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나 감은사지 삼층석탑(신문왕 대)의 장중한 스타일에서, 불국사 석가탑(경덕왕 대) 스타일의 정제되고 아담한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과도기)를 보여준다.
692년(효소왕 원년)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과 어머니인 신목태후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황복사에 이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706년(성덕왕 5) 효소왕과 신목태후마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성덕왕이 먼저 간 세 사람(아버지 신문왕, 형 효소왕, 어머니 신목태후)의 영혼을 위해 사리 4과와 순금으로 만든 불상 등을 탑의 2층에 추가로 안치했다.
황복사는 이름에 '임금 황(皇)' 자가 들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신라 왕실의 복을 빌던 국가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29세에 이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인 의상의 출발점이 바로 이 탑이 서 있는 자리인 셈이다.
금동사리외함 뚜껑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신라 역사와 불교 미술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금석문 중 하나이다. 사방에 칸을 질러 1행에 20자씩, 총 18행 99자의 해서체 글씨를 새겨 넣었으며, 신라 왕실의 상장례 풍습과 탑의 정확한 조성 경위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대저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백성을 기르고, 지극한 덕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이 사바세계(염부제)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신문대왕께서는 오계로 세상에 응하시고 십선으로 백성을 다스려 다스림이 안정되고 공을 이루시더니, 천수 3년 임진년(692년) 7월 2일 하늘로 오르셨다(승하하셨다). 이에 신목태후와 효소대왕이 종묘의 성령을 받들기 위해 선원가람(황복사)에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이 명문은 삼대에 걸친 왕실의 내력과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고 있다. 신라 중대 왕실의 핵심인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과 그들의 승하·즉위 시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692년에 탑의 건립이 시작되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이 추가로 안치되면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또 최초기의 다라니경 신앙을 확인하게 해준다. 성덕왕이 706년에 탑 속에 넣었다고 기록한『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탑을 지어 재앙을 막고 수명을 늘린다는 내용을 담은 불경이다. 당나라에서 이 경전이 번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 왕실에 곧바로 유입되어 국가적인 탑 건립(불사)에 반영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정밀 판독 결과, 명문 중 기존에 '종묘(廟)'로 읽히기도 했던 글자가 '조(厝, 가매장할 조)'의 이체자로 확인되면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즉, 신문왕이 숨진 뒤 곧바로 왕릉에 묻힌 것이 아니라, 황복사 경내에 약 1년간 임시로 가매장(조장)해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왕을 가매장했던 신성한 자리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효소왕과 신목태후가 이 삼층석탑을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조장(厝葬)'이라는 신라 왕실의 가매장 풍습을 솩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
금동사리외함 자체도 뛰어난 공예품이다. 상판 뚜껑에는 정교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외함의 네 면에는 점선(점묘법)을 콕콕 찍어서 99기의 작은 탑(小塔)을 그려 넣었다. 이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가르침에 따라 99기의 소탑을 공양하여 공덕을 쌓으려 한 신라 불교인들의 신앙을 시각적으로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조장(厝葬)은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무덤(왕릉)에 묻는 것이 아니라, 시신이나 관을 지상 혹은 임시 공간에 일정 기간 안치(가매장)해 두는 풍습이다. 황복사지 사리함 명문에 따르면, 신문왕은 692년 7월에 승하했는데 이 탑은 693년에 세워진다. 즉, 신문왕이 숨진 뒤 약 1년 동안 황복사 어딘가에 그의 시신(또는 관)을 임시로 모셔두었던 것이다.
왜 신라 왕실은 곧바로 묻지 않고 '조장'을 했을까? 먼저 거대한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을 지을 시간 벌기위함이다. 신라 중대의 왕릉들은 거대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흙을 쌓아 올리는 대공사였다. 왕이 살아있을 때 무덤을 미리 만들어두는 수릉(壽陵) 제도가 정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승하 직후 서거 소식을 전하고 국장을 치르면서 동시에 왕릉을 완공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왕릉이 완성될 때까지 임시 안치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로 불교적 '빈소'이자 국가 사찰의 역할이다. 왕이 승하하면 불교식 선종(善終) 의례와 복을 빌어주는 재(齋)를 올려야 했다. 신라 왕실은 국가 사찰이자 왕실 원찰인 황복사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 즉, 황복사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왕이 숨진 뒤 저승으로 가기 전 국장(國葬) 의례를 치르던 '왕실 전용 빈소'였던 셈이다.
