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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2 주일 낮 예배
오네시모와 빌레몬
빌레몬서 1장 8-21절(369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오네시모와 빌레몬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분도 있고, 이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으신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있습니다. 오늘은 필요한 부분들을 묶어서 말씀을 나누는 대신 본문으로 선택한 내용들을 한절씩 살펴보면서 오네시모와 빌레몬, 그리고 바울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신약에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그리 많지 않은데,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빌레몬서가 개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빌레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학자들은 빌레몬이 바울에 의해서 회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보며(19v), 그가 아킵보나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사람이라고 말합니다(2v;골 4:9).
이렇게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인적인 편지가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성도와 성도가, 또는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편지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교훈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쓴 의도가 이 8절에 암시되어 나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사실 이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에 따르면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사도요, 교회의 지도자요,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도운 사람으로서 간단히 ‘명령’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는 문제를 더 복잡하고 힘들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자기가 명령할 수도 있지만, 명령하는 대신 ‘사랑’(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덕목으로서의 사랑)에 근거해서 간구하고 부탁한다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빌레몬’이라는 이 이름의 뜻이 ‘사랑’ 또는 ‘우정’이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우정의 사람’인 빌레몬에게 ‘사랑’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물론 여기 사용된 단어는 다르다. 빌레몬(필레몬, Filhvmwn)이라는 이름은 ‘필레오’(filevw)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1)사랑하다, 좋게 말하다, 인정하다, 친절하게 대하다, 환영하다, 친구가 되다 2)사랑을 표현을 보이다, 입맞추다 3)좋아하다, 익숙하다’라는 뜻이며, 일반적으로 ‘우정’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말이다. 한편 바울이 여기에서 ‘사랑을 인하여’라고 할 때의 ‘사랑’은 ‘아가페’(ajgavph)이다. 하지만 아가페라는 단어 역시 ‘1)형제의 사랑, 애정, 선의, 사랑, 자비 2)사랑의 제사’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이가 많이 먹은 자기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빌레몬에게 이 부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어떻게 보면 고도의 심리전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 묘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또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해준 영적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서 ‘명령’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그의 ‘사랑’에 근거하여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연장자라는 것과 복음 사역을 위해 옥에 갇힌 자로서 부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상대방이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오면 거절하기가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구차하게 여겨질 정도로 길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사실상 바울이 부탁하고자 하는 내용이 빌레몬으로서는 쉽게, 그리고 선뜻 그러마고 답변하기 어러운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갇혔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자기가 그렇게 갇힌 상태에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0절로 넘어오면 드디어 바울이 자신이 ‘부탁’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이 부분을 주의 깊게 번역하지 않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이 문장의 제일 끝 부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빌레몬을 향해서 거창하게 자기의 부탁을 꼭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 후에, 자신이 감옥에 갇힌 중에 만난 한 사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한 사람과 관련해서 부탁을 하고자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빌레몬이 잘 알고 있는 ‘오네시모’라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된 감옥에 오네시모라는 사람도 투옥되게 된 것 같습니다(먼저 투옥되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런데 바울은 이 감옥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감옥에서 낳은 영적인 아들인 오네시모에 대해서 빌레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11절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그러면 바울은 과연 오네시모와 관련하여 무엇을 부탁하고자 했으며, 왜 오네시모에 대한 내용을 빌레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단순히 ‘명령’해도 되는 것을 왜 구차할 정도로 과도한 제스처를 사용하면서까지 빌레몬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것일까요? 11절이 그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이미 전부서 서로 알고 있던 관계라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알고 있었다는 정도를 지나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있어서 무익한 존재요, 손해를 끼쳤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지만(16절에서 ‘상관’이라고 말하고는 있다), 학자들은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의 노예였는데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쳤을 것이라고 봅니다. 원래부터 빌레몬에게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인인 빌레몬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서 도망을 쳤을 수도 있고, 또는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기 때문에 빌레몬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정확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그에게서 도망쳤다가 어떤 경위를 거쳐서 바울이 투옥된 감옥까지 들어오게 되었고,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회심한 오네시모의 문제를 가지고 빌레몬과 상의하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비록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존재였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유익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오네시모는 이전의 오네시모와는 다른 인물이 되었습니다.
