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당첨 / 이미옥
몇 년 전 작은아이가 “엄마, 로또 당첨되면 말 한 마리 사 주세요!”라고 했다. 딸아이의 엉뚱한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고양이나 개가 아닌 말은 애완의 의미로 두긴 너무 황당한 동물이라 얼마 전 키우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말은 아주 비싸기도 하고 마구간 있는 큰 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는 엄마가 부자 되는 길은 복권 당첨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나 보다. ‘아아, 로또 당첨! 흐흐흐.’
‘굿 타이밍’이란 이럴 때 하는 말인가?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광양시에서 학생 중심 교육 과정 운영의 일환으로 학생 승마 체험 지원 사업을 시행하오니….’ 바로 신청하고 연락 오기를 기다렸다. 안되면 실망할까 싶어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며칠 후 신청자가 많아 고학년 위주로 선발했다는 명단에 딸아이 이름도 있었다. 말을 사는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이도 좋아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여러 학교 공모 사업이라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이들은 간단한 안전 수칙과 용어를 배우자마자 말 위에 태워졌다. 조랑말부터 성인 남자 키만 한 다리를 가진 말까지. 아이들을 태운 말이 천천히 원형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간단한 보호 장비를 착용하긴 했지만 딸아이가 행여 떨어질까 싶어 불안했다. 훈련된 말이라고 우릴 안심시키는 승마장 원장 말에도 다들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30분 남짓 탔을까? 아이들은 차례로 트랙 밖으로 나와 말에서 내렸다.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힌 채 보호구를 벗는 딸아이를 보며 어땠냐고 물으니 “엄마, 말이 엄청 뜨거워요.”라고 대답했다. ‘재밌었다’, ‘무서웠다’ 대신에 ‘뜨겁다’라고 하자 커다랗고 순한 눈동자를 가진 생명체가 보였다. 내 아이가 말을 타고 있는 것에 빠져 미처 보지 못한 동물을 다시 바라봤다. 아이들을 태우고 묵묵히 원형을 돌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승마는 유소년팀에 들어가면서 횟수가 늘었다. 선수가 되면 수강료도 더 싸고 말 타는 시간도 길었다. 당연히 시합에도 나가야 했다. 연습 중 말에서 떨어진 딸아이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 강사가 바로 옆에 있어서 큰 사고는 없었다. 아이도 울지 않아 많이 놀란 건 아니라 여겼다. 대회에 나간 아이는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큰 말을 타고 차분히 경기를 마쳤다. 초보자가 많은 팀이라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지켜보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무사히 마친 것에 만족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말 타는 것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작은 말은 그나마 나았는데 큰 말이면 잔뜩 긴장한 채 몸이 굳었다. 집으로 오면서 물어보면 계속 할 거라고 했다. 그날도 어정쩡하게 말을 타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이가 마구간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조랑말에게 달려가 각설탕을 주자 말은 혀를 낼름 내민다. 아이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 그 순간 알았다. 아이는 말을 타고 싶은 게 아니라 함께 놀고 싶었던 거란 걸. 나 때문에 내색도 못 한 거 같아 미안했다. 아이에게 말하고 놀기만 해도 된다며 다음에는 그냥 오자고 얘기했다. 그리고 승마를 그만뒀다. 로또를 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