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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나라 황제로부터 1등작에 봉작되신 장흥위씨 태시조 필공(畢公) 필고(畢高)공
주나라의 5등작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입니다.
위에서 보면 나라이름 다음에 "公"이 들어간 분은 "공작(公爵)"이라는 말로 주나라 문황제 폐하의 아드님 중에서 1등작인 공작을 받으신 분은 두 분으로 주공(周公)과 필공(畢公)입니다.
"숙(叔)"은 백작입니다. 즉 주나라 문황제 폐하의 아드님들은 대부분 "백작"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작(公爵)"은 정치적 위상이 천자(天子)와 같기 때문에 국정에 대해서 동등한 위치에 논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태시조 필공 전하께서는 1등작인 공작에 봉작되셨으며 기내채읍(畿內採邑)으로 현재의 서안(西安) 이북과 함양(咸陽) 일대를 받으셨습니다. - 함양(咸陽)의 고대 지명이 필(畢)임 - 이외에 10여 개 성읍국가를 받으셨는데 위씨의 직계조상님이자 필공 전하의 장남이신 해백(楷伯)공께서는 해국(楷國)을 받으셨는데 지금의 장치시(長治市) 여성(黎城)입니다.
2. 당나라 황제로부터 1등작에 봉작되신 장흥위씨 시조공 부친(父親)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공
장흥위씨 시조공의 아버님으로 전하는 당나라 태종황제 때 재상을 역임하신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공께서는 1등작(1품)인 국공(國公)을 받으셨습니다. 고구려왕은 요동군공(遙東郡公), 백제왕은 대방군공(帶方郡公), 신라왕은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봉했는데 이는 2등작(2품)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변방의 임금들에게 관작을 내릴 때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1품을 내리지 않았으며 2품이나 3품에 봉했습니다.
8학사 가문인 남양방씨(南陽房氏)는 위징공 다음으로 재상을 지내셨으며 국공의 관작을 받으신 방현령(房玄齡) 공의 후손인데 족보의 서술을 보면 방현령 공을 시조로 하여 남양방씨의 족보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위징공께서 정국공으로 봉작되시면서 지금의 하남성 정주(鄭州. 이곳은 춘추시대 정나라였음)가 위씨의 식읍이되었고, 한 대를 건너서 손자분이 또 양국공(梁國公)으로 봉작되셨는데 양국(梁國)은 카이펑(開封, 춘추시대 양나라였음)으로 이곳은 또한 전국시대 위나라가 100여 년 간 도읍한 후기 도성인 곳으로 현재의 위씨의 절반 이상이 초작시-정주시-개봉시 등의 중원대륙 한복판에 거주하고 있게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케 합니다.
3. 고려시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황제로부터 1등작에 추봉되신 장흥위씨 시조공 회주군(懷州君) 위경(魏鏡)공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황제께서는 장흥위씨 시조공이신 회주군(懷州君)께 1품인 승상(丞相)으로 추봉하여 원나라의 재상으로 추증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송광사 문서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쿠빌라이 황제께서 원감국사를 스승으로 청했을 때 대도(大都, 북경)로 가셨을 때 봉작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6세 위 소(魏 紹)공은 원나라 간섭기에 첨의정승 (僉議政丞)을 역임하셨는데 이는 원간섭기의 문하시중으로 원감국사의 영향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봄직도 합니다..
4. 고려시대 송나라 태종황제로부터 1등작에 봉작되신 장흥위씨 조상님 위덕유(魏德柔)공
위덕유(魏德柔)공께서는 고려 병부낭중(兵部郞中)으로 사신으로 북송을 가셨을 때 989년(고려 성종 8년) 송나라 2대 황제이신 태종황제로부터 1품 광록대부(光祿大夫)에 봉작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국내사서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사서로는 송사(宋史) 등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동아세아의 정치구조는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계층적 구조로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한 세습되는 관작은 가문의 위상을 유지해 가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