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도
개인적이고 나만 위하는 영성이 있고,
모두를 위하는 공동체적 영성이 있다.
좋은 것 속에 푹 빠져
그 혜택만을 누리는 것.
뭐 나 역시도 좋은 건 좋은 것인지라
그것을 누리는 것에 뭐라 하진 않지만,
문제는 그 좋은 것이 사라졌을때
그것을 누리던 이들의 태도이다.
결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것도 아주 합리적으로.
합리적인 것 ㅡ 곧 이성에 부합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대안교육진영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한 푼이라도 더
국가로부터 받아내려 하는 모습을 보며
좀 서글퍼졌다.
무엇을 받아내는 것이 권리이긴 하지만
우리가 애초 이 교육을 시작한 건
세상에 좋은 것을 주기 위함이었지
무언가를 받기위함이 아니었음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물질적 기반을 이야기하며
생존과 자립을 말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물질이 의식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물질주의적인 우리의 모습을.
아마도 돈을 적게 내면
대안학교 문턱이 낮아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입학하고
그러면 학교가(그리고 교육이) 잘 될 거란 순진한 낙관은 어디서 오는걸까?
대안교육의 위기는
더 이상 대안학교들이 교육적인 새로움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10~20년전 만들어 낸 문화적 새로움과 실험은
이미 혁신학교들에서 외적인 모양새를 거의 다 따라하고 있어서
그곳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 아닌가?
대안교육이 더 이상 무엇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면,
혹은 사회(교육, 학교)의 문제에 더 이상 답을 주지 못한다면,
더 이상 대안일 수 없다.
우리는 시대에 필요한 정신을 찾아내고
그 새로움을 시대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무엇을 자꾸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학교와 사회, 그리고 시대에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우린 다시 살 수 있다.
슈타이너가 말했던가?
"개인의 권리주장이 적어질수록, 그 권리와 혜택이 더 많이 공동체에 돌아갈수록 그 공동체의 영성은 더 커진다" 고.
우리는 각 개인의 영성이 커지는 데 몰두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동체의 영성이 커지는 데 몰두하고 있는가?
(2019.06.20 다산초당에서 썼던 글)
첫댓글 선생님의 글은 읽고
낮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푸른별입구에 있던 오동나무가 싹둑 잘려나갔다고 합니다.
태풍이 불면 나뭇가지가 꺽여 떨어진적이 있긴 하지만 아주 긴 시간동안 아이들의 조표같았던 나무가 잘려나가니 마음이 복잡하다는...
위험해 보이니 잘라달라는 민원을 넣었다는 부모님들은 그 나무의 역사를 알고 있었을까요?
혹시 내아이 다칠까 위험해 보이는 모든것을 다 처리해 주고 다니고 있지는 않은지...반성해보는 날입니다.
헉!
헐...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