄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지난 1월 일본에 들어온 외국 관광객은 약 190만 명인데, 한국이 1위, 2위가 중국, 3위가 대만이었다. 이 세 나라 사람들을 합치면 약 130만 명. 漢字문화권 사람들이 일본을 많이 찾는 이유 중 하나는 漢字이다. 간판과 안내 판이 한자로 적혀 있으니 외국이라도 일단 안심이 되는 것이다.
訪日 외국인 관광객은 전년 대비 47% 증가한 1973만 명 을 기록했다. 중국인 관광객이 전년 대비 倍增한 499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2위는 한국인 관광객으로 전년 대비 45% 증가한 400만 명. 韓日관계의 악화에도 한국인의 일본 여행 은 늘었다.) BR> 여행중 만난 한국 대학생은 漢字를 읽을 줄 몰랐다. 漢字로 적힌 안내 책자를 들이대면서 좀 읽어달라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내 외손자가 따라왔는데 간판과 안내판의 漢字를 상당 부분 이해하였다. 漢字를 아는 초등학생이 한자를 모르는 대학생을 가르쳐야 할 판이다.국어 교육의 비극이다.
일본에 오는 중국인은 돌아가서 일본 칭찬을 많이 한다고 한다. 중국 관광객의 이런 好感이 兩國 관계 好轉(호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일본은 볼 거리가 많다. 나라도 크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날씨와 자연이 다양하다. 홋가이도에 눈이 내려도 가고시마에선 벗꽃이 핀다.
문화유산의 축적이 거대하다. 몽골 침략, 임진왜란, 韓國戰으로 많은 문화재가 사라진 한국과 달리 일본은 文明의 축적을 이어갔다. 어느 시기엔 접근이 불가능해지는 極地도 있는 나라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성실하고 정직하며 깨끗하다. 관광지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중국인들은 가까운 한국을 거쳐 본격적으로 일본 구경에 나섰다. 올해 약1억5000만 명의 중국인이 해외로 나간다. 한국인처럼 관광을 하게 되면 연간 약4억 명이 지구를 덮게 된다. 그 가장 큰 受惠國은 중국인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일본이 될 것 같다. 외교적으로는 사이가 나쁜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것은 일본이 쌓아올린 文明 때문일 것이다. 文明은 예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삼는데, 국경이나 이념, 또는 종교와 민족까지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다.
삿포로行 특급열차 안은 중국인 관광객으로 통로까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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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행 기차 안에서 두 중국인 아이가 SNS에 빠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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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도야 호수. 여기 호텔들도 중국 관광객들로 만원 사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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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의 눈사람과 한국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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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의 五稜郭(오릉곽) 설경. 이 유럽식 성은 명치유신 최후의 전투장이었다. 사무라이의 마지막 칼부림으로 근대화의 문,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가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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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맨카가 눈 속으로 달린다. 아바시리~구시로 구간. |
일본에도 대통령과 공화국이 있었다
수년 전,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편으로 일본 北海道 新치토세 공항에 도착하니 정오 무렵이었다. 비행시간은 두 시간. 비행기는 時速 1000km로 날았다. 등바람을 받은 덕분이다. 音速(마하) 0.9 정도의 속도로 날아간 셈이다. 여객기는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 서해안에 바짝 붙은 다음 동북 방향으로 날았다. 눈 덮인 일본의 해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야마 해안을 지날 때는 히말라야처럼 눈을 덮어쓴 3000m급의 산맥들(北알프스)이 펼쳐졌다. 이런 경치를 보려면 오른쪽 창쪽에 앉아야 한다. 커피를 한 잔 했다. 20여년 전 점보의 조종실에서 알라스카 맥킨리 산 꼭대기를 내려다보며 커피 한 잔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노보리베츠(登別) 온천의 한 호텔에 들었다. 