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오늘 오전 예배와 말씀이 좀 겹칩니다. 본문이 겹친 건 아니지만 내용이 비슷한 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 새벽 제가 설교를 미리 오늘 오후에 잠깐 쉬는 시간 동안 준비하고 올라왔는데 새벽 설교도 같은 선에 이렇게 설교입니다.
18절에 보면 지금은 마지막 때고 즉 그리스도가 많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도 요한이 사역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도 즉 그리스도가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라는 표현을 썼고 그리고 그때도 즉 그리스도가 많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세의 기준이 언제냐 하면 우리가 마지막 때 마지막 때 해니까 마치 예수님이 오시기로 약속한 것처럼 하셨다가 늦춰진 것처럼 이렇게 여겨진 뉘앙스가 좀 있잖아요. 성경은 마지막 때를 어떻게 기준 삼느냐 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를 마지막 때 곧 말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마지막 때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는 지금 마지막 때 그리고 말세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수 있는 때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때 가장 필요한 우리의 삶의 조건들은 자세들은 긴장감이에요.
손님이 집을 방문했을 때 우리 호스트들이 긴장감을 놓치기가 이렇게 어렵잖아요. 계속 긴장 상태에 있잖아요. 그처럼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의 가장 필수 조건 중에 하나는 긴장감이에요. 언제 예수님이 오실 때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긴장감을 놓고 살면 안 되는 겁니다.
근데 19절에 보면 조금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적 그리스도의 출처 많은 적그리스도가 생겨났는데 이 사람들의 출처가 교회라고 하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적 그리스도가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나갔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19절 전반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많은 적 그리스도를 양산한 곳이 세상이 아니라 곧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는 다니지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일은 하지만 성령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나가서 즉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로부터 나간 적 그리스도의 위험성이 뭐냐 하면 교회를 너무 잘 안다는 거예요. 지금 이 땅에는 아니 이 땅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는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들이 많아요.
그런데 교회를 너무 잘 알아요. 교회 재정이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그래서 교회 재정성의 투명성을 이렇게 권고하면서 요구하면서 그들이 사회적인 기준을 내세워요. 교회는 운영하는 법칙이 다르고 기구가 다르고 그래서 절대로 사회적인 통상적인 영역에서 벗어난 영역이 있어요.
저희 교회는 그렇지 않으려고 제가 엄청 애써서 횡령이라고 할 것들이 거의 없겠지만 일반적인 관례적으로 재정을 쓴 교회들은 세상적인 기준에 의하면 횡령에 해당되는 돈이 되게 많아요.
그래서 목회자를 얼마든지 횡령죄로 고발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교회에서 나간 적 그리스도들이 교회를 공격하기 때문에 지금은 대개 교회가 수세적인 상황에 놓여져 있어요. 공격을 막아내기도 되게 어려워요. 왜 교회를 너무 잘 알아요 목회자의 삶을 너무 잘 알고, 교회의 조직과 구조를 너무 잘 알고 교회가 왜 저렇게 해야 되는지 알면서도 그걸 약점으로 삼아서 교회에서 나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치명타를 입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나가는 세력들이 정말 많습니다. 교회에서 나가서 자칭 자기가 개혁가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즉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고, 교회에서 나가서 자기가 사회사업가로 하면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즉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고, 교회에서 나간 복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NGO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즉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고, 자기가 인플루언서라고 하는 이들 중에 즉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고, 유명한 정치인이나 신학자 중에도 즉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적 그리스도를 구별해낼 수 있을까?
여러분 원래 원래 내용물이 아주 좋으면 포장이 화려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어요.
여러분 다이아몬드가 그 안에 들었는데 아무리 형편없는 포장지라도 그게 뭐 대수겠어요? 다이아몬드인데 여러분 돌멩이를 아무리 좋은 포장에 싼들 돌멩이잖아요. 여러분은 포장을 보고 뭘 선택하겠어요? 다 다이아몬드를 선택하죠.
문제는 우리가 영적으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포장을 하게 되면 잘 모른다는 거예요. 교회의 생리를 너무 잘하는 사람들이 마치 그게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처럼 포장을 잘 했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잘 따르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저도 조심하셔야 돼요. 저도 한순간에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받지 않고 내가 악한 영의 여러분 사울도 악한 영의 지배받자 악한 사람이 됐잖아요. 여러분 목회자도 얼마든지 그래 바꿀 수 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목사 개인도 긴장감을 놓으면 안 되고 성도들도 긴장감을 놓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즉 그리스도니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정확하게 구분이 되어 포장을 해도 정확하게 구분이 돼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아무리 포장이 좋아도 그것은 즉 그리스도인 거예요.
아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아버지를 부인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 아들을 시인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곧 시인하는 거예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아들을 부인해요. 신기하게 하나님을 믿어요. 세상에 이런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지 않고 안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요. 상관없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파괴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실은 역사상 그렇게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단으로 규정이 됐어요.
지금 이 땅에도 그런 일이 벌어져요.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거예요. 아들을 부인하면 곧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다. 아들을 인정하면 곧 아버지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이고, 아들을 시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에요. 적 그리스도는 아들을 부인하는 자이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도 부인하는 자예요.
근데 많은 적그리스도가 아들은 부인하지만 아버지는 부인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도 예배를 더 은혜롭게 드려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헌신된 삶을 살 때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속으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 곧 아버지를 부인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건 하나님의 신성 또한 부인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덧 이것이 통용되고 이 시대의 많은 공간에서 여러분 사람들이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신학자의 가르침 속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어요.
근데 이거는 말하지 않고 다른 부분을 강조하니까 사람들이 속아서 넘어가는 경향이 이제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육체로 낳으신 아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아들, 죽음에서 부활하신 아들을 인정하는 것 곧 아버지를 인정하는 자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아버지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따라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을 인정하는 자가 아버지를 인정하는 자고, 아들을 시인하는 자가 곧 아버지를 시인하는 자인 거예요. 아들이 없으면 곧 아버지도 없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아들도 있고 또 아버지로 있는 믿음이 여러분과 제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