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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문화재 보물을찾아라 인디아나존스들 ( 15회~20회)Ⅰ [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15. 춘천 중도 유적 발굴한 이강승 충남대 교수
의암댐 물 빠지자 드러난 ‘중도식 토기’… ‘원삼국’ 역사 다시 써
이강승 충남대 교수가 지난달 24일 강원 춘천시 중도에서 1980년 발굴 당시 작업(아래 사진)을 회고하고 있다. 그가 발굴한 1호 집자리에서는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을 바꾼 ‘중도식 토기’가 발견됐다. 춘천=박영대 기자
지난달 24일 이강승 충남대 교수(67)와 찾은 강원 춘천시 중도(中島). 그가 1980년 발굴해 대학 교재와 교과서에도 실린 ‘중도식(中島式) 토기’가 나온 1호 집자리(주거지 흔적)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흔한 표지판조차 없이 삭막한 아스팔트 포장도로만 유적 위를 덮고 있었다.
이 교수는 36년 전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1호 집자리가 있었을 위치에서 사진촬영을 마쳤다. 집자리 근처에서 50여 m 떨어진 레고랜드 사업부지에서는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4년 사업부지 안에서 1400여 기에 이르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주거지 등이 무더기로 발견돼 개발 논란이 일었다.
“많은 게 바뀌었지만 선착장 자리는 그대로군요. 모든 이야기는 저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지난해 정년을 맞은 노교수의 눈은 이미 1977년을 향하고 있었다.
○ 운명은 정해진 자의 몫
민무늬에 바닥이 평평하고 주둥이가 바깥으로 벌어진 전형적인 ‘중도식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가봐야 별 것 없을 거요. 내가 방금 가보니 토기 조각 하나 없습디다.”
1977년 5월 20일 춘천 중도 건너편 선착장. 지표조사차 중도행 배를 기다리던 이강승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안춘배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전 신라대 교수)을 우연히 만났다. 중도 조사를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안춘배의 말에 그는 별 기대감 없이 배에 올랐다.
하지만 운명은 정해진 자의 몫이던가. 그는 운 좋게도 중도에 도착한 직후 강물에 의해 깎인 중도 단층에서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의암댐 수위 조절로 만수위 때 중도를 방문한 안춘배는 물속에 단층이 잠겨 토기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강승은 수위가 낮아질 때 들어가 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행운이 계속 이어졌다. 3년 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1980년 5월 중도 사전답사를 나섰을 때에도 강가 단층에서 토기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지표조사 때보다 더 큰 수확을 얻었다. 조각이 아닌 완형(完形)의 토기가 나온 것이다. 그는 중앙박물관 고고부로 수습한 토기를 가져왔다.
그즈음 다른 업무차 고고부를 방문한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이 토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병삼은 “야,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내뱉고 서둘러 최순우 중앙박물관장을 만나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다”고 귀띔했다. 박물관이 이후 5년간 진행한 중도 발굴의 서막이었다.
이강승은 “한 관장은 경주에서 나온 와질토기(瓦質土器·회색이며 기와처럼 무른 토기)의 고고학적 맥락을 잘 알고 있었다”며 “중도 토기를 보고 와질토기와 대응하는 유물이 한반도 중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중도식 토기, 원삼국시대를 보는 창
1970년대 후반 경주 조양동 등에서 발견된 와질토기는 고고학계에 실체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와질토기는 원삼국시대 토기로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삼국시대 토기를 잇는 과도기 단계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와질토기에 해당하는 원삼국시대 토기가 중부지방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한동안 오리무중이었다.