12절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그래서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심복’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 ‘심복’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마음 심(心)에 배 복(腹)을 써서 ‘1)가슴과 배 2)매우 요긴하여 없어서는 안 될 사물 3)심복지인의 준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복지인(心腹之人)’이란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부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꽤 그럴듯한 번역인데, ‘심복’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내장, 창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창자’를 인간의 감정이 나오는 곳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이 말은 ‘오네시모는 내 창자다’라는 뜻이고, 국어사전의 뜻을 차용하면 ‘매우 요긴하여 없어서는 안 될,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부하’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 ‘스플랑크논’(splavgcnon)은 ‘내장, 장, 자비가 거하는 마음, (상징적으로) 동정, 애정’(a sponge)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필요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낸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오네시모의 복역 기간이 끝나서 석방되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석방되었다 할지라도 바울이 계속 곁에 두고 자기를 수종들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였다는 것과, 그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3절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3절이 바로 그런 부분을 설명합니다. 자신이 갇혀 있기에 오네시모를 계속 곁에 머물게 하면서 자신을 섬기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빌레몬의 바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매우 커서, 바울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스스로 찾아와서 바울의 수종을 들고자 했을 것이라는 점을 바울 자신이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직접 올 수 없다는 다른 누군가를 보내서라도 바울의 옥바라지를 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빌레몬 대신 자신의 옥바라지를 하게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사실상 바울에게는 자신에게 그토록 유용한 존재가 된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자 하는 강렬한 마음의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14절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지만 바울은 그 부분에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를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도망쳤다 하더라도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기 때문에, 주인인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는 자기 마음대로 오네시모로 하여금 자기의 수종을 들게 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빌레몬이 그것을 허락해 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이 일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빌레몬에게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빌레몬이 흔쾌히 오네시모가 바울의 수종 들도록 허락한다면 그것은 참 ‘선’하고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자의가 아닌 억지로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이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알린 후에 사도로서의 권위로 명령하는 대신 사랑에 근거한 자발적인 허락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여기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냄으로 잠시 자기 곁을 떠나게 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고, ‘영원히 두게 함’이라는 것은 빌레몬의 허락을 받아 오네시모가 계속적으로 바울 곁에 머물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사건과 그로 인하여 결국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요셉의 형들이 악의(惡意)로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하여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앉게 하셨고,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보호받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물론 오네시모는 악의(惡意)를 가지고 빌레몬에게서 도망쳐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오네시모를 바울 곁에 보내시고 예수 믿는 사람, 그리고 바울의 사역과 교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 기독교 전승(傳承)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후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16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면 이제는 오네시모를 전과 같이 종/노예와 같이 대우할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대우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인 바울도 오네시모를 ‘특별’하게 형제로 여긴다면, 비록 과거에 육신적으로는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다 할지라도 빌레몬 역시 그러한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로 대우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꼭 오네시모가 도망친 노예라서가 아니라, 초대 교회 안에서는 육신적으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 할지라도,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 주인과 노예가 형제처럼 지낸 경우들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전서 7:20-22에서 이렇게 말한다. “(20)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노예 신분에 있을 때에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고 할 때 계속 노예로 살 것인지 자유를 얻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바울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것 때문에 바울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은 당시의 사회 체제에 대해 ‘묵인’한 것일뿐 ‘동조’하고 ‘지지’한 것은 아니다. 이는 바울의 ‘윤리 사상’에 대한 내용을 참조하라.
