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의 어깨를 붙들고 사소하게 붕괴되는 동안
- 임지은, 『무구함과 소보로』(문학과 지성사, 2019)
정기석 평론가
1. 우리도 귤처럼
귤은, 뭉개지고 터져 즙이 흘러나올 때 모습을 드러낸다. 까고 먹고 하는 것은 일상이라 그럴 때 귤은 색깔도 냄새도 없이 있는 듯도 모르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연히 밟은 귤은 뭉개지면서 전구처럼 환하게 켜진다. 귤이 곪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박스 안에 있던 귤의 껍질에 희푸르게 슨 곰팡이를 발견할 때, 귤은 무감각했던 일상의 감각에 침입하고 무신경했던 우리의 신경을 긁는다. 매끄러운 일상 세계에 뭉개진 귤만 한, 혹은 뒤덮인 곰팡이만 한 얼룩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난 것도 겨우 ‘귤’이나 ‘오렌지’ 같은 것이라서, 겨우 성가시고 잠시 번거로울 뿐이다. 애초에 하찮고 사소한 것이라서 무신경했던 것이고, 또 그것이 뭉개지거나 곪아 드러날 때에도 여전히 사소해서, 금세 처리하면 될 뿐이다. 이내 일상은 원래의 매끈함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잠시의 얼룩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시시한 일이겠지만, 그 잠시의 감각이 무언가를 남긴다. 무엇이 시시하고 사소한 일인가. 우리도, 우리 대부분의 시간도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어느 날 문득 밟힐 귤처럼 굴러다니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시간을 담은 박스”(「차가운 귤」) 안에서 찬찬히 곪아가지 않나.
나는 덜 익은 오렌지를 밟고
노랗게 터져버렸다
가끔은 푸른 안개가 묻어 있어도 좋았다
이제 나는 오렌지가 어떤 세계의 날씨인지
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 「과일들」 부분
임지은은 이목구비 없는 빈 곳의 흔적을 더듬는다. 주의와 관심의 필터에 의해 걸러진 것들, 사소하거나 하찮아서 무신경했던 것들, 실은 무신경했기 때문에 사소하거나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들. 우리의 시선과 의식의 바깥에서 흐르는 귤과 귤의 시간이란, 하나의 오브제로서 탐구의 대상이 된 세잔의 과일과는 물론, ‘먹기’ 위해 찾는 귤대상과도 다르다. 그러니 명사도 아닌 것들, 무엇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 아니, 무엇이라 이름 붙이면 그것 아닌 것으로 남겨지는 것들, 뭉개졌거나 찌그러졌거나 깨져 있는 것들. “지워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쉽게, 간단하게” 취급받는 부사(副詞) 같은 것들(「간단합니다」), 시인은 그런 것들이 “어떤 세계의 날씨인지/알아내는 일에 빠”졌다. 그것은 귤 혹은 오렌지 같은 것들이 “노랗게 터”지거나 “푸른 안개가 묻”는 감각의 발견으로부터 시간을 되감는다. 그리고 가려진 그 세계의 틈새를 다시 열어보는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라면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1이라고 불렀을 그런 감각이 무채색으로 내쳐진 것들을 원래의 색으로 돌린다. 귤과 우리가 과즙으로 뭉개지고 푸른곰팡이로 분해되고 있을 동안 세계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지만.
2. 나는 말라가고 당신은 벽이 된다. 내가 벽이 되고 당신이 말라가듯이
뭉개지거나 곰팡이 슨 귤이나, “뭉크러지게 썩어”가는 토마토, “구멍 난 접시” “깨진 컵”, 무수하게 편재해 있는 파편들(「구성원」). 이 하찮은 것들, 부가적인 것들, 없어도 될 것들, 때로 잃(잊)어버리는 것으로 그 소용이 다하는 것들, 다해버린 것들. 컵이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이라면 깨지거나 구멍 난 컵은 그런 사소함으로부터도 쓸모를 다한 것들이다. 그러니 주변부에서도 더 주변으로 밀려난 삶의 잔해 같은 것들, 혹은 느리게 이는 보풀과 여름의 기모들.