민무늬 혹은 타날문(打捺文·실이 감긴 도구로 두드려 새긴 무늬)토기로 나뉘는 중도식 토기가 발견되면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계는 중도식 토기가 원삼국시대 문화 교류의 양상을 반영하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중도식 타날문토기는 연나라 등 중국 전국시대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중도식 민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전통을 잇는 것으로, 한반도 서북지역 혹은 동북지역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강승은 “중도에서는 민무늬토기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았다”며 “이곳 주민들이 타날문토기 제작 기술을 나중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노학자의 겸손 그리고 용기
누구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용기와 겸손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강승은 1980년 당시 1호 집자리가 ‘여(呂)자’형 구조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사각형 주거지에 대한 편견에 갇혀 주거 공간 앞에 또 하나의 전실(前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앙박물관의 1980년대 발굴보고서에는 1호 집자리가 말각방형(抹角方形·모서리를 둥글게 한 사각형) 형태라고만 기술돼 있다. 1호 집자리의 여자형 구조는 2010년 중도 재발굴 때 뒤늦게 밝혀졌다.
“중도는 현장 책임자로 첫 발굴이어서 미숙한 점이 많았고 부담감도 컸습니다. 돌이켜보면 시간, 예산의 제약으로 폭넓게 발굴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앞으로 원삼국시대 무덤과 문화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레고랜드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유적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신중하게 진행되길 바랍니다.” [춘천=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6.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한 권오영 서울대 교수
백제 왕궁 풍납토성, 그 한가운데 뚫린 우물의 정체는?
19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건물터(44호 유구) 앞에서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2008년 9월 초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내 우물터 발굴현장. 현 지표면으로부터 5m 아래 구덩이에서 젊은 여성 조사원의 환호가 들려왔다. 발굴책임자였던 권오영 당시 한신대 교수(현 서울대 교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꽃삽으로 자갈과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던 한지선 한신대 조교(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한 무더기의 백제시대 토기들을 발견한 것. 40여 점의 완형(完形) 토기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묘한 모습이었다.
구덩이 폭이 1.5m에 불과해 조사원 한 명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땅을 겨우 팔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위에서 돌이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지선은 철모를 눌러쓴 채 사진을 찍고 토기를 하나씩 수습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토기들을 올려 보내고 다시 땅을 파내자 또 한 겹의 토기 무더기가 나왔다. 무려 200여 개에 달하는 완형 토기들이 5층을 이뤄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19일 발굴현장을 다시 찾은 권오영은 “1999년 1차 발굴에 이은 2008년 재발굴에서 왕궁 우물(御井·어정)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풍납토성 안에 한성백제시대 왕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 왕궁 우물 안에 토기 200개나 묻은 사연
권오영 교수의 한신대 발굴팀이 2000년 경당지구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모습(맨위 사진). 2008년 재발굴에서 실체가 드러난 우물터(가운데)에서 총 200여 개에 이르는 백제시대 완형 토기들(맨 아래)이 출토됐다. 한신대 박물관 제공
발굴 초기 우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우물 입구부터 자갈과 흙으로 빽빽하게 매립된 상태인 데다 얼핏 부여 제석사지, 왕흥사지와 구조가 엇비슷해 발굴팀은 목탑 터로 오인하기도 했다. 현 지표면으로부터 6m(백제시대 기준 3m) 아래 바닥까지 완전히 발굴한 뒤에야 우물터임이 드러났다.
남은 과제는 우물과 완형 토기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 고대인들에게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닌 신성한 존재였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우물을 폐기할 때 토기와 각종 희생물을 함께 넣고 제사를 드렸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신라시대 우물터에서는 어린아이의 유골이 출토됐다. 경당지구 우물터에서도 폐기를 위한 제사 행위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토기만 나올 뿐 동물의 뼈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우물 폐기 시점에 흔히 보이는 전염병이나 전란 등 천재지변의 흔적도 없었다.