17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빌레몬이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 ‘동료’로 인정한다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찾아갔을 때 바울을 대하듯이 맞이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네시모를 바울처럼 여겨달라는 의미도 있고, 오네시모가 바울의 심복으로서 그의 복음 사역을 돕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역자들과 동일하게 대우해 달라는 의미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도망친 노예가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처벌하거나 하지 말고 이제는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는 형제로, 그리고 복음 사역을 위해 협력하는 동역자로 인정하고 영접해줄 것일 이야기하는 것이고, 또한 오네시모가 바울 곁에서 수종드는 것을 허락하고 다시 바울 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어쩌면 바울은 이러한 부탁이 너무 ‘일방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치면서 그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우하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쩌면 바울과 오네시모의 입장만 생각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8절과 같이 덧붙입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빚 진 것 또는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울 자신에게 청구하라는 것입니다.
19절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 때문에 입은 손해에 대해 청구할 경구 그것을 자신이 책임지고 갚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의미에서 이 부분을 ‘친필’로 쓴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사역 후기로 가면 그의 시력이 좋지 않아서인지 여러 편지들을 직접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필(代筆)시킨 후에 끝에다가 자기 서명(書名)만 친필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마 이 편지도 대필시키던 중에 중요한 부분에서 자신이 직접 기록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을 책임지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빌레몬이 자신에게 빚진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레몬이 바울에게 돈을 꾸었다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학자들은 바울의 이 표현은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바울은 오네시모의 경우뿐 아니라 빌레몬에게 있어서도 그를 낳아 준 영적인 아버지의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빌레몬도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자비를 체험한 것처럼, 오네시모에게도 그런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0절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이제 20절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해 부탁하는 일의 결론을 맺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오네시모만이 아니라 빌레몬을 낳아 준 영적 아버지로서, 빌레몬을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즉, 빌레몬이 주 안에서 자기을 낳아 준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호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순종함으로 바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레몬을 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21절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뿐만 아니라, 바울은 빌레몬의 사람 됨을 알기에 그가 기꺼이 자신의 부탁에 대해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요청하고 부탁한 것 이상으로 행할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빌레몬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뢰를 표현하고 격려하면서 오네시모에 관한 문제를 마무리 짓습니다.
이제까지 오늘 본문을 한 절씩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정작 오네시모와 빌레몬 자신에 대한 부분은 정리가 안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오네시모와 빌레몬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면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지만 그에게서 도망침으로 주인인 빌레몬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친 노예가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기에 결국은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에 붙잡혀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하여 신실한 하나님의 종, 복음을 위한 소중한 동역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를 위해서 옛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여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쓰게 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의 편에 보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네시모의 입장에서는 이 편지가 정말로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지, 자신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 있는지 확신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편지를 가지고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오네시모의 모습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마가 요한의 모습과 많이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무익한 존재였지만 결국은 유익한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걸고 사랑의 모험을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도망친 노예와 같은 우리를 믿으시고 사랑의 모험을 하십니다.
한편 빌레몬의 경우는 본문에서 바울이 쓴 편지와 부탁을 하는 대상으로만 나타납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보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레몬서의 앞부분에 나오는 바울의 칭찬은 그가 교회 안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존재요 신실한 믿음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찌 보면 무리해 보이는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오네시모의 용서와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동역자로 받아들여 줄 것을 부탁합니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무리해 보이는 부탁인데도 이렇게 담대하게 부탁할 수 있다는 것은 부탁하는 사람이 담대한 성격의 사람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탁을 받는 상대방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빌레몬이 성숙하고 신뢰할 만한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전승이 결국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의 자리까지 갔다고 전해주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했으며 복음 사역을 위한 동역자로 인정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기대하고 확신한 대로 반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바울이 오네시모에게만 사랑의 모험을 한 것이 아니라, 빌레몬에게도 사랑의 모험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바울이 확신한다고 안다고 말하지만, 그건 확정적으로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신앙은 좋지만 돈에 대해서는 인색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우리를 신뢰하고 믿고서 어떤 부탁을 하지만,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그대로 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서도, 빌레몬에 대해서도 사랑의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오네시모 같은 우리, 빌레몬 같은 우리에 대해 사랑의 모험을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바울처럼, 그리고 하나님처럼 다른 이들을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그들의 사랑의 행동을 믿고 모험을 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