임시 안치(조장) 기간이 끝나고 신문왕의 시신이 마침내 진짜 왕릉으로 이장되자, 신목태후와 효소왕은 왕의 시신이 머물렀던 그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를 그냥 비워둘 수 없었다. "이곳에 아버님이 머무셨다."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가매장 장소 바로 그 자리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운 것이다. 삼층석탑은 빈 자리에 남겨진 기념비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 왜(일본), 그리고 발해 등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라 왕이 승하하면, 신라 사신이 배를 타고 당나라 수도(장안성)까지 가거나 바다를 건너 왜에 서거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 이동에만 최소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렸다. 상보(서거 소식)를 전하기 의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거 소식을 들은 외국 조정에서 조문 사절단을 구성하고, 그 사절단이 다시 신라 서라벌(경주)까지 찾아오는 데 또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만약 왕이 숨졌다고 해서 며칠 만에 정식으로 매장(본장)을 해버리면, 외국 사절단이 경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다 끝나고 흙무덤만 남은 상황이 된다. 이는 국제 외교상 있을 수 없는 결례이자 낭비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전임 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애(告哀)와, 새로운 왕의 즉위를 공인받는 책봉(冊封)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핵심 외교 절차였다. 외국(특히 당나라) 사절단은 단순히 상복을 입고 우는 조문만 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의 조서(애도문)를 가지고 와서 전임 왕의 영전(빈소)에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새로 즉위한 신왕(예: 효소왕)에게 정식 왕위를 인정하는 책봉 문서를 전달했다.
따라서 전임 왕의 시신(또는 관)이 빈소에 온전히 모셔져 있는 상태에서 이 국제적인 의례를 치러야만 권력 이양의 정통성이 완벽해졌다. 빈장이 길었던 이유는 외국 사절단이 전임 왕의 관 앞에서 정식으로 조문하고, 새 왕을 공인하는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기간이었던 셈이다.
『삼국사기』나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신라 왕이 승하했을 때 당나라 황제가 조문 사절을 보내 대대적으로 애도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단골로 등장한다. 고구려나 백제가 '3년상'을 치르며 빈소를 오래 유지했던 것도 요동이나 남중국, 왜 등 사방에서 오는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넉넉한 시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 역시 비록 기간은 1년 정도로 비교적 짧았지만, 이 1년이라는 시간은 당나라나 왜의 사절단이 왕복하기에 가장 현실적이고 타당한 외교적 골든타임이었던 것이다.
황복사 탑의 몸돌에 조식된 우주를 자세히 보면 조금씩 깨져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황복사탑 뿐 아니라 석탑이나 기타 신라석탑 전반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연적이거나 후대의 파괴로 나티난 현상이 아니라 석탑 조영 당시에 의도적으로 깨뜨렸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석탑의 모서리를 의도적으로 깨뜨리거나 다듬는 행위(모따기)에 대해 공학적인 완충 효과를 넘어 불교적 교리와 신앙적 의미로 해석하는 시각 역시 학계와 불교 미술사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불교에서 석탑은 단순히 돌을 쌓은 건축물이 아니라, 부처님의 몸(법신) 그 자체이자 우주의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서리를 다듬은 행위는 다음과 같은 깊은 불교적 상징성을 갖는다.
불교, 특히 신라 불교의 핵심인 화엄종(華嚴宗)에서 가장 강조하는 최고의 경지는 원융무애이다. 모든 갈등과 대립, 모나고 날카로운 것들이 서로 융합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는 둥근 상태(圓)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 날카로운 직각(모서리)은 인간의 모난 마음, 즉 번뇌, 아집(나만 옳다는 생각), 분별심(너와 나를 가르는 마음)을 상징한다. 석공이 탑을 조성하며 모서리의 날카로운 각을 정으로 쳐서 둥글게 다듬는 행위는, 탑을 바라보는 중생들이 자신의 모난 번뇌와 아집을 깎아내고 부처님의 원만한 성품(원만구족)을 닮아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수행의 시각화로 해석된다.
