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8번째 시간으로서 “자유와 해방” 自由と解放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말씀 제목에 대해서부터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자유’와 해방’이라고 정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 해방. 이는 거의 비슷한 말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
제목을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의에 대한 자유와 죄로부터의 해방’(義についての自由と罪から解放)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의에 대한 자유’라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꽤 좋은 뜻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별로 좋은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정리정돈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면 이는 무슨 말이겠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 보면, 당시는 가족 중에서 저만 한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누가 뭐 잔소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진정으로 정리정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정리정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냐 하면, 어느 날 제가 살던 오피스텔 아래층에
살고 있던 학교 후배가 제 방에 놀러 왔었는데, 그 때 방문을 딱 열고 제게 하는 말이, “형, 이사해요”라고 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 이삿짐을 싸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만, 방 꼴이 얼마나 어질러져 있었으면 후배가 제 방을 보고 이사 하느냐
하고 물었겠습니까. 말하자면 그 정도로 정리정돈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한 자유’(義についての自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의롭거나 의롭지 않거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안 맞는지 하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죄로부터의 해방’(罪から解放)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에 있는 대로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죄를 대신 갚는다 하더라도, 이는 불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100프로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한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묶었던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비로소 죄로부터 해방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차례대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6장 19절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 중에서 주제, 즉 핵심 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19절 전반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전반부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19. あなたがたの肉の弱さのために、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ています。
이는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이 높으면 좀 어려운 말로 설명을 하겠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쉬운
말로 하겠다. 그런 뜻입니다.
저도 아직까지 그 기억이 있는데,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닐 때 보면 당시에는 여러가지 좀 풀리지 안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그 찬송가 257장에 보면,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 이
가사를 보고, 아, 교회에는 무슨 ‘사물함’ 같은 상자 같은 뭘 넣어두는 것이 있나 보다. 그럼 그게 우리 교회에는 어디 있나.
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496장에 보면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그 가사를 제가 들었을 때도,
아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면 단을 쌓아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단을 거둬버리면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게 말이 돼?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다 커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들한테 신학의 어려운 개념을 말할 수가 없잖아요. 이는 마치 더하기 빼기 밖에
모르는 학생한테 미분이다 적분이다 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당신들은 아직 못 알아 들을 테니까, 내가 쉬운 말로 설명을
하겠습니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19절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이 말씀은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나왔던 주제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13절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を罪に支配させて、からだの欲望に従ってはいけません。
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不義の道具として罪に献げ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死者の中から生かされた者としてあなたがた自身を神に献げ、また、あなたがたの手足を義の道具として神に献げなさい。
로마서 6장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あなたがたが自分自身を奴隷として献げて服従すれば、その服従する相手の奴隷となるのです。つまり、罪の奴隷となって死に至り、あるいは従順の奴隷となって義に至ります。
이와 같은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했던 말을 반복하겠습니까.
이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가 죄 아래에 있는 것인지, 의의 아래에 있는 것인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우리의 믿음의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각도로 이해를 해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20절~21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20절~21절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이 구절을 보니, 저는 이른바 돌아온 탕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까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중에서 시간관계상 11절~24절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24절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1.イエスはまた、こう話された。「ある人に二人の息子がいた。
12.弟のほうが父に、『お父さん、財産のうち私がいただく分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財産を二人に分けてやった。
13.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14.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後、その地方全体に激しい飢饉が起こり、彼は食べることにも困り始めた。
15.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17.しかし、彼は我に返って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なんと大勢いること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ようとしている。
18.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こう。そし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
19.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一人にしてください。」』
20.こうして彼は立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へ向か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て、かわいそうに思い、駆け寄って彼の首を抱き、口づけした。
21.息子は父に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22.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일단 구체적인 지적은 없습니다만, 글 맥락으로 볼 때 배경은 아마도 부유한 집안이 아니었나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글쎄,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자기 상속분의 재산을 먼저 나눠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나눠줬더니만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돈을 자기 멋대로 펑펑 썼습니다.
그러자 돈이 다 떨어졌어요. 그랬더니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곳 경기가 좋다면 돈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재기를 노려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제상황이 최악이에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일자리도 줄어들지요. 더구나 거기는 먼 나라에요.