권오영은 토기들의 개별 양식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우물이 축조된 4∼5세기 전라, 충청지역 토기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는 왕궁 내 자리 잡은 우물터의 정치적 상징성과 토기양식을 감안할 때 이곳에서 백제 왕실과 지방민 사이의 복속의식이 치러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대 일본의 도다이지(東大寺)에서 본사와 지방 말사들이 모여 합수(合水) 의식을 치른 것처럼, 각 지방 지배층이 토기에 특산물이나 물을 담아 경당지구 우물에서 회맹의식을 치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정벌했지만 강력한 중앙통치가 이뤄지지 않아 학계는 한동안 이들이 반(半)자치 상태에 놓였다고 본다. 신라, 고구려와 맞서는 상황에서 막 복속시킨 지방의 충성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발견
1999년 경당지구 1차 발굴에서 발견한 한성백제시대 문자의 의미도 적지 않다. 발굴을 빨리 끝내 달라는 재개발조합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그해 12월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서 작업이 진행됐다. 유적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 세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최장열 당시 서울대 대학원생(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뛰쳐나왔다.
그는 권오영에게 달려가 “토기 조각에 글자가 새겨진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한성백제시대 문자 자료는 백제왕이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가 유일했기 때문에 권오영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토기 조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분명 글자가 있었다. ‘大夫(대부)’였다. 며칠 뒤 같은 유구에서 ‘井(정)’자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됐다. ‘大夫’자 토기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였다. 해당 유구(101호)는 10마리의 말 뼈와 더불어 약 1200점에 달하는 제기용 토기가 깨진 채 쌓여 있는 제사용 폐기장으로 밝혀졌다.
‘大夫’에 대해서는 백제의 중앙관직명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1999년 시루봉 고구려 보루에서도 ‘大夫井’이 새겨진 명문 토기가 발견됐다. 권오영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적 친연성을 고려할 때 ‘大夫’와 ‘井’이 종교 의례와 관련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학계는 풍납토성이 2∼5세기 한성백제시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인근 몽촌토성이나 석촌동고분은 4세기 이후 조성됐다. 특히 경당지구에서는 왕실 우물과 더불어 국가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44호 유구)도 발견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경당지구는 토성과 더불어 한성백제 왕성의 존재를 실증하는 핵심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7. 천마총 발굴한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천마총 금관에 손을 뻗는 순간… 하늘이 울기 시작했다
지난달 27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앞에서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이 43년 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장승윤 기자
“광복 이후 ‘3대 발굴’에 모두 참여한 건 제게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지난달 27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앞에 선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3·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푸른 뗏장을 입은 고총(古塚)을 바라보며 4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968년 무령왕릉을 시작으로 1973년 천마총, 1988년 창원 다호리 고분까지 3대 발굴에 모두 참여한 그는 한국 발굴사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그는 “졸속으로 진행된 무령왕릉 발굴을 반면교사로 삼아 천마총은 제대로 발굴하려고 애썼다”고 술회했다.
○‘정말 하늘이 노(怒)한 것인가…’
천마총에서 발굴된 금관은 광복 이후 처음 출토된 신라시대 금관이다.
1973년 7월 초순 천마총 발굴 현장.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바쁘게 움직이던 조사원들이 일손을 잠시 멈추고 숨을 죽였다. 목관 머리부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노란색 금속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건져낸 신라 금관이었다.
금관총이나 서봉총 금관은 일제강점기 일본 고고학자들이 찾아냈다. 관테부터 영락까지 흙에 묻힌 금관 전체를 대칼과 붓으로 노출시키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지건길(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사)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신라 금관 발굴이었다. 황홀경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영물(靈物)을 건드리면 천기운행도 상서롭지 않게 되는가. 금관을 들어올리기 직전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경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이날도 종일 하늘이 쨍쨍하던 터였다. 강풍으로 봉분 위에 쳐놓은 텐트가 날아가려고 해 조사원 여럿이 붙들고 간신히 버텼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5년 전 무령왕릉 발굴이 떠올랐다. “그때도 낮엔 맑았는데 야간 발굴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어요. 무령왕릉 내 연도를 따라 석실 안으로 들어차는 물을 빼내려고 조사원들이 사투를 벌였습니다. 무덤 발굴이 왕의 넋을 노하게 한 건가 싶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관을 나무상자 안에 옮겨놓자마자 뇌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쳤다.