동양의 전통 미학과 불교 철학에서는 인간이 만든 100%의 완벽함은 오히려 오만이며, 천지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보았다. 불교 예술에서는 인간의 기술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자로 잰 듯한 완벽한 직선과 직각을 만들었을 때, 마지막 순간에 일부러 아주 미세한 흠집을 내거나 형태를 무너뜨리는 전통이 있다. 이를 백집(白執, 완벽함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린다고 한다.
인간의 정교한 가공(인위) 끝에 모서리를 살짝 깨뜨림으로써, 탑이 인공적인 건축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무위자연)이자 우주의 리듬과 동화되도록 만든 것이다. "완벽하게 깎은 직각 기둥은 인간의 탑이지만, 모서리가 허물어진 탑은 자연과 부처의 탑"이라는 신앙적 고백인 셈이다.
불교에서 탑을 세우는 석공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망치와 정을 들고 탑을 깎으며 끊임없이 탑돌이를 하고 독경을 하는 수행자(변도 승려 또는 거사)였다. 돌을 한 번 정으로 쪼을 때마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경전을 외우는 '일도삼배(一度三拜)'의 마음으로 작업했다. 가장 파괴되기 쉽고 날카로운 '우주의 모서리(우주)'를 정으로 툭툭 쳐서 부드럽게 감싸 안는 마무리는, 석공이 탑을 완성하며 부처님께 바치는 마지막 자비(慈悲)의 의례이자 공양의 몸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탑이 천 년 동안 다치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그 정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완벽함’에 대한 경계와 ‘하늘(신)의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석굴암 천장(궁륭천정)의 균열과 이를 대하는 신라인들의 태도에서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조에는 김대성이 석굴암을 지을 때의 일화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대성이 석불을 조각하고자 감개(嵌盖, 석굴 천장의 덮개돌)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대성이 분하고 아쉬워하다가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감개를 모두 맞추어 놓고 가므로 깨어나 보니 사실이었다." 역사학계와 건축공학계에서는 이 설화를 신라 인들이 "천장 돌이 깨진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그 깨진 상태를 그대로 수용하여 완성했다"는 사실을 종교적으로 미화한 기록으로 해석한다.
세계 건축사에서 석굴암처럼 거대한 돌을 돔(Dome) 형태로 짜 맞추어 만든 인공 석굴은 유례를 찾기 힘든다. 신라의 건축 공학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깨진 돌을 버리고 새 돌을 가져와 흔적도 없이 '완벽한 천장'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이 신라 왕실에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세 조각으로 균열이 간 돌에 은장(나비 모양의 나무나 쇠 쐐기)을 박아 서로 단단히 고정만 한 채 그대로 천장에 올렸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의 완벽은 신의 노여움을 부른다"는 종교적·철학적 고백과 맞닿아 있다. 석공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들, 돌이 깨진 것은 인간의 힘을 벗어난 '하늘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신라인들은 이를 실패나 불량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내린 계시"로 겸허히 받아들였다. 하늘의 뜻(섭리)을 수용한 것이다.
인간이 자로 잰 듯 만든 100%의 인위적인 완벽함은 오만(Hubris)을 낳지만, 하늘이 낸 균열을 인정하고 기술로 보듬어 안은 99%의 완벽함은 비로소 겸손과 영원성을 얻습니다. 깨진 채로 두었기에 석굴암은 비로소 '신의 영역'과 조화를 이루는 종교 예술이 된 것이다. 부서짐으로써 오히려 완성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미완성이나 흠집을 통해 오히려 신성(神聖)과 자연의 온전함에 도달하려는 미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장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슬람 카펫의 '알라의 구멍'이나 조선 달항아리의 무심한 일그러짐처럼, 종교적 경외심과 겸손이 빚어낸 아름다운 사례들을 몇 가지 더 소개해 본다.
북미 원주민인 나바호(Navajo) 인디언들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의 담요나 융단을 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융단을 완벽하게 짜 나가다가, 맨 마지막 테두리 부분에 바깥쪽으로 길게 빠져나가는 빗금이나 흠집 같은 실선을 일부러 하나 집어넣는다. 이를 ‘영혼의 길(Spirit Line)’ 또는 서양인들의 표현으로 ‘페르시아의 결함(Persian Flaw)’이라고 부른다.
