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사망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이나 다름없기에 최서해(崔曙海, 1901~1932)와의 만남은 각별하다. 함경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서해는 본명이 학송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극빈으로 내몰린 그는 보통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근근히 살다가 때로는 숙부 집에서 얹혀 지내기도 한다. 가난 속에서도 그는 『청춘』과 『학지광』을 보고, 『학지광』에 산문 「우후(雨後) 정원의 월광」 외 2편을 투고하는 등 문학과 더불어 꿈을 키우며 성장기를 보낸다.
1926년에 나온 창작집 〈혈흔〉에 실린 최서해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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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께 최학송은 좀 나은 삶을 찾아 간도로 이주하지만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간도에서 그는 나무바리 장수, 두부 장수, 노동판의 십장 등을 하며 이리저리 떠돈다. 결혼 뒤에 곧 상처(喪妻)하고, 그는 1923년 봄에 귀국한다. 그는 온갖 풍상 속에서도 독학으로 공부를 하는 한편, 서해라는 이름으로 『북선일일신문』에 시 「자신」을, 『동아일보』에 시조 「춘교(春郊)」를 발표하고, 소설로는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토혈(吐血)」을 발표해 문단에 나온다.
『청춘』과 『학지광』을 읽던 어린 시절, 그는 이광수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이런 인연은 나중까지도 지속되어, 1924년 간도에서 서울의 이광수에게 편지를 띄운 뒤 몸소 찾아감으로써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겨울 어떤 날 그는 야주개 내 집을 찾아왔다.
“최학송이올시다.”
할 때에 나는 퍽이나 반가웠다. 그때에 그는 부종이 나서 다리를 절고 허리를 펴지 못하였다.
이광수, 『이광수 전집』(삼중당, 1962)
당시 거처가 마땅치 않던 최서해에게 이광수는 양주 봉선사에서 승려 신분으로 지내라고 권한다. 이를 받아들여 입산한 그는 거기에서 「살려는 사람」 · 「해돋이」 · 「탈출기」 등을 집필한다. 아울러 간도에서의 굶주림과 노동 체험에 바탕을 둔 「고국」을 써서 『조선문단』의 추천을 받는다. 최서해는 불도보다 문학에 매달리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던 주지승과 잦은 다툼 끝에 석 달 만에 산에서 내려온다. 그 뒤 다시 이광수의 도움으로 1925년 2월 방인근이 경영하는 ‘조선문단사’에 들어간다. 문단 내에 이미 위치를 확보한 문인이자 조선문단사의 사장이기도 한 방인근의 자택 겸 사무실인 용두동 집에 딸린 방 하나를 얻어 들어간 그는 거기서 잡지사의 사환격으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김동인 · 김동환 같은 문인들과 만나고 문단 분위기를 익힌다.
최서해와 가족 친지들
뒷줄 왼쪽부터 최서해, 아내 분려, 화가 이승만, 앞줄 왼쪽이 장남 백, 오른쪽이 이승만의 부인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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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3월, 최서해는 『조선문단』에 「탈출기」를 발표한다. 단편 「탈출기」는 가난에 쫓겨 간도 땅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체험을 편지 형식으로 담은 작품이다. 가난은 그의 원체험이다. 최서해의 거의 모든 작품에 가난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그는 곧 가난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미쳐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다가 돈이 없다고 외면한 약사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박돌의 죽음」, 이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한결 구체성을 띤 「기아와 살육」을 잇달아 내놓는다.
「기아와 살육」의 주인공 경수는 곤궁한 집안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인데 직업도 제대로 없다. 경수네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갖은 설움을 당하고 비참한 일까지 겪는다. 집세를 독촉하는 집 주인, 병든 아내 때문에 찾아간 약사와 의사에게 돈이 없어 당하는 냉대, 머리카락을 팔아 양식을 구해 오다가 개한테 물려죽는 어머니······. 참혹한 현실을 견디다 못한 경수는 자포 자기식으로 식구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중국 경찰서에 찾아가서 복수한다. 이처럼 최서해의 소설에서는 가난한 이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부유한 사람을 향한 분노와 살기가 묻어나곤 한다.
무명에 가깝던 그는 이런 일련의 작품으로 독서계와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김기진 · 박영희 같은 쟁쟁한 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당당히 신경향 작가의 표본으로 떠오른다. 가난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벌인 그가 카프 진영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그는 1926년에 「폭군」 · 「5원 75전」 · 「설날밤」 · 「해돋이」 · 「그믐밤」 · 「누가 망하나」 · 「큰물진 뒤」 · 「무서운 인상」 등을 발표하고, 창작집 『혈흔(血痕)』을 간행하며, 1927년에는 「홍염(紅焰)」 · 「전아사(餞訝辭)」 등을 발표한다.
고통스러운 현실 체험을 소설에 담은 최서해의 1927년작 〈홍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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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소설의 특징은 속도감과 솔직함에 있다. 특히 원한에 찬 복수를 묘사하는 대목은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하고 흥분이 일게 한다. 그러나 최서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난에 대한 일체의 책임을 부자에게 돌리고, 따라서 부자에 대한 맹목적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등 ‘도식적 평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인다. 가난을 낳는 사회 구조적 요인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여는 작중 인물들이 사회 모순에 따른 갈등을 걸핏하면 살인 · 강도 · 방화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드는 한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최서해의 소설을 읽고 난 독자는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게 되지만, 여전히 자신 앞에 버티고 선, 근원을 알 수 없는 현실의 저 거대한 적과 대면하면서 더 큰 허탈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초기 신경향 작가의 대표 주자인 최서해는 사실 의식적으로 신경향 소설을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 체험을 소설이라는 그릇에 퍼담은 것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이런 현실 체험의 단편적 기술과 분노의 과잉 분출은 끊임없는 세계의 ‘창조’라는 문학의 본령에는 미치지 못해 곧 한계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1927년이 지나면서 그의 감정적 분출은 휴머니즘으로 흐르게 된다. 이에 따라 후기 프로 문학의 요건, 즉 당파성과 계급 목적 의식에 근거한 전형 창출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져서 강력한 비판을 받고, 1929년에는 카프에서 탈퇴하기에 이른다. 그 뒤 『중외일보』에 입사해 2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1931년에는 『매일신보』로 옮겨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며 장편 「호외 시대」를 연재한다. 이 무렵, 온갖 고생을 하며 떠돌던 시절에 얻은 위병이 도져서 그는 몹시 고통을 받는다. 견디다 못해 아편을 써보기도 하나, 1932년 7월 9일, 최서해는 결국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다.
哭 曙海/沈熏
온 종일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 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 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절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을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 것의 약을 지어준다던 그대여,
어린 것은 나아서 요람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使氣 없는 표정은 어느 얼굴에서 찾더란 말이요?
사람을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읍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 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三十 평생을 숨도 크게 못쉬도록 청춘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에 치가 떨릴 뿐이외다.
(『동아일보』, 1932.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