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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4 / 믿음의 스위치 ON! (행3:1-10)
요즘 지구촌은 월드컵 축구로 인해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나라는 그토록 어렵다는 16강에 진입함으로써 응원 열기를 더하고 있는 반면에 독일, 스페인, 벨기에 같은 소위 축구 좀 한다는 나라들은 줄줄이 탈락했습니다.
탈락한 그들이 평소 어떤 나랍니까? 축구에 있어서 만큼은 상대가 누구든 그 이름만 들어도 기가 죽는 그런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월드컵에서만큼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탈락한 팀들 모두가 최선을 다했겠지만,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할지라도 최선이나 실력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단 얘깁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는 어떨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을 당하면 운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능력도 없으면서 운이 좋기만을 기대한다면 요행수만 바라는 인생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반대로 능력이 있으면서도 운이 나쁘다면 그는 불행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운이란 게 뭘까요? 사전에는 ‘사람의 힘을 초월한 천운’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운이란 게 실제로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사전적인 정의대로라면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운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운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우리 인생이 내 능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운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면 과연 인생을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녕 인생에는 운과는 상관없이 노력하고 애쓴 만큼 성공하고 행복할 방법은 없단 말인지요?
아닙니다. 있습니다. 세상은 방법을 모를지라도 성경은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운이 따라 주지 않아도, 때론 실력이나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인생에서 행복하고 성공할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능력을 세상 사람들은 운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능력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에 관한 한 예를 보여 주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성전 문 앞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구걸하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우선은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에 관한 내용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하루 세 번 삼시와 육시와 구시를 정해 기도했는데 아침과 저녁 기도 때는 번제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동쪽에 1개, 서쪽에 4개, 남쪽에 2개 북쪽에 1개의 문이 있었는데 일반 평민이 이용하는 문은 남쪽에 있는 문으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어 미문이라 불렸으며 원활한 출입을 위해 들어갈 때는 오른쪽 문으로 나갈 때는 왼쪽 문만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했다 했으니 미문 오른쪽에 있었을 것이기에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의 앞을 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선포를 통해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향해 우선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렇다면 생각해볼 것이 베드로와 요한은 진짜 돈이 없었을까요?
저 어린 시절에는 아버님이 친구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방 네 칸 기와집에서 졸지에 단칸방 신세로 전락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돈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육성회비 내래요.’ ‘돈 없다.’ ‘운동화 밑창이 떨어졌어요.’ ‘돈 없다.’처럼 정말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말이 돈 없다였습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불편하고 슬플 때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의 형편도 보면 로마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중에 백성들 대부분은 가난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직업마저 버리고 예수님만 따라다니는 형편이었기에 정말 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생각해봐야 할 것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이 있었다면 당시 상황에서 앉은뱅이에게 그냥 돈으로 적선하고 말았겠는지요?
만약 그랬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이 있었다면 그냥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는 것으로 끝날 일이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저들은 기적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가요? 이렇게 보면 당시 제자들에게 돈이 없었던 것이 불행이었을까요? 다행이었을까요?
믿음이 그런 겁니다. 우리에게도 때론 없기에, 때론 안 되었기에 다행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 인생에 필요한 것이 돈이냐 기적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걸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의 삶의 목적과 노력은 돈을 얻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돈이 없다고 한다면 그다음 말은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에서는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6절을 보세요. ‘내게 없거니와’와 ‘내게 있는 이것’이란 말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있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돈은 없었습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가진 능력, 나의 소유, 내 실력, 그리고 아닌 말로 운까지도 없었을지라도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에게 있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자기들이 믿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말인즉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봐라.’ ‘없다고, 못한다고만 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라.’ 이게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한번 따져 보세요. 그간 여러분은 돈을 얼마나 버셨으며, 얼마나 모아 놓고 계십니까?
아닌 말로 가방끈의 길이나 능력이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며 어려울 때 여러분을 도울 인맥이나 연줄은 어느 정도나 되십니까?
그런 것들의 있고 없고를 떠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아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러분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믿음으로 여러분 앞에 있는 인생의 고락을 헤쳐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을 드립니다.