완벽한 사각형 안에 문양을 가두면 그 물건에 장인의 영혼이 갇혀버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숨구멍’을 내준 것이다. 또한 오직 조물주(창조주)만이 완벽한 존재이므로, 인간이 완벽한 물건을 만들면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다.
유럽의 거대한 고딕 성당(예: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을 앞에서 바라보면, 양쪽에 솟은 두 개의 첨탑 모양과 높이가 완전히 다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보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지다 보니 건축 양식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설명하지만, 중세 석공(매뉴얼 마스터)들의 종교적 철학도 담겨 있다.
인간이 신을 향해 탑을 쌓아 올릴 때, 바벨탑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좌우를 완벽한 대칭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칭과 균형은 오직 신의 영역(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이 사는 지상 세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성당의 전면에 시각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가옥이나 사찰 건축에서도 이러한 미학은 기술과 버무려져 나타난다. 건물의 기둥을 세울 때 돌을 매끄럽게 깎아 만든 주춧돌을 쓰지 않고, 자연에 굴러다니는 돌을 있는 그대로 가져와 쓰는 것을 ‘덤벙주초’라고 한다.
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기둥 아랫면을 돌의 굴곡에 맞춰 깎아내야 한다. 이를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돌(자연)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네모나게 깎는 오만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기둥(인간)이 자연의 거친 모양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껴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석굴암 천장의 깨진 돌을 그대로 안고 간 것과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틈이 있어야 그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 레너드 코언 (가수 겸 시인)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신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순간’에 완성되는 것 같다. 1층 우주의 모서리를 쳐낸 신라의 석공도, 달항아리를 빚던 조선의 도공도 모두 이 위대한 진리를 온몸으로 알고 있었던 장인들이었다.
인종과 종교, 시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이 도달하는 영성과 철학의 깊은 줄기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표현 방식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극한의 예술을 추구한 거장들이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깨달음은 결국 하나로 통했던 것이다. "오직 불완전함만이 우주와 인간을 연결해 준다."
인간이 자만하여 100%의 완벽을 외칠 때 세상은 닫히고 단절되지만, 스스로 1%의 빈틈을 인정하고 내려놓을 때 그 틈을 통해 신의 섭리가 스며들고 자연과의 조화가 시작된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동서양의 선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깨달았던 셈이다.
첫댓글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표준이 되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나 감은사지 삼층석탑(신문왕 대)의 장중한 스타일에서, 불국사 석가탑(경덕왕 대) 스타일의 정제되고 아담한 양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과도기)를 보여준다.
1942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의 사리공(사리를 모시는 공간)에서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함 뚜껑 안쪽에 안팎으로 99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692년(효소왕 원년)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효소왕과 어머니인 신목태후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황복사에 이 삼층석탑을 세웠다.
그리고 706년(성덕왕 5) 효소왕과 신목태후마저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성덕왕이 먼저 간 세 사람(아버지 신문왕, 형 효소왕, 어머니 신목태후)의 영혼을 위해 사리 4과와 순금으로 만든 불상 등을 탑의 2층에 추가로 안치했다.
황복사는 이름에 '임금 황(皇)' 자가 들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신라 왕실의 복을 빌던 국가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29세에 이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양대 산맥인 의상의 출발점이 바로 이 탑이 서 있는 자리인 셈이다.
1942년 수리 당시 사리함 안에서는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순금 불상 두 구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금동사리외함 뚜껑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신라 역사와 불교 미술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금석문 중 하나이다.
사방에 칸을 질러 1행에 20자씩, 총 18행 99자의 해서체 글씨를 새겨 넣었으며, 신라 왕실의 상장례 풍습과 탑의 정확한 조성 경위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夫聖人垂拱處濁世而育蒼生, 至德無爲應閻浮而濟群有.
神文大王 五戒應世 十善御民 治定功成, 天授三年壬辰七月二日乘天.
所以神睦大后 孝照大王 奉爲宗廟聖靈 禪院伽藍 建立三層石塔.
