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봉화산 철쭉산행

[박종국]

남원 봉화산 철쭉산행

  남원의 복성이재에서 들머리다. 촉촉하게 내린 비로 감촉이 좋다. 강한 바람이 부는 소나무 숲을 오른다. 피톤치드라도 쏟아져 나오는 걸까 기분이 상쾌하다. 왼쪽은 목장이었는데 고사리밭으로 바뀌고 수확을 끝냈다.

  매봉에 올라선다. 저만큼 봉화산도 우둑 솟아있다. 그런데 벌겋게 물들었어야 할 철쭉은 보이지를 않는다. 한 걸음 늦어 이미 져버린 상태이다. 나무만 무성하다. 언제는 빠르고 언제는 늦고 꽃철 맞추기가 쉽지 않다.

  오랜만에 추억의 길을 밟듯이 백두대간 길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일부러 백두대간을 가는 것이 아니다. 출렁거리던 억새밭을 가고 있다. 하지만 또 다시 억새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철쭉을 보러가는 길이다.

  2007. 03. 03.에 계획된 산행 백두대간을 따라 지나갔었다. 벌써 7년이 훌쩍 지나서 그때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다. 그때 눈여겨보았던 것이 있고 그때 지나가며 생각했던 것이 있고 그때 힘들어 하던 길목이 있다.

  어디라고 굳이 적어놓거나 감추지는 않았지만 아직껏 지워지지 않은 구석이 있을 것이다. 마치 오늘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때는 철이 일러 철쭉이 망울만 맺혔을 뿐이었다.

  갓 움튼 두릅 순을 잘라갔고 숱하게 많은 보리수나무 아래를 지나가기도 했다. 누렇게 변질된 대궁 억새들이 좀은 처량한 모습으로 비쳐졌었다. 하지만 햇살을 받으면 금세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을 발하기도 했었다.

  모두가 잊혔지 싶었지만 신기하리만치 가물가물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때는 정말 부지런히 지나갔다. 갈 길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기만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다소 느긋한 마음에 여유를 갖고 두루두루 훑어본다.

  그만큼 생소하지 않은 데다 추억 같은 밑줄거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옆은 그 안쪽이 궁금할 만큼 나무들이 우거져 녹음을 이루며 침침하다. 틈새로 따가운 햇살이 끼어들어 그림자를 만들고 바람이 출렁거린다.

  아그배나무(돌배나무)와 쥐똥나무 꽃이 초록물결 속에 향기처럼 하얗게 들어온다. 다리재에서 오름은 다소 완만해진다. 봉화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늦은 자에 대한 배려처럼 몇몇 남겨뒀던 철쭉꽃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래전 화재로 모두 타버리고 알머리가 된 정상은 철쭉이나 억새와 잡풀이 자라지만 아직도 가릴만한 나무가 없다. 자연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가 좋은데 봉화대의 문화재 발굴에 무엇을 만들려는지 들쑤셔 놓았다.

  저 아래가 들머리였던 복성이재의 오른쪽 흥부마을이다. 아마 지금쯤은 그곳에도 마음을 설레게 했던 전설속의 제비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부동산 붐 탓인가. 너무 인색해 집터 하나 장만해 주지 않았다.

  더구나 독한 농약에 먹잇감마저 얻기 쉽지 않으니 새끼를 키워낼 수 없었다.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당황한 제비는 미련 없이 포기한 것이다. 착한 흥부나 악역의 놀부도 먼 옛이야기일 뿐 그냥 조용한 산골마을이다.

  백두대간 길은 이어지고 따가운 햇살을 피해 따라가노라면 바람이 동행을 하면서 선들선들하게 한다. 묵은 억새는 삭거나 넘어지고 뻣뻣하니 눈꼴사납다. 때 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어수선하다.

  제 죽어가는 몸뚱이 하나 제대로 처신을 할 수 없으니 뒤 세대에 밀려나는 몰골이 참담한 모습이다. 아무리 억세어도 초록의 도도한 물결에 어쩔 수 없다. 강함이 부드러움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있는 중이다.

  해발 870m나 되는데 이름을 얻지 못해 무명봉이다. 좀은 안쓰럽다. 주위에 봉화산의 위엄에 기가 죽은 데다 특별히 내놓을 만한 것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그래도 조망만큼은 괜찮지 싶은데 그것으로는 부족한 게다.

  산줄기는 왕싸리나무와 억새가 지키기도 하고 철쭉나무가 줄을 섰다. 이따금 부드러운 미색의 철쭉꽃이 반겨주기도 한다. 철쭉꽃은 다섯 장 꽃잎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통꽃으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송이채 진다.

  산길은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다. 바꾸어 내림이 있으면 오름이 있다. 높은 봉우리가 힘들게 하는가 하면 깊은 계곡을 걷기도 한다. 이렇게 반복된다. 어디 좋은 길만 가랴. 어디 어렵기만 하랴. 삶도 마찬가지다.

  힘들었던 만큼 그 이룸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을 슬기롭게 참고 이겨내는 것이다. 자주 산을 오른다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 비록 낮은 산이라도 쉽지가 않다. 다만 참아내는 것일 뿐이다.

  날마다 하루하루 걱정거리가 생겨나 쉽지만은 않은 삶과 같다. 그 때 그 때 헤치고 나가노라면 그 보람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 아무리 힘들게 올랐어도 곧 내려서야 하듯 아무리 좋은 순간도 한없이 머물 수는 없다.

  앞으로 쏠리며 푹 떨어져 광대치를 지나 다시 오름길이다. 이렇게 다시 힘들게 오를 것이면 왜 그리 쉽게 내려오는 거야. 하지만 산은 파도라도 타듯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넘나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목표지점에 닿는다.

  월경산을 넘으면서 오늘의 끝자락 중재로 간다. 그때 산사태로 망가졌던 길은 아직도 복원 중에 있다. 자연도 한 번 부상을 당하면 쉽게 치유가 되지 않는다. 철쭉산행으로 나섰지만 명색만 냈을 뿐 아쉬움으로 남았다.

- 2014. 0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