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직 목사(부천행복한교회),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 궁금하세요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 펴내
△기도한 뒤 300년 이상 된 산삼 8뿌리 캐
전주시 중화산동 전등교회는 2년 된 개척교회다.
전세로 얻은 건물을 비워줘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건물 주인은 한 달 안에 교회를 비워주든지, 전세보증금을 올려 달라고 했다.
교인 수는 학생들까지 모두 합쳐도 35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교회다 보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황인석 목사는 이제 기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전교인 40일 작정기도’에 돌입했다.
하지만, 40일이 지난 아침까지도 희망의 구름 한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교인들이 애가 달아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 어떻게 하죠.”
“하나님의 집이니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겠지요. 오늘부터 저는 강천산으로 올라가 산기도를 할 것입니다.”
기도 뒤 집사 몇 분도 목사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기도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목사님의 눈에 산삼이 발견됐다.
산중턱 쯤 왔을 때 바위 밑에 빨간 산삼 꽃 한 송이가 목사님께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산삼임을 확인한 목사님은 큰 소리로 외쳤다.
“산삼이다, 산삼.”
교인들이 놀라 몰려왔다.
산삼이 틀림없었다. 아주 오래된 큰 산삼이었다.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산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다시 산삼 세 뿌리를 발견했고, 그 다음날 또 네 뿌리가 발견돼, 모두 여덟 뿌리를 얻었다.
수십 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들에게도 잘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산삼들은 전주 우석대 한의학과 윤용갑 교수가 감정했다.
산삼은 300년 이상 됐으며, 한 뿌리에 1천만 원을 호가한 최상품 이었다.
심지어 길이 120cm, 몸통 둘레 42cm 산삼도 있었다.
기도는 이렇게 기적을 일으킨다.
△구두닦이 청년, 기도하니 유학길 열려 교수 임용
건국대 교수 유태영 박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수님을 믿게 돼 산골마을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구두닦이를 하면서 공부하며 매일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저 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세요.”
선진 농업국가인 덴마크로 가서 가난한 농촌을 잘 살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결심하고,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편지를 영어로 썼다.
그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몰라 기도하던 중에 ‘덴마크에서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덴마크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황제였다.
편지 봉투에 ‘프레데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적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불가능이 없다”고 믿고 그 편지를 우체국에 가서 붙였다.
편지를 보내놓고 기도한지 40일이 지난 어느 날, 국제 우편 한 통이 날아 왔다.
덴마크 외무성에서 왕복 비행기표를 보내온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골뜨기 소년에게 해외 유학의 길을 열어 주셨군요.”
놀랍게도 덴마크 국왕이 한국의 구두닦이 청년을 초청한 것이다.
그는 덴마크에서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친데 이어 이스라엘에서 공부한 뒤 건국대 교수가 됐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매일 기도하며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광야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금식기도 하니 학교 빚 갚을 만큼 후원 들어와
경남 거창고 전용찬 교장은 한국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새로운 자극을 준 기도의 사람이었다.
전 교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빚이 많아 쓰러져 가던 거창고를 맡았다.
1958년 4월, 마침내 거창고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됐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자 전 교장은 성경, 찬송, 담요 하나를 들고 거창읍에서 40리 떨어진 어느 산마을 언덕에 있는 굴속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일주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사흘 동안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했지만 가슴만 답답할 뿐 별다른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사흘째 밤에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이 답답합니다.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정 그러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일주일 금식기도를 마쳐도 응답하지 않으시면 서울로 올라가서 동아일보에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광고를 내겠습니다. 그러게 협박하며 담대함으로 기도하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면서 시원해졌다.
산에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학교 서무과로 편지가 와 있었다.
종복이라는 미국 교포가 수표 한 장을 보내왔다.
2천500달러였다. 당시 학교가 안고 있던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정확한 액수였다.
△산골 가난한 소년, 40일 기도하니 훗날 대학총장까지 올라
전라남도 해남 산정리 시골에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다.
구슬치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이다. 아들을 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됐다.
소년은 40일 동안 꼬박 쉬지 않고 기도한 뒤 하나님께 편지를 썼다.
“하나님, 저는 계속 공부하고 싶습니다. 길을 열어 주세요. 남의 집 머슴살이도 좋고 굻어도 좋습니다. 공부만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소년은 편지봉투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쓴 뒤 우표도 붙이지 않고 우체통에 넣었다.
우체부가 이 편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해남읍에 있는 교회 목사님께 드렸다.
그 편지를 읽고 감동한 목사님은 소년을 불러 아들로 삼고 학교에 보내줬다.
소년은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독일로 유학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대학 총장이 됐다.
그가 바로 한신대 오영석 총장이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이뤄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