그는 거기서 외국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조건이 같다면 내국인을 뽑지 외국인을 뽑아
주겠어요?
그렇게 되니까 이제 마땅히 일자리도 찾을 수 없어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배가 고파요. 경기가
어려우니까 아마 일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달라고 해봤는데 그마저도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지경에 이르자 이제 과거가 그리워집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잠잘 곳 걱정 없이
살았는데,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엄청난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아까 자취생활을 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가기 전에 집에서 살 때에 보면 뻑 하면 밥을 먹으래요. 아니,
아직 밥을 먹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밥 먹을 때라고 해서 밥을 먹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직 배가 안 고프다고 하면, 아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으래요. 그러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내가 무슨 밥 먹는
기계에요? 배도 안 고픈데 밥만 먹게? 뭐 그러면서, 이게 참 어렸을 때에는 얼마나 귀찮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살게 되니까 어때요? 자취 생활 처음에는 그래도 자기가 해먹으려고도 해봅니다만, 금새 그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밖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사 먹습니다만, 집에 있을 때에는 맨날 시켜 먹어요. 이제 망설이지 않도록 순서도 아예
정해 놓습니다.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우동, 짜장면, 짬뽕, 볶음밥, 우동……가끔은 조금 변화를 준다고 짬뽕, 짜장면, 우동,
볶음밥, 짬뽕, 짜장면, 우동, 볶음밥……이렇게 되면요 아무리 맛있는 중국집이라 하더라도 정말 거기서 거기, 그 맛이 그
맛이지요. 지금은 모르지만, 당시에는 배달음식이 팅팅 불어서 올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과거에 집에 있을 때, 내가 아무 것도 안 해도 제때에 밥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도 아내가 차려주면 얼마나 감사가 넘쳐나는지 모릅니다.
자, 제 이야기는 그렇다고 치고, 이 둘째 아들이야기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 말씀입니다만, 자, 그렇다면 이 둘째아들은 왜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아서 먼 나라로 가고 싶어 했을까요.
여기에는 무슨 악의가 있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미워서, 형에게 재산을 빼앗기기 싫어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둘째 아들이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에 대해서 못 마땅한 것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9절~30절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29.しかし、兄は父に答えた。『ご覧ください。長年の間、私はお父さんにお仕えし、あなたの戒めを破ったことは一度もありません。その私には、友だちと楽しむようにと、子やぎ一匹下さったこともありません。
30.それなのに、遊女と一緒にお父さんの財産を食いつぶした息子が帰って来ると、そんな息子のために肥えた子牛を屠られるとは。』
바로 이 말 때문에 우리는 둘째 아들이 정말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닌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인데, 이 말만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합니다.
오늘은 제가 잠깐 이 둘째 아들에 대해서 변호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13절에 의하면 우리말 성경에는 허랑방탕이라고는(放蕩) 되어 있는데 많은 돈을 소비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을
참고해본다면 이를 굳이 도덕적으로 안 좋은 곳에만 사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는, 이 형이 말하기를 동생은 부도덕한 생활에 돈을 탕진해버렸다고 말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동생은 먼 나라로 갔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 같은 것도 없는 상황에서, 뭐, 있었다고 하더라도 서로 자주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먼 나라로 갔던 동생의 사생활에 대해서 형이 얼마나 알고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형이 동생에 대해서 한 말, 그러니까 부도덕한 곳에 돈을 다 써서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하는 말은,
동생에 대한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형의 추측인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둘째 아들은 아버지나 형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일에 돈을 쏟아 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왜 둘째 아들은 아버지더러 큰 돈, 자신이 상속할 만한 큰 돈을 달라고 해서 떠났을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버지는 자꾸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나도 이제 어른이야. 나도 내 꿈이 있다고. 언제까지 아버지 밑에서 살 수 없잖아.
이렇게 해서 떠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함부로 부모 곁을 떠날 생각 하지 말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얌전히 집에 있어. 이
말씀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제가 둘째아들을 변호한다고 해서 그가 했던 행동이 다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아들이 했던 행동 중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부분은 과연 어디일까요.
