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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의 나그네’는 혜초 사문처럼 비록 항로를 이용하여 천축까지 갈 수는 없지만 혜초의 뱃길에 대한 현장감만은 맛보고 싶어서 일단은 부두에서 주강(珠江)을 따라 60km 내려가 큰 바다인 남해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홍콩으로 가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오후 배표를 예매해 놓고 남은 시간을 광주에서의 혜초의 체취를 더듬어 보기로 했다. 물론 혜초의 광주에서의 행적에 대하여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연관되는 자료가 있어서 혜초가 천축행 배를 기다리며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들은 찾아낼 수 있었다.
혜초가 이 곳에 왔었을 8세기 초, 광주만은 당제국의 후광 속에서 만개한 국제적인 항구였다. 세계적인 대국이었던 당의 대외교역로는 ‘해양 실크로드’와 ‘내륙 실크로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바로 행양로의 거점이었기에 남방제국이나 인도 그리고 멀리는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교역이 왕성하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당대의 불교는 개화기를 맞고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인도와 직항로가 개설된 광주항은 중국불교의 일번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기에 인도에서의 새로운 불교사상은 먼저 광주에 도착한 다음에 낙양이나 장안으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선종(禪宗)의 초조로 꼽히는 보리달마(菩提達摩)가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온 곳이 이 곳이었고, 중국 밀교의 개조이며 최초의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 등이 들어온 곳도 이 곳이었고, 또한 현장을 제외한 법현, 의정, 오공 등등의 약 60여 명의 인도 유학파가 드나들던 곳도 이곳이었다.
한편 광주는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의 활동무대이기도 하였다. 바로 한국 선불교의 뿌리인 조사선(祖師禪)의 고향인 것이다.
당시 불광(佛光)을 빛내었던 인물들이야 이미 수없이 윤회를 되풀이했을 것이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체취를 간직하고 있을 무정물(無情物)들은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당시에 항로(航路)의 불을 밝혀 주었던 옛 등대와 그들이 무역풍을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나그네로 묵었을 객사(客舍)였다. 그 곳들은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아직도 그렇게 서 있어서 지도를 들고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먼저 광효사(光孝寺)로 달려갔다. 4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고찰은 촛불의 산더미와 다발 채로 피우는 자욱한 향 연기에 온 가람이 잠겨 있었다. 이 절은 혜능의 육신상(肉身像)과 옥으로 조성된 와불(臥佛)로 인하여 유명한 곳이어서 평일인데도 넓은 경내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혜능은 불교사적 비중 이외에도 전설화된 일화가 많은 인물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땔나무를 팔아 연명을 하다가, 어느 날 『금강경』 한 구절에 마음이 열려 늦게 출가하였다. 깨달음을 얻고서도 평생 땔나무를 담당하는 부목처사나 방앗간지기 같은 일을 하면서 몸을 낮추고 있다가 많은 당대 명문 제자들을 제치고 달마에서 내려오는 선종의 의발(衣鉢)을 비밀리에 오조 홍인(五祖弘忍)에게서 받고는 남방으로 내려와 조계산에서 선풍을 휘날렸다.
즉 676년의 이 사건(남방으로 혜능이 내려온 것)으로 인하여 선종은 남·북종으로 갈라지는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는데 후에 남악(南嶽)파에서 임제(臨濟) 등 기라성 같은 선사들이 출현하여 여래선(如來禪)에서 변화된 중국식의 선풍이 만개되었기에 혜능은 조사선의 개조로 꼽히게 되었다. 특히 임제 계열은 해동의 선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어서 육조는 우리 불교사에도 무거운 비중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동안 선(禪)은 ‘젠(Zen)’이란 일본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지면서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그들은 선을 가장 ‘동양적인 것의 정수’라고 하면서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기도 하고 언어로도 이해해 보려고도 한다. 언어가 끊어진, 선문답(禪門答)의 세계에서 내비치는 기상천외한 일종의 반탄력(反彈力)에 그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구의 물질문명의 끝이 보이지 않는 성취는 이미 그 반작용이 심각하게 예견되고 있지만 아직도 인류는 이쯤에서 자족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동도서기(東道西技)라 했다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획일적으로 닮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실정인데 오히려 그 서쪽은 우리가 무가치하게 내던져버린 동쪽의 것을 배우려고 야단이다. 어찌 보면 그런 대로 공평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세기말 현상 앞에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른 세계적인 화두(話頭)가 된 참선을, 이런 깨달은 선사만이 이해할 선문답(禪門答)의 경계를 처음으로 열어 보인 인물이 바로 오늘 이 광효사의 주인공이다.