○ 발굴 초창기 열악한 환경
천마총 내 부장궤 안에서 발견된 천마도 말다래. 신라시대 채색화로는 처음 출토됐다.
천마총 발굴은 최대 규모의 적석목곽분인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기획된 일종의 테스트베드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이 결정되자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김정기 발굴단장은 “황남대총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발굴 경험이 일천하니 이보다 작은 천마총을 먼저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1970년대 국책 발굴사업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렸다. 초창기였던 만큼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지름 60m, 높이 13m에 이르는 거대 봉분의 흙을 퍼내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굴착기나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기계를 동원할 수가 없어 드럼통을 반으로 쪼갠 뒤 이를 이어 붙인 관로(管路)를 직접 만들었다. 봉분 꼭대기에서 삽으로 퍼낸 흙을 관로로 흘려보내는 식이었다. 지건길은 “그때의 원시적인 작업 광경을 요즘 고고학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 1500년을 품은 천마도의 신비한 색(色)
1973년 천마총 발굴팀이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를 현장에서 수습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덤 이름이 천마총이 된 것은 목제 부장궤 안에서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말다래(말을 탈 때 흙이 다리에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건길이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최고로 꼽는 천마도는 처음 발견된 신라시대 채색화다. 그는 “외부 공기에 닿아 변색이 일어나기 직전의 천마도는 너무도 생생한 빛깔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천마도는 보존 처리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유물 수습과 동시에 아직 부식되지 않은 부장궤 일부 나무판재를 약품 처리했다. 김유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의 조언에 따라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을 가열해 녹인 뒤 붓에 묻혀 판재에 꼼꼼하게 발랐다.
부장궤 내부 상황은 더 까다로웠다. 금동장식의 말다래 밑에 자작나무로 만든 말다래 두 겹이 깔려 있었다. 오랜 세월 돌에 눌린 채 맞물려 있는 말다래들을 훼손하지 않고 안전하게 분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처음에 말다래 사이에 합판을 넣으려다 실패했지만 함석판을 끼워 넣어 가까스로 분리했다. 수습 이후 박물관에서 시행한 보존 처리도 자외선 차단용 커버를 씌우고 30분 간격으로 가습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하루 만에 발굴을 끝낸 무령왕릉과 달리 8개월에 걸쳐 진행된 천마총 발굴이지만 후회는 남았다. “칠기(漆器)처럼 외부에 노출되면 금방 부식되는 유기물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점이 늘 아쉽습니다. 천마총의 정확한 축조 연대를 규명해 무덤의 주인을 알아내는 게 남은 과제일 겁니다.” [경주=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8.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발굴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
기묘한 꿈 덕분인가… 논바닥에서 8000년 전 배가 떠올랐다
14일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에서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나뭇조각 등 유기물질이 남아있는 저습지 유적을 처음 본 순간 대박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창녕=김경제 기자
“저 논바닥 보이죠? 이곳이 8000년 전에는 바다였습니다.”
14일 경남 창녕군 비봉리 유적 전시관 앞. 임학종 국립김해박물관장이 11년 전 발굴 현장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시대 나무배를 비롯해 첫 ‘똥 화석(분석·糞石)’,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등이 출토된 대표적인 선사 유적지다. 특히 여기서 출토된 나무배(비봉리 1호)는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조몬 시대 목선에 비해 2000년 이상 앞선다.
발굴의 ‘구루’들에게는 상서로운 꿈자리가 따르는 걸까.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직전 아내가 용꿈을 꾼 신광섭 울산박물관장(본 시리즈 2회)처럼 2005년 발굴 당시 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던 임학종 역시 기묘한 꿈을 꿨다.