<효소왕대 기록>
대저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백성을 기르고, 지극한 덕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이 사바세계(염부제)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신문대왕께서는 오계로 세상에 응하시고 십선으로 백성을 다스려 다스림이 안정되고 공을 이루시더니, 천수 3년 임진년(692년) 7월 2일 하늘로 오르셨다(승하하셨다).
이에 신목태후와 효소대왕이 종묘의 성령을 받들기 위해 선원가람(황복사)에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다.
聖德大王 ... 景龍元年丙午五月三十日 卽以此塔 二層之上 納安 佛舍利四箇 施純金彌勒像一軀 無垢淨光大陀羅尼經一卷
<성덕왕 대 기록>
성덕대왕께서는... 경룡 원년 병오년(706년) 5월 30일에 곧 이 탑의 2층 위에 부처님 사리 4과와 순금 미륵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였다.
이 명문은 삼대에 걸친 왕실의 내력과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고 있다.
신라 중대 왕실의 핵심인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과 그들의 승하·즉위 시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692년에 탑의 건립이 시작되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이 추가로 안치되면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또 최초기의 다라니경 신앙을 확인하게 해준다.
성덕왕이 706년에 탑 속에 넣었다고 기록한『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탑을 지어 재앙을 막고 수명을 늘린다는 내용을 담은 불경이다. 당나라에서 이 경전이 번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 왕실에 곧바로 유입되어 국가적인 탑 건립(불사)에 반영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정밀 판독 결과, 명문 중 기존에 '종묘(廟)'로 읽히기도 했던 글자가 '조(厝, 가매장할 조)'의 이체자로 확인되면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즉, 신문왕이 숨진 뒤 곧바로 왕릉에 묻힌 것이 아니라, 황복사 경내에 약 1년간 임시로 가매장(조장)해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왕을 가매장했던 신성한 자리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효소왕과 신목태후가 이 삼층석탑을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조장(厝葬)'이라는 신라 왕실의 가매장 풍습을 솩인할 수 있는 유물이다.
금동사리외함 자체도 뛰어난 공예품이다. 상판 뚜껑에는 정교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고, 외함의 네 면에는 점선(점묘법)을 콕콕 찍어서 99기의 작은 탑(小塔)을 그려 넣었다. 이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가르침에 따라 99기의 소탑을 공양하여 공덕을 쌓으려 한 신라 불교인들의 신앙을 시각적으로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조장(厝葬)은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 무덤(왕릉)에 묻는 것이 아니라, 시신이나 관을 지상 혹은 임시 공간에 일정 기간 안치(가매장)해 두는 풍습이다.
황복사지 사리함 명문에 따르면, 신문왕은 692년 7월에 승하했는데 이 탑은 693년에 세워진다. 즉, 신문왕이 숨진 뒤 약 1년 동안 황복사 어딘가에 그의 시신(또는 관)을 임시로 모셔두었던 것이다.
왜 신라 왕실은 곧바로 묻지 않고 '조장'을 했을까?
먼저 거대한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을 지을 시간 벌기위함이다.
신라 중대의 왕릉들은 거대한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흙을 쌓아 올리는 대공사였다. 왕이 살아있을 때 무덤을 미리 만들어두는 수릉(壽陵) 제도가 정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승하 직후 서거 소식을 전하고 국장을 치르면서 동시에 왕릉을 완공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왕릉이 완성될 때까지 임시 안치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로 불교적 '빈소'이자 국가 사찰의 역할이다.
왕이 승하하면 불교식 선종(善終) 의례와 복을 빌어주는 재(齋)를 올려야 했다. 신라 왕실은 국가 사찰이자 왕실 원찰인 황복사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
즉, 황복사는 단순한 절이 아니라 왕이 숨진 뒤 저승으로 가기 전 국장(國葬) 의례를 치르던 '왕실 전용 빈소'였던 셈이다.
임시 안치(조장) 기간이 끝나고 신문왕의 시신이 마침내 진짜 왕릉으로 이장되자, 신목태후와 효소왕은 왕의 시신이 머물렀던 그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를 그냥 비워둘 수 없었다.
