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건물 뒤 흙담 화장실 벽에 하얀 백묵으로 선명하게 “허숙희 울보”라고 쓴 낙서를 읽게 된 것은 1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오래전부터 여기저기 써 있었으나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나는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대성통곡하며 오랫동안 울어 할머니께서 학교에 가서 낙서를 모두 지웠고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고 왔다고 하니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외가에서 학교에 다니던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언니가 방학 때 가방을 메고 온 모습을 보고 학교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쓰며 그쳤다 조르기를 반복하면서 계속 울어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이듬해 아버지는 내 생일을 적당히 고치고 입학시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내 몸뚱이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잦은 근무지 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면 우리를 외가 마을에 있는 학교로 전학시켰다. 나도 입학하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경북 안동에 있는 ‘서 초등학교’에서 경기도 용인 ‘양지 초등학교’로 옮겼다. 가죽 가방을 매고 분홍색 스웨터와 까만색 주름치마를 입고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아래위로 살펴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으로 이름을 말하자 아이들은 온통 까르르 웃었다. 이때부터 내 눈물주머니는 마를 새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이 아이 저 아이가 내 치마를 들쳐 보며 신고 있는 스타킹을 어루만지면서 신기해했다. 선생님이 그러지 않도록 여러 차례 주의 주었지만 놀림은 끝이 없이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난 창피하고 싫어서 울어버렸다. 작은 시골 학교에서 소문은 금방 퍼져 누군가가 ‘허숙희 울보’라고 썼고 낙서는 계속 늘어갔다. 심지어는 ‘경상도 문둥이’라고 놀리는 아이들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난 늘 울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 별명은 ‘울보’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생활하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눈물 흘릴 일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의 권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여상에 진학해야 하고, 엄마가 만류했지만 싼 등록금에 맞추어 선택한 교육 대학마저도 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책을 온통 물속에 집어넣고, 취직하여 동생들 학비를 보태야 한다는 엄마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와 친구 자취방에 얹혀사는 처지가 되었을 때도 난 울지 않았다.
8년 전 남편이 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수술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도 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남편의 남다른 의지와 점점 발전하는 의술을 믿었기에 잘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검사 결과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며 담당 선생님께서 표창해야겠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런데 5년 전부터 약간의 손떨림 증상이 있어 계속 진료받았으나 ‘지켜보자’고 하더니 작년 겨울부터 심해졌다. 여러 단계 복잡한 과정을 거친 검진 결과는 ‘파킨슨’이란 병이었다. 현대 의학으로는 원인도 정확하게 모르고 뾰족한 치료 약도 없다고 했다. 투약하며 증상을 늦추는 길이 최선이라고 한다. 남편은 벌써 두 번이나 중증 난치성 질환으로 ‘산정 특례 대상’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절차를 밟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중증 환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남편이 너무 불쌍해 그만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남편은 운동량을 늘리려고 전과 다르게 더 열심히 운동하면서 애쓰지만 등이 점점 굽어지고 엉거주춤해지면서 동작이 느려져 가슴이 너무 아프다. 가만히 있어도 남편의 손은 떨린다. 그런 손을 보면 그냥 눈물이 흐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난 다시 울보가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