○ 우리나라 최고(最古) 나무배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나무배’.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다.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발굴을 위해 십자형으로 둑처럼 쌓아 구별해 놓는 곳에 돼지꼬리 모양의 끈이 달려 있는 꿈을 꿨어요. 느낌이 심상치 않으니까 뭔가 납작한 판이 나오면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내게 보고해 주시오.”
2005년 6월 초순 임학종은 김해박물관 조사원들에게 느닷없이 꿈 얘기를 꺼냈다. 그는 꿈에서 본 끈을 배를 접안시킬 때 사용하는 밧줄로 해석했다. 주변에서 온갖 물고기 뼈와 조개, 대형 어망추 등이 출토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이곳은 수천 년 전 바닷가였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배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나무배가 130척이나 출토됐지만 국내에서는 신석기시대 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조사원들은 ‘더위를 드셨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달 24일 오후 3시 유적 북쪽 끝 개흙. 지표로부터 6m, 땅속의 가장 아래 패각층까지 드러난 지점에서 굴착기 기사가 “그만 파자”고 했지만, 임학종은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긁어 보자”고 채근했다.
삽날로 지면을 살짝 긁는 순간, 노란 선이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윤곽선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아 작업을 중단시키고 뛰어 내려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판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개흙 속으로 손가락을 깊숙이 쑤셔 넣고 쭉 훑어봤는데 한참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야. 이 정도 크기의 나무판이라면 100% 배가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순간 몸에서 전율이 일어납디다.”
발굴단이 1시간에 걸쳐 개흙에서 파낸 나무배는 길이 310cm, 너비 62cm 크기였다. 발굴단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유적 위에 천막을 치고 나무배 전체에 중성지를 덮었다. 변조와 부식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나무 특성상 현장에서의 보존이 관건이었다. 배에서 조그만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을 박성진 경북대 교수(임학)에게 자문한 결과 수령이 약 200년 된 소나무로 판명이 났다.
발굴단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급파된 목재 보존 전문가 2명과 함께 주변 개흙과 한꺼번에 퍼낸 나무배를 특수 제작된 나무상자 안에 넣고 무진동 특수차량에 실어 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배는 올해로 12년째 보존 처리가 진행 중이다.
○ 첫 ‘똥 화석’ 찾아내려 정성
비봉리 유적에서 발견된 ‘도토리 저장 구덩이’(위쪽사진)와 ‘똥 화석’
온전한 형태의 ‘도토리 저장 구덩이’ 87개를 무더기로 발굴해 낸 것도 큰 성과다. 이전에 발굴된 것들은 수도 적고 형태도 온전치 않아 정확한 기능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임학종은 이른바 ‘어깨선’(유적 조성 당시의 지층)을 찾는 데 성공해 저장 구덩이의 본래 크기를 밝힐 수 있었다.
신석기인들은 채집한 도토리의 떫은맛(타닌)을 없애기 위해 소금기가 있는 바닷물에 일정 기간 보관한 뒤 먹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안가에 구덩이를 판 이유다. 따라서 도토리 저장 구덩이의 개별 위치를 파악하면 신석기시대 당시의 해안선을 그릴 수 있다.