"이곳에 아버님이 머무셨다."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가매장 장소 바로 그 자리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운 것이다. 삼층석탑은 빈 자리에 남겨진 기념비였던 것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빈장(殯葬)이나 조장(厝葬) 풍습은 단순히 '왕릉 만드는 물리적 시간'만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사회 속에서 외교적 프로토콜(의례)을 완성하기 위한 시간 확보가 아주 큰 목적이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 왜(일본), 그리고 발해 등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라 왕이 승하하면, 신라 사신이 배를 타고 당나라 수도(장안성)까지 가거나 바다를 건너 왜에 서거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 이동에만 최소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렸다. 상보(서거 소식)를 전하기 의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거 소식을 들은 외국 조정에서 조문 사절단을 구성하고, 그 사절단이 다시 신라 서라벌(경주)까지 찾아오는 데 또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만약 왕이 숨졌다고 해서 며칠 만에 정식으로 매장(본장)을 해버리면, 외국 사절단이 경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다 끝나고 흙무덤만 남은 상황이 된다. 이는 국제 외교상 있을 수 없는 결례이자 낭비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전임 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애(告哀)와, 새로운 왕의 즉위를 공인받는 책봉(冊封)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핵심 외교 절차였다.
외국(특히 당나라) 사절단은 단순히 상복을 입고 우는 조문만 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황제의 조서(애도문)를 가지고 와서 전임 왕의 영전(빈소)에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새로 즉위한 신왕(예: 효소왕)에게 정식 왕위를 인정하는 책봉 문서를 전달했다.
따라서 전임 왕의 시신(또는 관)이 빈소에 온전히 모셔져 있는 상태에서 이 국제적인 의례를 치러야만 권력 이양의 정통성이 완벽해졌다. 빈장이 길었던 이유는 외국 사절단이 전임 왕의 관 앞에서 정식으로 조문하고, 새 왕을 공인하는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기간이었던 셈이다.
『삼국사기』나 중국 측 기록을 보면, 신라 왕이 승하했을 때 당나라 황제가 조문 사절을 보내 대대적으로 애도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단골로 등장한다.
고구려나 백제가 '3년상'을 치르며 빈소를 오래 유지했던 것도 요동이나 남중국, 왜 등 사방에서 오는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넉넉한 시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라 역시 비록 기간은 1년 정도로 비교적 짧았지만, 이 1년이라는 시간은 당나라나 왜의 사절단이 왕복하기에 가장 현실적이고 타당한 외교적 골든타임이었던 것이다.
황복사라는 공간은 신문왕 개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교적 공간이자, 왕릉 완공을 기다리는 건축적 유예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멀리 해외에서 온 외교 사절들이 전임 국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었던 '국제적인 외교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복사 탑의 몸돌에 조식된 우주를 자세히 보면 조금씩 깨져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비단 황복사탑 뿐 아니라 석탑이나 기타 신라석탑 전반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연적이거나 후대의 파괴로 나티난 현상이 아니라 석탑 조영 당시에 의도적으로 깨뜨렸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석탑의 모서리를 의도적으로 깨뜨리거나 다듬는 행위(모따기)에 대해 공학적인 완충 효과를 넘어 불교적 교리와 신앙적 의미로 해석하는 시각 역시 학계와 불교 미술사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불교에서 석탑은 단순히 돌을 쌓은 건축물이 아니라, 부처님의 몸(법신) 그 자체이자 우주의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서리를 다듬은 행위는 다음과 같은 깊은 불교적 상징성을 갖는다.
불교, 특히 신라 불교의 핵심인 화엄종(華嚴宗)에서 가장 강조하는 최고의 경지는 원융무애이다. 모든 갈등과 대립, 모나고 날카로운 것들이 서로 융합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는 둥근 상태(圓)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 날카로운 직각(모서리)은 인간의 모난 마음, 즉 번뇌, 아집(나만 옳다는 생각), 분별심(너와 나를 가르는 마음)을 상징한다.
석공이 탑을 조성하며 모서리의 날카로운 각을 정으로 쳐서 둥글게 다듬는 행위는, 탑을 바라보는 중생들이 자신의 모난 번뇌와 아집을 깎아내고 부처님의 원만한 성품(원만구족)을 닮아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수행의 시각화로 해석된다.
동양의 전통 미학과 불교 철학에서는 인간이 만든 100%의 완벽함은 오히려 오만이며, 천지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으로 보았다.