본문에선 베드로와 요한을 대표로 내세웠지만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수많은 순교자를 냈던 로마의 박해를 보세요. 성도들에겐 로마에 맞설 무기도 없었습니다. 대항할 권세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박해를 피할 길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로마는 망했어도 초대교회의 믿음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이상 우리에게는 세상의 힘을 가지진 못했어도 세상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는 말년에 파킨슨병에 걸렸고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마지막 주자로 성화 단상에 섰을 때 점화를 못 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떨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기자가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주저 없이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가 이 병에 걸린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권불십년이고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지는 힘은 다 유한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능력은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내게도 예수님이 필요한가? 내게도 구원이 필요한가?’라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이 시간에도 세상의 소위 불행한 일들, 원치 않는 질병 고통 문제들은 쉴 사이 없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들어 오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들을 피해 갈 수 있습니까? 사냥꾼에게 쫓기는 꿩 한 마리가 대가리를 풀 섶에 처박고 “사냥꾼 없다. 사냥꾼 못 봤다!”고 소리친다고 해서 사냥꾼이 없어지는 게 아니듯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세상의 시련이나 어려움들은 내가 부정한다 해서 없어지거나 사라져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인생에는 그런 것만이 내게 있는 것의 다는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는 아무리 내가 잊고 산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믿음은 ‘편 나누기 싸움’입니다. 세상 것과 예수님! 그 사이에서 내가 누구 편에 속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치는 곳이면 반드시 예수님의 능력이 그곳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라면 예수님은 어떤 역경과 문제 앞에서일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역사가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야말로 기적이 성경이나 사전에만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실제로 내 인생에서도 펼쳐지는 현실이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이 말씀에서 우린 믿음의 초점을 어느 대목에 맞춰야 할까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 우리에게 있는 신앙이 기복신앙인지 믿음인지가 판가름 나게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교회와 성도가 기복신앙으로 변질되는 이유 중 하나가 믿음의 초점을 “일어나 걸으라.”에만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 믿음의 목적이 절대로 복이나 기적이나 성공 등에만 초점을 맞춰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초점을 “없거니와”에 맞춰야 하고 ‘있는 이것’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믿음은 고난 중에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 속에서 기적을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기복신앙은 내게 기적이 없으면 내게 하나님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기적이 없어도 나에겐 하나님이 계심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찬송가가 이렇게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지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이렇듯 기적은 믿음의 부산물일 뿐 믿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의 목적은 고난 중에서도 감당할만한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셔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은 항상 현재형이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세요. 인생의 문제는 당장에 닥친 현재고 믿음으로 얻게 되는 기적은 장차 있을 미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이 현재형이 되기 위해서는 장치 있게 될 미래가 아닌 지금 닥친 현재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믿음을 켜는 스위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발전소에서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 각 가정으로 공급하면 뭐 합니까? 발전소가 아무리 크고 또 엄청난 양의 전력이 공급된다 해도 가정에서 스위치를 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밥도 짓지 못하고 전등도 켜지 못합니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보내신 응답과 은혜와 기적이 실제로 나타나게 하는 스위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고 하기 전에 믿음 스위치부터 누르세요. 못한다는 상황속에서도 믿음 스위치를 ON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누구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 응답받는 것에 앞서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게 없는 것들로 인해 앉은뱅이같이 된 우리 인생이 다시 일어나 걷는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서라도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스위치를 올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인생에 필요한 온갖 능력이 저나 여러분에게도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본문에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내용 하나를 말씀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7절을 보세요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날 것을 선포하면서 말로만 끝낸 것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그를 잡아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더라고 했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기가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붙잡아 일으켜 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응답받은 것으로만 만족하고 끝내는 것은 기복 신앙일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음에 있어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응답하셨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응답 주셔야 하는지’를 알고 응답을 구해야 그것이 기복 신앙이 안 되고 참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셔야 할까요?
하나님이 왜 여러분의 믿음대로 되게 하셔야 하나요?
응답을 구할 때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나의 오른손을 잡아주시는 이유는 내가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오른손을 잡아주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위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믿음의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고 결국엔 나를 위한 일이 됩니다.
기도와 관련한 복음성가 중에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가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를 위해 구제하고,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때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나의 손을 잡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내게도, 누군가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여러분에게 없는 것으로 걱정하고 염려하고 속상해하고 불안해하지 마세요. 이제부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붙들고 그 있는 것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인생에서 승부를 보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공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