비봉리 일대 내륙이 신석기시대 바다였다는 사실은 자연과학 연구로도 입증됐다. 바다에서만 서식하는 규조(硅藻)류가 비봉리 토층에서 검출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된 똥 화석도 의미가 작지 않다.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 발전한 일본에서는 똥 화석을 선사인의 영양 상태와 당시 식생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임학종은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똥 화석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늘 있었다”며 “비봉리 발굴 현장에서 퍼낸 모든 흙을 삼중(三重) 채로 일일이 걸러 똥 화석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창녕=김상운 기자 ]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19.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한 안재호 동국대 교수
-국내 첫 발굴 환호… 日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설 밝혔다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에서 안재호 동국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청동기시대 환호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울산=박영철 기자
지난달 26일 울산 검단리 유적. 10분 정도 올라갔을까, 구릉 위로 평탄한 잔디밭이 넓게 펼쳐졌다. 인위적으로 흙을 파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 역력했다. 안재호 동국대 교수(62·고고학)는 “지금 우린 청동기시대 마을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릉 서쪽에는 강이 흐르고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막혀 취수(取水)와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1990년 당시 촬영한 울산 검단리 유적 발굴 현장. 사각형의 주거지 유구 주변을 원형으로 감싼 환호가 보인다. 안재호 교수 제공
바로 이 잔디밭 아래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조성된 청동기시대 환호(環濠)가 묻혀 있다. 1990년 안재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한 환호다. 환호란 선사시대 마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외곽을 둘러싼 도랑을 말한다. 청동기시대 후기가 되면 잉여 생산물을 놓고 집단 간 갈등이 벌어지는데, 환호는 이때 방어수단으로 만들어졌다. 고고학자들은 환호가 계급 발생이나 초기 국가 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본다.
○ 일본 청동기문화 한반도 전래 입증
“이쯤에서 끝나야 하는데 거참 이상타….”
1990년 3월 초순. 안재호는 조사원 동진숙(현 부산시청 연구관), 이현주(정관박물관장)와 함께 청동기 주거지를 발굴하면서 의구심이 생겼다. 주거지라면 일정 범위에서 끝이 보여야 하는데 흙을 걷어낼수록 유구의 범위가 오히려 넓어지는 양상이었다. 발굴 경험이 많은 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래쪽 유구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그때 ‘혹시 두 지점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어요.”
그의 직관은 적중했다. 유구를 이어보니 휘돌아나가는 너른 구덩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형적인 환호였다. 수많은 환호가 발견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그때까지 한반도에서는 환호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학계는 자신들의 청동기문화가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의 고대 철기문화도 삼한이 아닌 낙랑에서 넘어왔다고 설명하는 등 가급적 한반도 도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학계의 태도가 반영된 시각이었다. 그러나 울산 검단리를 계기로 전국에서 30여 기의 환호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일본 학계는 한반도의 영향을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환호 발굴 직후 국내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환호 안팎에서 수습된 청동기나 석기의 수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유구 간 맥락을 통해 사회상을 유추하기보다 유물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일본학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이 검단리 발굴 현장을 직접 찾아와 환호의 형태부터 주거지 개수까지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했다. 2년 뒤 검단리 발굴 성과는 주요 학술지인 ‘일본 고고학 연구’에 다양한 컬러 사진과 함께 비중 있게 게재됐다.
○ 한일 환호의 차이점은
검단리 환호는 주변 유구의 양상을 감안할 때 존속 기간이 불과 한 세대(약 30년)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수백 년에 걸쳐 환호가 2중, 3중으로 계속 확대되는 일본 환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또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환호 내부의 주거지 수가 적어 쉽게 폐기될 수 있었던 점도 특이하다. 현장을 방문한 하루나리 교수도 검단리 환호 내 주거지가 21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과 일본 환호 유적의 차이는 무얼 말해주는가. 안재호는 “환호를 통한 차별화 내지 계층화보다 공동체를 하나로 인식하려는 한반도 선사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검단리에서의 환호 발굴은 유적층 위에 쌓인 퇴적층을 굴착기로 걷어내 전체 유구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 집중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발굴 현장에 중장비를 동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안재호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흙을 걷어냈다면 둘레 300m, 면적 6000m²에 이르는 환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움은 남는 법. 검단리 발굴에서 후회되는 게 있는지 물었다. “당시 환호 안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각종 쓰레기들이 쌓였을 겁니다. 음식물부터 꽃가루까지 다양한 식생 자료가 포함됐을 거예요. 환호 바닥 흙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을 시도했다면 마을의 성격을 규명할 만한 다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울산=김상운 기자]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20.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한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한 무덤에 30여 명 최다(最多) 순장… ‘잊혀진 왕국’ 대가야를 만나다
발굴한 지 39년 만에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앞에 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그의 등 뒤로 산 능선을 따라 대가야 고분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이 산에는 고분 70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령=김상운 기자
10일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마치 낙타 혹처럼 능선을 따라 거대한 봉분들이 주산(主山)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수백 개의 고분이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선산(先山)이나 다름없었다. 백제 왕릉이 모여 있는 공주 송산리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규모를 모두 능가했다. 약 15분을 올라 정상에 가까운 44호분 초입에 이르자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가야인들이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경사면을 깎아내고 땅을 고른 흔적이었다. 함께 답사에 나선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66·고고학)는 “44호분 옆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지은 가건물을 짓고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발굴을 했다”며 “197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고 회고했다.