그 부분이 기록되 구절 역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누가복음 15장 13절에 있습니다. 다시 본 구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둘째아들이 한 행동 중에서 잘못한 부분은 어디일까요.
누가복음 15장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자, 아시겠습니까. 둘째아들이 한 행동 중에서 잘못한 부분. 어디일까요. 돈을 많이 썼다? 아니, 사실 뭐 젊은 나이에 돈을
들여서 사업을 했는데 실패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잘못했다고 몰아붙이기에는 너무 불쌍하지요.
그렇다면 그 외의 부분에 대해서 둘째아들이 잘못한 점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에서 ‘먼 나라에 갔다(遠い国に旅立った)’는 점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돈을 다 써버렸더니, 그 때 마침 흉년이 들어서 오갈 곳이 없어진 둘째
아들이 했던 것이 무슨 일이었다고요?
누가복음 15장 15절~16절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그가 갔던 ‘먼 나라’에서 그는 돼지를 치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돼지를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짐승들은 뭐 젖이나 털가죽을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돼지의 경우에는 이를 기르는 목적은 단 하나, 식용으로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단순히 잡아먹기 위해서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에 의하면 어떻게 되어 있었냐 하면, 레위기 11장 7절~8절을 봅니다.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7.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8.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돼지고기는 부정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따라서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이 살았던 곳은 어디냐 하면, 그 장소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거기는 이스라엘이 아닌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곳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리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서는 살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일본에서 살면 안되겠지요. 그것이 아니라
이는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살든 일본에서 살든, 하물며 기독교인들만 사는 곳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로부터 먼 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둘째 아들, 그는 단순히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나 형한테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뭐 꼭 부도덕한 데만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본다면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하면서 투자도 하고 사업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인 것처럼, 그의 마음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만으로 성공할 줄 알았는데, 결국은 그 많은 돈을 탕진해버리고,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하는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로마서 20절~21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20절~21절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0.あなたがたは、罪の奴隷であったとき、義については自由にふるまっていました。
21.ではそのころ、あなたがたはどんな実を得ましたか。今では恥ずかしく思っているものです。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이 말씀을 앞서 살펴보았던 둘째 아들 탕자한테 먼저 말해봅니다.
이봐 둘째 아들아, 네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가서 살아봤지? 그 때는 자유로웠지. 왠지 알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네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잘될 줄 알았지? 하지만 생각해봐.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었니? 만약에 네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돼지나 치면서 결국 굶어 죽었을 거야.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지금은 편의상 제 이름을 넣고 해보겠습니다만, 나중에는 여러분이
여러분 이름을 넣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봐 성필아, 네가 멀리 떨어진 나라까지 가서 살아봤지? 그 때는 자유로웠지. 왠지 알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네 힘을 의지하고 살았기 때문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잘될 줄 알았지? 하지만 생각해봐. 거기서 무슨 열매를
얻었니? 만약에 네가 그대로 있었다면 너는 돼지나 치면서 결국 굶어 죽었을 거야.
여러분, 창세기에 보시면 마귀가 하와에게 뭐라고 속삭이면서 유혹을 합니까.
창세기 3장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마치 그와 같이 마귀 사탄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서 너의 힘을 의지하고 너의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너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너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장 21절 후반부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それらの行き着くところは死です。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6장 22절~23절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2.しかし今は、罪から解放されて神の奴隷となり、聖潔に至る実を得ています。その行き着くところは永遠のいのちです。
23.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망이 아니라 영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5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わたしにとどまりなさい。わたしもあなたがたの中にとどまります。枝がぶどうの木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自分では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のと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実を結ぶことはできません。
5.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까.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나뭇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지만 살 수가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야말로 사망,
열매도 맺을 수 없고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앞서 둘째 아들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 하십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24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2.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아무리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벗어나 자기 멋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잃었다 하더라도, 아버지께로 돌아왔더니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아무리 주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쉬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와 같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자 진정한 해방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 후반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以前あなたがたは、自分の手足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献げて、不法に進みました。同じように、今はその手足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潔に進みなさ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믿음을 버리고 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서 불법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께로 돌아가고,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해져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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