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입력 2022.10.18 00:25 밀수무기로 싸운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군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포 후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이라크 등 주변 국가들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네게브 사막을 지나던 이스라엘군 군용 차량 행렬이 적진 방향을 향해 총을 겨누고 경계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군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지만 독립을 준비하며 은밀하게 무기를 들여와 비축하고 유대인들이 앞다퉈 전장으로 달려가는 등 빼어난 전략과 사기로 맞섰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끝내 승리를 거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네게브 사막의 키부츠를 이끄는 청년 리더 시몬 페레스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시몬에게 1년만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랬던 벤구리온은 시몬을 가까이에 20년 잡아두며 그에게 의지했다. 그런 벤구리온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 청년을 그토록 믿지요?”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지. 그 청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 청년은 다른 사람 흉을 보지 않아. 그리고 그 청년은 내 방에 올 때마다 대부분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와.”
그랬다. 시몬 페레스는 70년 정치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진실을 앞세워 정면 돌파했으며, 정적에 대해 네거티브 전략을 펴지 않았고, 평생 새로운 아이디어와 원대한 꿈을 갖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이런 기질은 어렸을 때 형성됐다. 그의 아버지는 가정을 활기차게 이끄는 목재상이었으며 어머니는 문학을 사랑하는 도서관 사서였다. 어머니는 도서관 책을 빌려 와 시몬과 함께 읽으며 토론을 즐겼다. 시몬은 어머니에게 지지 않으려 책을 열심히 읽었으며, 토론에 대비해 책 내용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공동체 지도자인 랍비였다. 그는 시몬에게 토라와 유대 역사를 가르쳤다. 덕분에 시몬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유대교인이 되었고 유대 민족의 앞날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가 살았던 폴란드 변방 유대인 마을에는 가족 같은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시몬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1934년 열한 살 시몬이 고향을 떠나 텔아비브로 이주할 때 할아버지와 약속했다. 어떤 경우에도 유대인으로 남겠다고. 몇 년 후에 나치군이 유대인 마을에 쳐들어와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시나고그에 몰아넣고 산 채로 불태웠다. 시몬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되살렸다. 시몬은 고등학생 때 청소년 운동 단체에 가입했으며 열다섯 살 때 청년 지도자를 양성하는 ‘벤쉐멘 농업학교’의 장학생으로 뽑혀 전학 갔다. 그곳에서 낮에 배우며, 농사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밤에는 총 들고 보초 서며 때때로 쳐들어오는 아랍인들에게 맞서 싸웠다. 그곳 마을에서 평생 반려자인 소냐를 만났다. 당시 시몬은 신기술 농사법을 배워 팔레스타인 땅의 60%인 네게브 사막을 농토로 바꾸는 일이 자기 사명이라 여겼다.
그 무렵 학생들은 유대 국가의 정치 체제에 대해 두 파로 나뉘었다. 시몬은 유대 국가를 소련식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들과 토론하면서 유대 국가는 유대교를 기초로 유대 민족 특유의 정치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를 설득하곤 했다. 그는 토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향력 있는 행동인지를 깨달았다. 시몬은 연설 능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청소년 운동 리더로 부상했다. 이때부터 벤구리온은 시몬을 눈여겨보았다. 페레스를 키운 집단농장 키부츠 - 키부츠에 소속된 젊은이들이 1950년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나무를 심고 물을 주는 녹화 작업을 하고 있다. 1948년 건국 선포 뒤 이스라엘인들은 대외적으로는 주변 아랍국들의 침공을 막아내며 국가 안보를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는 황량한 국토를 녹화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져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41년 벤쉐멘을 졸업한 후 시몬은 게바 키부츠(집단농장)에 파견되어 농사와 청소년 운동을 이끄는 일을 병행했다. 이후 시몬은 몇몇 동지와 함께 알루못에 새로운 키부츠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시몬은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조차 그에게는 값진 경험이 되었다. 시몬은 목자 처지가 아닌 양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양 떼와 소통해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시몬은 알루못 키부츠의 책임자가 되어 1945년 소냐와 결혼했다. 당시 벤구리온은 시몬에게 키부츠에서 빠져나와 청소년 운동에 전념하며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 방안에 대해 두 파로 나뉘어 있었다. 