○ 가야사 연구 암흑기 시절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고난을 겪은 역사를 반영하듯 오랫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천마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과 백제 무령왕릉이 학계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가야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방치됐다. 여기에는 가야 고분 연구가 자칫 일본의 식민사학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한몫했다.
앞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야 고분을 파헤쳤다. 이들은 일본계 유물이 가야 고분에 많이 남아있을 거라고 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가야 점령 기록은 광복 이후 우리 학계의 가야 고분 연구에 걸림돌이 됐다.
김세기가 계명대 학부생으로 참여한 1977∼1978년 고령 지산동 고분 발굴은 순장곽 같은 가야 특유의 고분 양식을 확인함으로써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왜곡과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1925∼1991)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한 것도 가야사 연구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 한반도 최다(最多) 순장묘 발굴
1977년 11월 시작된 44호분과 45호분 발굴은 경북대와 계명대가 각각 맡았다. 윤용진 경북대 교수와 김종철 계명대 교수가 발굴단장으로, 주보돈 조교(현 경북대 교수)와 김세기 등이 현장조사원으로 참여했다. 그해 가장 눈길을 끈 발굴 성과는 단연 순장자의 묘실인 ‘순장(殉葬) 석곽’의 존재였다. 이것은 대가야 고유의 묘제로 44호분에서만 무려 32기의 순장 석곽이 발견됐다.
44호분의 주인과 함께 최소 32명이 한꺼번에 순장된 셈이다. 김세기는 “주인공이 묻힌 석실 등에도 4명이 추가로 묻힌 45호분의 사례를 감안하면 총 36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일 무덤에 30여 명이 순장된 것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이다. 중국에서는 최대 200여 명이 묻힌 순장묘가 발견됐으며 일본은 순장풍습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해지지만 아직 순장묘가 발굴되진 않았다.
순장곽이 여러 개인, 이른바 다곽(多槨)순장묘는 오직 고령 지산동에서만 나온다. 대가야의 영역이던 경남 합천과 함양, 전북 남원과 장수, 전남 순천 등에서는 단곽(單槨)순장묘만 발견된다. 이것은 고령이 대가야의 중심지로 지산동에 왕릉을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김세기는 “지산동 발굴은 황남대총 등 신라 적석목곽분의 순장 풍습을 재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 첫 대가야 금동관 출토
1978년 9월 초순 지산동 32호분 발굴 현장. 도굴로 벽이 무너진 석실 안에서 김세기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발치 쪽 토기를 붓으로 살살 훑다가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게 언뜻 비쳤다. ‘혹 청동기인가….’ 김종철이 돋보기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 녹 사이로 금박이 보였다. 대가야 무덤에서 발굴된 첫 금동관이었다. 먼저 토기를 실측하고 수습한 뒤 금동관을 조심스레 꺼냈다.
32호분 출토 금동관은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던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관(국보 제138호)과 32호분 금동관의 장식이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草花形) 입식’으로 서로 닮은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김세기는 “학계에 이견이 있지만 고고학 자료와 더불어 479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 등을 종합할 때 가야가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령=김상운 기자 ]
[출처] :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외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출처]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1회~ 20회)Ⅱ [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