불교 예술에서는 인간의 기술을 극한으로 발휘하여 자로 잰 듯한 완벽한 직선과 직각을 만들었을 때, 마지막 순간에 일부러 아주 미세한 흠집을 내거나 형태를 무너뜨리는 전통이 있다. 이를 백집(白執, 완벽함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린다고 한다.
인간의 정교한 가공(인위) 끝에 모서리를 살짝 깨뜨림으로써, 탑이 인공적인 건축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무위자연)이자 우주의 리듬과 동화되도록 만든 것이다.
"완벽하게 깎은 직각 기둥은 인간의 탑이지만, 모서리가 허물어진 탑은 자연과 부처의 탑"이라는 신앙적 고백인 셈이다.
불교에서 탑을 세우는 석공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망치와 정을 들고 탑을 깎으며 끊임없이 탑돌이를 하고 독경을 하는 수행자(변도 승려 또는 거사)였다.
돌을 한 번 정으로 쪼을 때마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거나 경전을 외우는 '일도삼배(一度三拜)'의 마음으로 작업했다.
가장 파괴되기 쉽고 날카로운 '우주의 모서리(우주)'를 정으로 툭툭 쳐서 부드럽게 감싸 안는 마무리는, 석공이 탑을 완성하며 부처님께 바치는 마지막 자비(慈悲)의 의례이자 공양의 몸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탑이 천 년 동안 다치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그 정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완벽함’에 대한 경계와 ‘하늘(신)의 섭리’를 인정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석굴암 천장(궁륭천정)의 균열과 이를 대하는 신라인들의 태도에서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조에는 김대성이 석굴암을 지을 때의 일화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대성이 석불을 조각하고자 감개(嵌盖, 석굴 천장의 덮개돌)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대성이 분하고 아쉬워하다가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감개를 모두 맞추어 놓고 가므로 깨어나 보니 사실이었다."
역사학계와 건축공학계에서는 이 설화를 신라 인들이 "천장 돌이 깨진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그 깨진 상태를 그대로 수용하여 완성했다"는 사실을 종교적으로 미화한 기록으로 해석한다.
이는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부러뜨려 완성한' 완벽함을 표현한 것이다.
세계 건축사에서 석굴암처럼 거대한 돌을 돔(Dome) 형태로 짜 맞추어 만든 인공 석굴은 유례를 찾기 힘든다. 신라의 건축 공학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깨진 돌을 버리고 새 돌을 가져와 흔적도 없이 '완벽한 천장'을 다시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이 신라 왕실에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세 조각으로 균열이 간 돌에 은장(나비 모양의 나무나 쇠 쐐기)을 박아 서로 단단히 고정만 한 채 그대로 천장에 올렸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의 완벽은 신의 노여움을 부른다"는 종교적·철학적 고백과 맞닿아 있다. 석공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난들, 돌이 깨진 것은 인간의 힘을 벗어난 '하늘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신라인들은 이를 실패나 불량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내린 계시"로 겸허히 받아들였다. 하늘의 뜻(섭리)을 수용한 것이다.
인간이 자로 잰 듯 만든 100%의 인위적인 완벽함은 오만(Hubris)을 낳지만, 하늘이 낸 균열을 인정하고 기술로 보듬어 안은 99%의 완벽함은 비로소 겸손과 영원성을 얻습니다. 깨진 채로 두었기에 석굴암은 비로소 '신의 영역'과 조화를 이루는 종교 예술이 된 것이다.
부서짐으로써 오히려 완성에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깊은 종교적 사유를 한 인간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이슬람의 카펫 장인들은 완벽한 기하학적 무늬를 짜 나가다가 마지막에 일부러 조그만 흠집을 하나 남긴다. 이를 '알라의 구멍'이라고 부르며, "완벽함은 오직 알라(신)만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가 완벽한 구형이 아니라 슬쩍 비틀어지고 이지러진 형태를 띠는 것도, 인간의 작위적인 손길을 지워내고 자연스러운 미완성 속에서 대자연의 완벽함을 구하고자 했던 마음과 연결된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1층 우주를 툭툭 쳐서 깎아내린 석공의 마음이나, 석굴암 천장의 세 동강 난 돌을 그대로 들어 올려 우주의 지붕으로 삼은 김대성의 마음은 결국 하나였다.