후드티나 바지 안을 긁어서 만든 보풀입니다
멀쩡한 것을 조금 망가뜨리면 내가 됩니다
[···]
나는 기모입니다, 입고 있자니 덥고 벗어버리자니 싸늘한
-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부분
추울 때 ‘기모’는 꼭 필요한 것이었으나, “방심한 사이” 3월의 날씨 속에서 기모는 마치 부사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고 기온이 더 올라가면 “쓸모없이 아주 긴 낮잠”에 들게 될 것이다. 한없이 느슨해지다 불필요한 것으로 떨어진 보풀, 겨울의 쓸모로부터 느슨해지다 여름에 남겨진 기모의 시간. 쓸모를 다해가는 시간과 그때 남겨지는 하찮은 것들의 잔해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잊힌다. 무신경과 무감각 속에서 느리게 분해되는 사소한 엔트로피의 시간이다. “조금 망가뜨”려진 ‘나’도 다르지 않다. 쓸모나 필요가 의해 우리를 규정짓는 잣대라면 특히 그러하다. 그러니 “쓸모없이 아주 긴 낮잠”을 자는 ‘나’는 얼마나 무수하게 편재되어 있나.
바짝 마르고 싶은 심정으로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한 번만이라도 불러주었더라면
생선이 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요
[···]
몸은 하얗게 썩고 있지만
이제 막 생겨난 지느러미만은 빛나는
- 「생선이라는 증거」 부분
한 번은 메말라가는 생선이다. 생선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의 사체(死體)다. 메마름은 축축함 이후의 일이다. 축축함이 슬픔이나 우울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면, 임지은의 말라감은 슬픔·우울 같은 것이 햇볕에 봄 이불이 보송보송 마르듯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된 얼룩이 눅눅하게 눌어붙는 메말라감이다. “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쳐”(「모르는 것」) 이후 얼룩이 되듯이.
누군가의 시선을 끌기보다 옥상 위에서 홀로 그리고 느리게 “하얗게 썩”어가는 시간이다. “비린내”와 “옥상 냄새”가 섞여 들어간다. 시간을 되돌리면, 한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던 일, 발견되고 의미가 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귤을 사서 집에 들고 오거나, 정성스럽게 생선의 내장을 빼고 건조하기 좋게 꿰거나 하는 일 등. 하지만 의미는 잠시이고 우리는 이내 그 의미의 쓸모로부터도 희미해진다. 로베르트 무질은 “존속하는 모든 것은 점점 그 각인하는 힘을 상실”한다고 쓰지 않았던가. “벽에 걸어놓은 그림들도 며칠이 지나면 벽에 흡수되어 버”리고, “우리가 일부러 그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관찰하는 일은 극도로 드물어진다”고.2 그러니 한때의 ‘남편’도 “벽으로 빨려 들어가” “벽의 일부가” 되고(「깨부수기」), ‘나’도 “벽지 안에 웃고 있는 무늬가 되”(「기린이 아닌 부분」)어버리지 않나.
그러므로 “왜 사람이 사람인지 움켜”(「궁금 나무」)쥐는 각인과 명명이 아니라, 그때 남겨지고 버려진 것들을 위해 의문을 그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 ‘나’의 시간임을 아는 것. 이 정서를 뭐라고 할까. 어떤 이름들도 뭉개지고 말라가며 잔해만 남길 뿐이니 특히 이와 관련한 명명은 어울리지 않을 테지만, 편의상 이를 ‘비의미화의 센티멘털’이라 부른다면, 그런 것은 이런 나열을 통해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환기된다. “계절이 바뀌어도 찾아가지 않는”(「빈티지인 이유」) 세탁소의 옷들, “상한 우유처럼 흐르는 저녁”(「검정 비닐」). “서랍 속에 가득”한 “쓰다 만 로션” “비에 젖은 현관을 닦은 수건”들(「모르는 것」). 이 사소한 엔트로피가 붕괴시키는 것이 다만 기모(칫솔)의 쓸모 같은 것이 아니라 ‘나’ 의 실재, ‘남편’의 실존 혹은 우리의 관계 같은 것임에 이 사소한 엔트로피의 보편적 비극이 있다. 한때 의미이고 이름이었으나, 흐릿하게 스러지며 작아져가는 것들을
이 작고 주름진 것을 뭐라 부를까?