싸워서라도 옛 영토를 전부 찾아 ‘온전한 이스라엘’을 건국하자는 강경파와, 현실적으로 건국 시도부터 실패하지 않도록 유엔이 추진하는 ‘아랍과 유대 국가 분할 건설’안을 받아들이자는 현실파가 그것이다. 1945년 시몬은 텔아비브에 있는 청소년 운동 본부로 옮겨가 전국 청소년 지부를 돌아다니며 벤구리온과 자신이 주장하는 ‘이스라엘 분할 국가 건국’안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어 전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1947년 5월 24세에 시몬은 벤구리온의 요청으로 지하 유대인 군대 ‘하가나’에서 복무하는 군인이 되었다. 벤구리온은 시몬에게 이스라엘을 건국하면 필연적으로 아랍 국가들과 전쟁이 일어날 텐데 무기를 최대한 빨리 은밀히 준비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당시 소련은 아랍 국가들에 무기를 팔았으나 서방 국가들은 중동에서 전쟁을 원치 않아 이스라엘에 무기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시몬은 유대 국가를 지키는 유일한 길은 금수 조치를 피해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해 몰래 들여오는 것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여권을 위조해 비밀리에 전 세계 디아스포라(유대인 공동체)를 돌며 무기상들을 접촉했다. 시몬은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 분해해 몰래 팔레스타인에 보내 다시 조립했다. 무기 구입 자금도 해외 유대인 공동체를 접촉해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체코슬로바키아와 연결되어 6개월 만에 상당량의 무기를 비축할 수 있었다.
1947년 11월 유엔에서 두 국가 분할 건국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유대인들은 환호했고 아랍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듬해 5월 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같은 날 벤구리온은 기습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건국 당시 유대인 인구는 80만명이었다. 예상대로 다음 날 사방에서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군대가 쳐들어왔다. 비축해두었던 무기 덕분에 어렵게나마 방어해낼 수 있었으며 전쟁 중에도 무기 수입은 계속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유대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전쟁 시작 무렵 이스라엘 군인은 3만5000명이었으나 이듬해 끝날 무렵 10만 명이 돼 세 배로 불어났다. 새 이민자들이 입대하고 해외 유대인들이 신생 조국을 지키려 많이 자원 입대했기 때문이었다.
1차 전쟁이 끝난 뒤 시몬은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미국 가서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벤구리온에게 미국 유학 의사를 밝혔다. 벤구리온은 흔쾌히 허락했다. 시몬은 뉴욕 야간대학에 다니며 낮에는 무기 거래 암시장에 뛰어들어 뒤이을 전쟁에 대비했다. 시몬은 콜롬비아에서 영국제 구축함 두 척을 사들였고, 미국에서 탱크와 비행기를 구입해 분해한 뒤 이스라엘로 보내 재조립했다.
시몬을 돕는 미국 내 유대인들이 캘리포니아 외진 곳에 비행기 비밀 격납고 겸 정비 공장을 만들어 밀수출을 도왔다. 아예 그들은 폐기된 비행기 부품들을 사들여 비행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시험 비행을 마친 비행기는 다시 분해해 이스라엘로 보내 재조립했다. 어떤 때는 영화 촬영하는 것처럼 위장해 비행기를 이륙시켜 그대로 이스라엘로 날려 보냈다.
이후 시몬과 그들은 야심 찬 계획에 착수했다. 비행기 제작 공장을 아예 이스라엘에 건설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시몬은 공부를 계속하여 하버드 경영대학원까지 마치고 귀국해 1953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캘리포니아 비행기 제작 회사가 1954년 이스라엘로 옮겨와 베덱항공을 설립해 비행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국방의 첫걸음이었다. 1959년 6일 전쟁 때는 프랑스 전투기를 복제해 이스라엘 기술로 만든 전투기들이 출격했다. 그 뒤 베덱항공은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으로 확대되어 이스라엘을 위성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위성 산업은 미사일 방어 시스템 아이언돔을 탄생시켰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만든 영원한 청년, 시몬 페레스
시몬 페레스는 22세 때 다비드 벤구리온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해 얼추 70년 동안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그 사이 장관만 10번을 했다. 총리도 70, 80, 90년대 한 차례씩 세 번을 지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군사적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군대에 컴퓨터와 위성을 도입해 현대전의 판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시켰다. 이어 이스라엘을 창업 국가로 만들었으며, 일생을 테러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아라파트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199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92세까지 8년간 일했다. 93세에 젊은이들을 위해 쓴 회고록 탈고 일주일 뒤에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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