"인간의 기술은 극한까지 발휘하되, 마지막 모서리는 하늘과 자연의 몫으로 남겨둔다."
인간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미완성이나 흠집을 통해 오히려 신성(神聖)과 자연의 온전함에 도달하려는 미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장인과 예술가들 사이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슬람 카펫의 '알라의 구멍'이나 조선 달항아리의 무심한 일그러짐처럼, 종교적 경외심과 겸손이 빚어낸 아름다운 사례들을 몇 가지 더 소개해 본다.
북미 원주민인 나바호(Navajo) 인디언들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의 담요나 융단을 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융단을 완벽하게 짜 나가다가, 맨 마지막 테두리 부분에 바깥쪽으로 길게 빠져나가는 빗금이나 흠집 같은 실선을 일부러 하나 집어넣는다.
이를 ‘영혼의 길(Spirit Line)’ 또는 서양인들의 표현으로 ‘페르시아의 결함(Persian Flaw)’이라고 부른다.
완벽한 사각형 안에 문양을 가두면 그 물건에 장인의 영혼이 갇혀버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숨구멍’을 내준 것이다. 또한 오직 조물주(창조주)만이 완벽한 존재이므로, 인간이 완벽한 물건을 만들면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일본의 전통 미학인 와비사비(侘寂)는 ‘부족함, 덧없음, 미완성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16세기 일본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센노 리큐(千利休)의 일화에서 이 철학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리큐가 스승의 정원을 청소할 때, 낙엽을 한 장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쓸어낸 뒤, 마지막에 단풍나무 가지를 살짝 흔들어 낙엽 몇 장을 마당에 흩뿌렸다. 인간의 완벽한 청소(인위) 끝에 자연의 섭리를 슬쩍 얹은 것이다.
일본의 최고급 다실(茶室)들을 보면, 곧고 매끄러운 통나무 대신 일부러 구부러지거나 껍질이 거칠게 일어난 나무, 혹은 벌레 먹은 대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곤 한다. 인공적인 자로 잰 듯한 완벽함을 허물어 손님들이 편안함과 겸손함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다.
유럽의 거대한 고딕 성당(예: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을 앞에서 바라보면, 양쪽에 솟은 두 개의 첨탑 모양과 높이가 완전히 다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보통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지다 보니 건축 양식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설명하지만, 중세 석공(매뉴얼 마스터)들의 종교적 철학도 담겨 있다.
인간이 신을 향해 탑을 쌓아 올릴 때, 바벨탑의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좌우를 완벽한 대칭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칭과 균형은 오직 신의 영역(천상)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이 사는 지상 세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성당의 전면에 시각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가옥이나 사찰 건축에서도 이러한 미학은 기술과 버무려져 나타난다. 건물의 기둥을 세울 때 돌을 매끄럽게 깎아 만든 주춧돌을 쓰지 않고, 자연에 굴러다니는 돌을 있는 그대로 가져와 쓰는 것을 ‘덤벙주초’라고 한다.
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기둥 아랫면을 돌의 굴곡에 맞춰 깎아내야 한다. 이를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돌(자연)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네모나게 깎는 오만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기둥(인간)이 자연의 거친 모양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껴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석굴암 천장의 깨진 돌을 그대로 안고 간 것과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틈이 있어야 그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 레너드 코언 (가수 겸 시인)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과 신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겸손의 순간’에 완성되는 것 같다. 1층 우주의 모서리를 쳐낸 신라의 석공도, 달항아리를 빚던 조선의 도공도 모두 이 위대한 진리를 온몸으로 알고 있었던 장인들이었다.
인종과 종교, 시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이 도달하는 영성과 철학의 깊은 줄기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표현 방식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극한의 예술을 추구한 거장들이 마지막 순간에 마주한 깨달음은 결국 하나로 통했던 것이다.
"오직 불완전함만이 우주와 인간을 연결해 준다."
인간이 자만하여 100%의 완벽을 외칠 때 세상은 닫히고 단절되지만, 스스로 1%의 빈틈을 인정하고 내려놓을 때 그 틈을 통해 신의 섭리가 스며들고 자연과의 조화가 시작된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동서양의 선조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깨달았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