혜능은 말년에 이곳에서 지내다가 76세를 일기로 결가부좌 상태로 입적에 들었다고 한다. 그의 육신은 천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치 살아있듯 조금도 변하지 않아 지금까지 법당 안에 모셔져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명한 “보리수 … 운운” 하는 게송과 그의 생애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비롯한 많은 경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여기서 사족을 달 필요는 없다.
“자. 어서 이르라.”
“혜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육룡탑(六龍塔)아! 너는 보았겠지, 님 떠나던 날의 정경을…
혜초와 혜능은 연보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듯이 비슷한 연대에 살았던 인물들이지만, 그러나 혜초의 광주 도착 직전인 713년에 혜능은 열반에 들었기에 둘의 만남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혜능의 위치와 좌화(坐化)는 당대의 큰 사건이었으니 만큼, 비록 종파는 틀리더라도 약관의 비구 혜초는 큰스님의 예우로 혜능의 영전에 삼배를 드렸으리라고 보는 것은 그리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더 비약한다면 혜초는 천축승이 많이 머무르고 있었던 남방 최대의 국제적 사찰인 이 절에서 객승으로 머무르고 있었을 추정도 가능하다.
때로는 번쩍이는 번개 같고 때로는 귀청이 터지는 우레소리 같고 또한 때로는 현란한 말장난 같은 선문답들이 오고 갔을 것이다. 혜능이 주장자를 휘두르고 있었을 당시의 광효사의 광경을 그려보며 일주문을 걸어 나오며 한편으로는 그 문을 수 없이 드나들었을 혜초의 체취 또한 그리워하였다.
이 번에는 모든 배들의 야간 이정표가 되었던 옛 등대를 찾아보았다. 광효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뜻밖에도 회교(回敎)사원 경내에 들어 있었다. 당시는 물 가에 있었다는 데 물길의 변화로 지금은 육지 속의 섬으로 변해 있었다. 글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다음은 육룡사(六龍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6세기에 세워졌다는 용의 전설이 어려 있는 이 사원은 특히 50여m의 높이에 거대한 8각 9층의 일명 화탑(花塔) 또는 육룡탑으로 유명하였는데, 정상까지 사람이 나선형으로 올라갈 수 있게 축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려 달려간 육룡사는 수리 중이어서 탑은 온통 덮개로 싸여 있었고 출입마저 봉쇄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교외에 있는 연화탑(蓮花塔)으로 달려갔다. 관음의 불국토인 연화산 언덕에 거대한 탑이 솟아 있었다. 좁은 통로로 한참을 기어오르다시피 정상에 오르니 눈 아래 주강이 마치 거대한 은색 뱀처럼 굽어진 물줄기를 누이고 한낮의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고 그 위를 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천축의 하늘은 어디쯤일까 어림잡아 보아도 아무래도 눈길이 모자란다.
마치 환영처럼 한 그림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주강(珠江) 위에는 막 천축으로 떠나가는 큰 무역선이 크고 작은 황포 돛을 올리며 동쪽으로 미끄러지듯 나가고 있었는데, 그 뱃전 한 귀퉁이에 경전을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된 대나무로 만든 ‘급(給 )’을 멘 약관의 나이로 보이는 한 사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딱히 아무도 그를 위한 배웅객이 없어 보이는데도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육지가 멀어질 때까지….
김규현 bulkwang_c@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