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쳐 엄마를 만들었다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들의
목소리를 만져보려고 손끝이 예민해진다
[···]
엄마가 흐릿해지고 있다
자꾸만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표를 붙인다
미움은 살살 문지르는 것
칫솔은 관계가 다 벌어지는 것
일요일은 가능한 헐렁해지는 것
비에 젖은 현관을 닦은 수건은 나와 가깝고
불 꺼진 방의 전등은 엄마와 가깝다
오래된 얼룩을 닦는다
엄마 비슷한 것이 지워진다
- 「모르는 것」 부분
뭐라 부를까.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자꾸만 사라지는 것들”을 멈춰 세우려는 절박한 시도다. 하지만 이름은 언제나 실패한다. 어떤 이름도 최초의 그것으로 멈춰 있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아도 “냉장고 속 차가움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러”가는 걸 막을 도리는 없다(「피망」). 그러니 그 근사치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이 이 구체적으로 외로운 실물들이다. “비에 젖은 현관을 닦은 수건”이 “나와 가깝고” “불 꺼진 방의 전등”이 “엄마와 가”까운 것처럼. 하지만 그러한 실물도 “서랍 속에 가득”한 “쓰다 만 로션”처럼 “지워진다”. 칫솔모가 벌어지는 시간처럼 한때 쓸모 있던 기억도 사라져 쓸모없음의 미래를 향해 간다. 하지만 이 불가피함 속에서도, 그것을 잊(잃)어가는 동안에라도, ‘시인’은 잠시 아주 작은 불편들을 환기한다. “잘 닦인 유리창에 지문을”(「간단합니다」), 매끈한 것들에 얼룩을 남긴다.
3. 다시 사라지기 위해서
엔트로피의 증가가 보편적 법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한 법칙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엔트로피에 반(反)하는 다른 과학 법칙이나 철학적·예술적 시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귤’이나 ‘소보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사소함들과 각별해지자. “몸은 하얗게 썩”어도 “이제 막 생겨난 지느러미만은 빛나”니까(「생선이라는 증거」). “둥글게 파먹은” “수박은 그릇이 되어” 시간을 담고 있으니까(「개와 수박」). 어쩌면 엔트로피는 ‘우리’ 관점의 엔트로피이고 필요나 쓸모 역시 그러하니까.
그러니 울프의 문장을 변용하자면, 평범한 날의 평범한 마음속에는 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들이 모든 방향에서 무수한 원자의 소나기로 내리고, 그것들을 살필 때, 예전과는 다른 곳에 강조점이 떨어진다.3 그런 것들과 접촉하는 ‘시인’은, “발끝부터 새로워지려고 이름을 지우고 시를”(「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 쓴다. 여기 임지은의 ‘시인’은 예술적 자각이나 자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쓸모없는 것의 곁을 오래 지켜서 같이 쓸모없어진, 실은 쓸모와 무관하게 편재해 있는 (보풀과 다르지 않는) 무엇일 뿐이다.
그러므로 임지은은 어떤 의미나 명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처럼 ‘쉽게 버려지는’ 것들, 잔해들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죽은 단어를 핀셋으로 건져”(「오늘은 필리핀」) 올리며, 그것들이 붕괴되어가는 시간을, 그것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노출은 무감각에 대한 저항이다. 물론 어떤 노출도 그것이 유효한 유통기한이 있다. 그러니 ‘다시’ 사라지기 위해서. 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끝내기 위해서.4
1.버지니아 울프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에 대한 서평에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버지니아 울프,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정덕애 옮김, 솔, 1996 참조.
2. 로베르트 무질, 『생전 유고/어리석음에 대하여』, 신지영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5, p.90.
3. 울프, 같은 책, 116쪽.
4. 베케트는 “두개골은 사라지는 대신 이렇게 다시 끝내기 위하여 다시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고 썼다(사뮈엘 베케트, 『죽은머리들/소멸자/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 임수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6, p.61).
- 『문학과사회』 2019. 여름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