北海道는 일본에서 유일한 道이다. 일본의 행정구역은 1都(도쿄), 1道(북해도), 2府(교토부, 오사카부), 43개 縣으로 되어 있다. 북해도는 면적이 약8만 평방km이고 인구는 약 600만 명이다. 면적은 남한과 거의 같은데 인구는 9분의 1이다. 눈의 고장이다. 북해도 눈은 습기가 적다. 밟으면 뽀득뽀득 소리가 난다. 물기가 적어 덜 미끄럽다. 눈 덮인 북해도를 돌아다녀보면 차량통행도 적고 인적도 드물다. 도시는 죽은 듯 눈에 파묻혀 있다. 마을도 冬眠하는 듯하다. 1960년대 굶주리던 시절, 강원도와 경북 산간지방의 火田民들도 겨울엔 일체의 활동을 하지 않고 집안에 누워서 에너지 방출을 줄이는 일종의 冬眠을 했다. 尙美會(02-724-1345) 여행단(22명)은 노보리베츠에서 버스로 해안길을 달려 4시간 만에 하코다데에 도착했다. 일본 사람들은 눈길을 잘 관리하고 운전자들은 아주 안전하게 차를 몬다. 暴雪이 내려도 교통 大亂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코다데는 요사이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인천-하코다데 직항로는 늘 만원이다. 인구가 약 40만 명인 이 항구는 1854년에 개항되었다. 1868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하코다데 전투'라는 것이 일어났다. 明治維新은 일본이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이 성공하기까지는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이 7회 정도 있었다. 1868년4월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幕府토벌군에 포위당한 에토성(지금의 도쿄)을 자진해서 開城하여 넘겨주고 은퇴하였지만 막부에 충성하는 세력은 항복하지 않았다. 주로 東北지역의 藩主(번주)들이 武力으로 저항했다. 이들은 지금의 가고시마와 야마구치, 그리고 고치 등 西南 세력이 주도한 明治維新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戊辰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戊辰전쟁의 최후 전투가 하코다데에서 벌어졌다. 이 최후 저항전의 주인공은 에노모도 다케아키였다. 30대 초반의 그는 막부 해군의 부사령관이었다. 막부가 공식으로 항복한 직후 그는 네 척의 증기선 군함에 2000명의 병력을 태우고 도쿄항을 탈출하여 北行했다. 이 반란군 속에는 일본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고문관들도 있었다. 반란함대는 1868년 8월 동북지방의 큰 도시인 센다이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병력을 증강했다. 10월 반란함대는 1000명의 병력을 보태어 센다이를 출항, 그 달 20일에 하코다데에 상륙했다. 센다이에서 합류한 그룹중엔 新選組(신선조)라고 불리는 무사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망해가는 막부를 끝까지 死守하기 위하여 결속한 젊은이들이었다. 이 新選組의 지도자 히지가타 도시조는 당시 35세였다. 明治維新의 행동파들은 거의가 30대 초반의 熱血남아였다. 죽은 이들은 영웅이 되고 살아남은 이들은 권력자가 되었다. 한국과 惡緣(악연)이 많은 伊藤博文이 대표적 인물이다.
하코다데엔 五稜郭(오릉곽)이란 5각형 유럽식 城이 있었다. 반란군은 이 城을 사령부로 삼았다. 지금 이 오릉곽은 공원으로 되어 있고, 그 옆에 90m짜리 관광 타워가 있다. 막부를 타도한 官軍은 토벌군을 하코다데로 보냈다. 10척의 군함과 약 7000명의 육해군이었다. 1869년 5월까지 兩軍은 육전과 海戰을 되풀이했다. 증기엔진으로 움직이는 근대적 군함끼리의 海戰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었다. 당시 일본이 도입한 군함은 네덜란드 등에서 만든 것인데 2600t 정도였다. 토벌군의 主力은 가고시마(사쓰마藩) 군대였다. 이때 艦砲(함포) 담당으로 참전한 사람이 러일전쟁 때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멸시킨 도고 헤이하치로였다. 반란군의 지도자 에노모도는 국제법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코다데에서 ‘에조 공화국’을 선포하고 본인은 대통령이 되었다. 일본 역사상 前無後無한 대통령과 공화국이 탄생했다. 에노모도는 하코다데의 외국인 영사관을 설득하여 에조 공화국에 대한 국제적 공인까지 받았다. ‘에조’란 아이누族을 일본인들이 낮추어 부른 것이다. 衆寡不敵(중과부적)의 반란군은 두 달간 抗戰하다가 항복했다. 3000명중 1300명이 전사하고 400명이 부상, 1300명은 포로가 되었다. 에노모도 대통령은 역적 두목이 되어 감옥에 갇혔다. 다른 나라 같으면 大逆罪(대역죄)로 처형되었을 것이지만 때는 亂世(난세)였다. 그는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선 새 일본 정부에 등용된다. 그의 실력과 인간됨을 잘 아는 명치정부의 실력자 구로다(黑田淸隆)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북해도 개척사, 해군중장, 문교상, 체신상, 農商務相 등 요직을 지내고 72세에 죽었다. 도쿄엔 그의 동상이 있다. 敵이라도 實力이 있으면 자기 편으로 만들어 重用하는 것이 일본 武士사회의 한 전통이다. 군인과 商人들에게 중요한 것은 實利이고 實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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